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결혼 생활 내내 그녀를 피하고, 그녀가 해 왔던 노력들을 짓밟고 무시했었던 벌을 지금에서야 받고 있는 거네.’
이번에는 심장이 욱신거려서 록사나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의 침묵이 점점 길어지자, 록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내가 꼴 보기 싫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대번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효과가 직방이네.’
록사나가 씩 웃었다.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하면 그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아니다, 많이.
“하도 고개만 숙이고 있으니까 그렇죠. 아니라고 하니까 다행이네요.”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너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록사나가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이거 한번 봐요.”
“게이트를 설치할 곳에 대한 목록이군.”
내용을 죽 훑어 내리던 아스테리온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 성을 포함한 수도 공작저뿐만 아니라 정말 여기에도 설치해 주겠다고?”
그가 몇 군데를 짚으며 재차 확인했다.
“네, 맞아요. 싫어요?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공작님이 안 된다고 하면 빼야죠.”
록사나가 뾰로통한 얼굴로 서류 귀퉁이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이 두 손으로 그것을 단단히 붙들었다.
“잠깐만. 싫다니.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냥 예상하지 못해서 놀란 것뿐이야. 미안해.”
“그렇다면 뭐. 사과 받아들일게요.”
그의 열광적인 반응에 록사나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다.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가 건넨 목록 안에는 공작령의 주요 거점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러 장난을 친 거긴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이랑 반응을 보니까 자꾸만 더 하고 싶어지잖아.’
록사나의 확답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그는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연신 서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우선은 공작 성이랑 수도 공작저에 먼저 설치하고 나머지는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진행할 거예요.”
“그대 편한 대로 해.”
아스테리온이 생각에 잠겼다. 록사나가 그에게 호의를 베풂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카일라니 공작가와의 돈독한 관계와 협력뿐이다.
반면에 공작령 내에 거미줄 같은 게이트 설치는 그와 그의 가문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무기와 경제력을 가져다주는 일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록사나가 베푸는 호의는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대로 넙죽 받아도 되는 걸까?’
아스테리온은 상대에게 뭔가를 주거나 혹은 서로 주고받는 것에 익숙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편했다. 지금처럼 부모님을 제외하고 누군가에서 일방적으로 어떤 것이든 받아 본 기억이 전무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다거나 자격지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며 들떴다.
‘챙김을 받는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군.’
아스테리온의 입 양쪽 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자꾸만 하늘로 치솟으려 해서 곤란했다.
‘엄청 기분 좋은 모양이네. 나라도 그럴 거야.’
록사나는 제가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절로 어깨가 절로 으쓱거렸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그녀가 주는 선물을 그냥 냉큼 받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답으로 뭘 주면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나중에 더 고민을 해 보기로 하고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말했다.
“록사나, 챙겨 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흠흠. 별거 아니에요.”
뻐기는 듯한 말투에 그가 피식 웃었다.
“맞아, 앞으로 대륙을 장악하게 될 정령사님께 이제 이런 건 별거 아니지. 발에 챌 정도로 많은 게이트를 소유하게 될 테니까. 혹시 내게 따로 원하거나 바라는 게 있어?”
“없어요. 아! 있어요.”
“뭔데?”
록사나가 순식간에 말을 바꾸자, 아스테리온이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하늘의 별을 따다 달라고 해도 그렇게 해 줄 기세였다.
“다치지 말고 조심히 잘 다녀와요. 내가 바라는 건 지금 당장은 그것뿐이에요.”
오늘 밤 황궁에 잠입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챈 그의 심장은 다시 한번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 * *
어둠을 틈타 황궁으로 숨어든 아스테리온이 리키 경과 사전에 약속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은 황태자 궁에서 조금 떨어진 창고가 있는 곳이었다.
그가 창고 뒤편에 이르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리키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키 경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인사를 받으며 아스테리온이 수신호를 보냈다. 이내 그가 앞장을 서자, 리키 경이 뒤를 따랐다.
아스테리온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전 황태자인 네이든의 놀이 친구였다. 그래서 탐색이사 추적에 뛰어난 리키 경보다도 그가 더 황궁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황족들도 모르는 감춰진 곳까지도.
황태자 궁에 딸린 별채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는 황궁의 병사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침입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통로를 다시 이용하게 되다니……. 정말 오랜만이군.’
