192화
“각하, 이게 대체 무슨 조화입니까?”
“글쎄…….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리키 경이 잔뜩 겁에 질린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이거 저희를 끌어들이려고 만든 함정 아닙니까?!”
리키 경이 고개를 휙휙 돌렸다. 한 박자 늦게 주변을 돌아보며 잔뜩 경계했다.
아스테리온도 처음에는 리키 경처럼 함정이 아닐까 의심을 했었다.
“그건 아닐 거야. 이 별채를 중심으로 기척에 걸리는 생명체라고는 현재 별채 주변을 지키고 있는 그 병사들뿐이야.”
“휴, 다행입니다.”
리키 경이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았다.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의 기감과 판단이라면 확실했다.
“이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보가 전달 과정 중에 어딘가에서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니 확실히 알아봐야지.”
그러자 리키 경이 자신에게 붙들린 아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테오도르 황자에게 말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널 해치지 않아. 여기에서 널 구해 주려고 온 사람들이야.”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의 두 눈에는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리키 경은 아이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상태에서는 아이의 입을 막은 손을 거두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하죠, 각하?”
“어떻게 하긴, 데리고 가야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어떻게 한 사람이 아이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두 모습 중 진짜 모습이 뭔지를 알아보는 것은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조용히 데리고 나가야 하는데…….’
리키 경이 아이를 기절시켜야 할지 말지를 잠시 고민했다. 그 모습을 본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오러로 아이의 입 주변을 꽁꽁 감쌌다. 입만 막았기 때문에 코로 숨 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리키 경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어린아이를 기절시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었는데 단숨에 고민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천으로 입을 막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아무리 잘 막아도 신음 소리가 충분히 새어 나갈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오러는 소리를 아주 확실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역시 주군이셔. 난 언제쯤 오러를 주군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려나.’
커다란 실력 차이를 뼈저리게 절감하며 리키 경이 아이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 * *
아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요란하게 발버둥을 쳐도 리키 경의 표정은 가벼운 보따리 하나를 품에 안은 듯 무척이나 평온했다.
두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왔던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태자 궁을 빠져나왔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황궁의 외성에서도 황궁 밖과 경계를 이룬 가장 마지막 외벽에 다다르자, 리키 경이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아스테리온에게 안겨 주었다.
아스테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의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안았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귀가하십시오.”
“다음에 보지.”
아스테리온이 몸을 돌렸다. 제자리에서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높은 성벽을 손쉽게 훌쩍 뛰어넘었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리키 경도 몸을 돌려세웠다. 그가 발걸음을 서두르며 테오도르 황자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말을 숨겨 둔 숲에 금세 다다랐다. 그가 품에 고이 안고 있던 아이를 들어 올려 말안장 위에 앉혔다. 그러자 아이가 안장 앞부분을 바로 움켜잡았다.
‘나한테 잡혀가는 것보다 말에서 떨어지는 게 더 무서운 모양이구나.’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환한 달빛에 비친 아이의 외형이 그의 눈에 확 들어왔다.
‘도노반과 닮았군…….’
아이의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 황태자와 판박이였다. 하지만 얼굴의 이목구비는 그다지 닮은 구석이 없었다.
아이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아스테리온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몸을 파드득 떨었다.
그런 아이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아스테리온이 고삐를 쥐고는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그의 애마가 새벽을 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블레스의 얼굴을 계속해서 스치고 지나갔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하지만 처음 타 보는 말에 아이의 몸과 마음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블레스는 강제로 잠에서 깨 두 남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더럭 겁이 났다. 자신을 압도하는 기운에 짓눌리며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어딘가로 옮겨지는 걸까, 아니면 또 납치를 당하는 걸까? 나는 왜 이런 일들을 당해야만 하는 걸까?
눈물이 비죽 솟아나려고 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울면 두들겨 맞는다는 사실과 아픈 건 싫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블레스는 다행히 잘 참아 낼 수 있었고, 두들겨 맞지 않았다. 순간 안도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둘 중 부하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자신을 부드럽게 달래며 말을 건 것이다.
하지만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느려질 줄을 몰랐다. 제때 대답을 하지 못해도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교를 붙인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곧 날아올 주먹을 대비하기 위해 두 팔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붙잡혀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며 방어하는 것을 곧장 포기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남자들은 자신을 때리는 대신 들어 안고 방을 빠져나와 이상하고 어두컴컴한 곳을 지나 별채 밖으로 나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블레스가 어어 하는 사이에 상관으로 보이는 남자의 품에 안겨 커다란 궁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블레스는 세찬 바람과 말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드디어 깨달았다.