아스테리온이 네이든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놀다가 우연히 발견했던 비밀 통로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한동안 그조차도 잊고 있었던 통로는 오랫동안 이용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름칠을 자주 한 것처럼 부드럽게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만약 리키 경이 그와 동행을 하지 않았다면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어쩌면 영원히 그 혼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와, 이런 통로가 있었다니 놀라운데! 대체 공작님은 모르시는 게 뭐야.’
리키 경이 속으로 감탄을 쏟아 냈다. 오늘 밤 임무를 수월하게 마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비밀 통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리키 경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헛웃음을 쳤다.
보통 비밀 통로와 연결된 건물 안쪽의 장소는 서재나 침실, 드레스 룸, 주방의 식품 창고, 혹은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복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눈앞에는, 아니, 발아래로 기다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어느 층 복도의 천장이었다. 복도에는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막 동이 틀 때의 새벽처럼 환했다.
‘반대쪽 출구가 천장이라니!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서 아래로 내려가야겠군. 그나저나 발밑의 아무 쪽이나 들어 올리면 되는 건가?’
리키 경이 고개를 돌려서 아스테리온을 쳐다보자, 그가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아스테리온이 발에 힘을 주며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의 한 부분을 일정한 간격으로 연달아 세 번 꾹꾹 내리눌렀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의 바로 앞에 있는 바닥이 스르륵 열렸다. 두세 사람이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열리는 소리가 워낙 고요해서 혹여라도 누군가 그들의 발아래를 바로 지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들킬 염려가 전혀 없어 보였다.
물론 기감이 극도로 발달하고 단련된 기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스테리온이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리키 경도 바로 따라서 뛰어내렸다.
신경 쓰지도 않고 앞서가는 아스테리온을 보며 리키 경이 불안한 시선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열린 천장은 언제 열렸었냐는 듯 알아서 자동으로 닫혔다.
리키 경의 눈에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고대 때 만들어졌었던 통로인 모양이네!’
아주 오랜 옛날, 까마득한 고대에는 마도 공학이 지금보다 고도로 발달했었다는 이야기가 각종 문헌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리키 경이 걸음을 서둘렀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한 방문 앞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문 앞에는 지키는 자가 없는 대신 굵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한쪽으로 비켜섰다.
리키 경이 곧장 문 앞을 차지했다. 그리고 얇고 긴, 끝에 꽃 장식이 달린 여성용 머리핀을 품에서 꺼내어 자물쇠를 따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리키 경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문 따는 데는 이게 최곱니다. 튼튼한 데다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빨리 따지거든요.”
어떤 수긍의 말도 들려오지 않아 더욱 긴장이 되는 순간, 무척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방 안쪽과 주변의 기척을 살핀 리키 경이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 주었다. 아스테리온이 미끄러지듯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 역시 따라 들어가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에는 창문이 하나도 나 있지 않아서 내부가 무척 캄캄했다. 그러나 신체 능력이 발달한 두 사람에게는 사물의 형상이 쉽게 분간되었다.
두 사람이 곧장 사람 하나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한 성인 남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오늘의 구출 상대를 내려다보는 아스테리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리키 경이 눈짓으로 아스테리온에게 물었다.
깨울까요?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리키 경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스스로 납득했다.
‘아, 그냥 이대로 데려가시려는 모양이시구나.’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주군의 질문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리키, 네 눈에는 어떻게 보이지?”
“네? 그게 무슨 자다가 창문 두드리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자고 있는 남자가 보이는데요.”
아스테리온의 눈짓에 리키 경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성인, 아이?”
“성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은 어른이네요.”
“흠, 그렇단 말이지.”
아스테리온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록사나는 분명 아이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게다가…….
‘내 눈에는 분명 아이로 보이는데, 리키 눈에는 어른이라……. 누가 이런 깜찍한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군.’
리키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 온 주군은 아무 의미 없이 실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행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각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대답 대신 아스테리온이 몸 안의 오러를 풀어냈다. 갑자기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하는 기운에 리키 경이 화들짝 놀랐다.
오러가 비정상적인 기운을 두른 남자의 몸에 가 닿으며 전체를 감쌌다. 맞닿은 오러와 기운이 곧바로 소리 없는 충동을 일으켰다.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이와 거의 동시에 그의 몸이 순식간에 변했다. 상대가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리키 경이 재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건……!”
리키 경은 상대의 몸을 붙잡고 있어서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눈을 비빌 수가 없었다. 대신에 두 눈을 여러 차례 깜박거렸다.
방금 전까지 있던 남자가 사라지고, 제가 제압한 상대는 웬 남자아이였다. 테오도르 황자 또래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