‘황궁을 탈출한 거구나!’
자신을 황궁에서 구하기 위해 왔다는 그들의 말이 정말로 거짓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 뒤를 이어 온몸의 맥이 탁 풀리면서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어, 지금 잠들면 안 되는…….’
어느 순간, 블레스의 고개가 앞으로 푹 꺾였다.
아스테리온이 재빠르게 아이의 몸을 받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덕분에 아이의 몸은 훨씬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긴장이 제대로 풀린 모양이군.’
* * *
저 멀리 위풍당당한 남작저가 서서히 보였다.
아스테리온은 뒷문을 이용해서 조용히 아벨리오 남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요? 수고했어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청아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아스테리온의 두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이 새벽에 록사나가 홀로 그를 마중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스테리온은 이런 걸 기대하거나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심장이 들뜨며 울렁거렸다.
“지금 이 시간에 왜 안 자고 나와 있어?”
반가운 속마음과는 다르게 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내가 만약 늦은 밤 집을 나섰다가 이 시간에 돌아온다고 한다면 당신은 두 발 쭉 뻗고 쿨쿨 자고 있을 건가요?”
“그건!”
아스테리온은 말문이 턱 막혔다.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껄껄껄~! 푸하하~!! 큽!!”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우렁찬 웃음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이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한 카일라니 기사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자신들의 주군이 쩔쩔매며 당황하는 모습은 몹시 재미있고 진귀한 볼거리였다. 불가항력이었다.
아스테리온의 날카로운 시선이 즉각 기사들에게 향했다. 살갗을 저미는 기세에 기사들이 자신들의 입을 재빨리 가리며 웃음을 멈추기 위해 애썼다.
그때 록사나가 걸음을 옮겨 기사들 앞을 턱 하니 가로막아 섰다. 아스테리온의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대변에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우리를 악으로부터 기꺼이 보호해 주시다니!’
기사들은 자신의 몸 반쪽도 안 되는 록사나의 작디작은 등을 감격 어린 눈빛으로 하염없이 우러러 바라보았다.
“록사나, 그대는 정말…….”
이제는 도저히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며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들어 올려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날 샐 때까지 그렇게 계속 있을 거 아니면 어서 내려요. 조심해서요.”
그때까지도 하마하지 않았던 아스테리온이 주인 말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곧장 땅으로 내려섰다.
“말은 제가 마구간으로 데려다 놓겠습니다.”
기사 하나가 나서서 아스테리온에게 말고삐를 건네받고는 마구간 쪽으로 곧장 향했다.
기사가 고삐를 잡아끌자, 아스테리온의 애마가 신이 나서는 긴 꼬리를 신나게 흔들면서 부지런히 따라갔다.
임무 후 받게 되는 보상인 신선한 당근과 사과, 각설탕 등, 제가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받아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멀어져 가는 말 쪽을 바라보던 록사나가 고개를 돌려 아스테리온을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그의 가슴 쪽을.
“어, 몸이……?! 아이네요?”
아무리 눈을 비벼 다시 쳐다봐도 아스테리온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은 렌시아처럼 폭풍 성장을 거친 몸이 아니라 온전한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맞아, 잠시만.”
아스테리온이 다른 기사에게 아이를 넘겼다. 그때까지도 블레스는 깨어나지 못했다.
“긴장이 풀려서 기절한 상태야.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별채로 데려가서 알렉한테 한번 보이도록 해. 깨어나면 다시 잠을 자든 놀든 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고.”
아스테리온은 마지막으로 자신이나 록사나에게서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아이가 방 밖으로 나서지 않게만 잘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기사가 아이를 안아 들고 두 사람에게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그녀의 마른 어깨에 둘러 주었다. 아까부터 얇은 숄 하나만 걸치고 있는 차림새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었던 까닭이다.
록사나는 기다란 망토를 걸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지금 7월이라고요.”
“알아. 하지만 한여름의 새벽바람도 환자에게는 치명적이지.”
“아, 예~”
록사나의 입술이 절로 툭 튀어나왔다.
거동의 불편함이 사라지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스테리온은 여전히 그녀를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 취급을 했다.
그의 과보호가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때로는 민망하고 가끔은 부담스러웠다.
록사나는 의문이 들었다.
‘살을 찌우면 좀 덜하려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성인이니, 몸을 옆으로 불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상념을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