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록사나 앞에서 프레드릭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록사나가 일의 중요도에 따라서 명단을 쓱쓱 작성해 내려갔다. 거기에다가 날짜와 순서를 확실히 명시하며 프레드릭이 어떤 골머리도 앓지 않게끔 만들어 주었다.
그 명단을 고이 가슴에 챙겨 넣은 프레드릭은 남작저 이곳저곳을 대충이라도 둘러보고는 저녁까지 먹고서야 캠든 성으로 넘어갔다.
그가 게이트를 타고 돌아갈 때도 벨루카가 함께했다. 물론 혼자 돌아가도 안전했지만 당분간 처음 오고 가는 사람들이 게이트 이동에 적응할 수 있도록 벨루카가 동행하며 돕기로 했다.
【 그대는 정말……. 】
다음 날에는 마커스 경이 아벨리오 남작저 내 게이트 앞에 섰다.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벨루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꼬리를 위아래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에 따라 사방으로 바람이 일어났다.
마커스 경이 자신의 주군과 록사나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꼭 이래야 합니까?”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거나 어디 이상한 데 떨어지기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경 뜻대로 해도 돼요.”
록사나의 살벌한 경고에 마커스 경의 태산 같은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가 이번에는 슬쩍 아스테리온 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행태를 못마땅해하는 시선만 잔뜩 받았다.
결국 마커스 경은 포기를 선언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록사나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녀가 하네스를 하고 있는 벨루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벨루카.”
- 알았다고. 이 위대한 정령님이 인간을 태워야 하다니, 이건 완전 수치야.
벨루카가 투덜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지금의 몸으로 성장을 한 이후로 벨루카는 록사나를 자신의 등에 직접 태우고 넓은 들판과 산을 달리는 꿈을 여러 번 꾸었었다.
생각만으로도 무척 신났었다. 그런데 시커먼 인간 남자에게 제 첫 등을 내주어야만 한다니 그렇게 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벨루카의 마음을 알았는지 록사나가 도저히 품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은빛 늑대의 목과 등을 다정하게 꼭 끌어안았다.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와야 해.”
- 당연하지! 나만 믿어, 록사나.
기분이 몹시 좋아진 벨루카가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마커스 경을 재촉했다.
- 시간 없다, 마커스. 빨리 타라.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마카스 경이 엉거주춤 벨루카의 등에 올라탔다. 아스테리온이 벨루카의 하네스와 연결된 넓은 끈을 그의 등 뒤로 손수 단단히 둘러 주었다.
그것은 마치 아기가 포대기에 싸인 채 업힌 것 같은 모양새였다. 마커스 경이 벨루카의 등에 타기를 그토록 꺼려 한 이유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캠든 성 게이트가 아닌 레드포드 령과 더 가까운 동굴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 과정 중에 두 지역 간 불안정한 게이트 연결로 인해 혹시라도 둘이 떨어지면서 마커스 경이 미아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안전 조치였기 때문이다.
“출발해.”
아스테리온이 몸을 살짝 두드리자, 벨루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 다녀올게.
“응, 조심히 잘 다녀와. 맛있는 케이크 준비해 놓고 있을게.”
록사나가 손을 흔들며 둘을 배웅했다. 벨루카가 마커스 경을 업은 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게이트도 안정시킬 수 있으면 좋은데 아쉽네요.”
“그대가 방법을 찾아낼 거잖아.”
아스테리온의 위로에 록사나가 피식 웃었다.
“맞아요, 꼭 찾아내고 말 거예요.”
그녀가 처음부터 동굴로 연결된 게이트를 불안전한 상태로 놔두려고 한 건 아니었다.
캠든 성에 설치한 게이트처럼 안전한 게이트로 다시 설치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는 이종족 실험 시설과 연결된 동굴 게이트가 현 상태 그대로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종족 시설 게이트는 지금까지 설치된 다른 쪽 게이트들과는 다르게 무척 예민한 파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을 받아 동굴 쪽 게이트도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동굴 게이트가 남작저와 추가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둘 사이의 게이트 통로 내부가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까닭 잘못하면 안 될 수 있었는데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만약 여기에 손을 더 대게 된다면 이종족 실험 시설과 동굴의 게이트 연결이 아예 끊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정말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두 곳을 다시 연결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될지 여부는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 안에 있는 이종족들의 구출은 점점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두 번째 이유는 동굴 내에 혹은 그 가까운 거리에 제2의 게이트를 설치할 경우 원래 존재했던 1게이트와 2게이트가 서로 충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동굴―남작저의 게이트를 불안정한 현 상태로 두고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록사나와 벨루카가 정령의 힘을 다루고, 게이트를 직접 경험하면서 파장, 즉 기운을 읽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파악해 낼 수 있었던 내용들이었다.
* * *
록사나가 집무실로 돌아왔다. 바늘에 꿰인 실처럼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곁에 함께했다.
“바쁘지 않아요?”
“아무리 바빠도 차 마실 시간은 있어.”
질문을 하기도 전부터 차를 두 잔씩이나 준비하는 그녀를 보며 아스테리온이 피식 웃었다.
이에 록사나가 그를 가볍게 흘겼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저를 보고 보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형태의 커피인 거 같은데?”
그녀가 유리잔 하나를 그의 앞에 놓아 주자, 그 향을 맡은 아스테리온이 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그녀가 방금 전에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떠올려 보았다.
기다랗고 좁은, 연필 두 개를 붙인 넓이 정도의 작은 봉투 같은 것을 뜯더니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을 하나씩 두 개의 유리잔에 쏟았다.
거기에 두세 스푼 정도의 뜨거운 물을 부어서 티스푼으로 내용물을 저어 녹인 후에 찬물을 잔의 3분의 2가 조금 못 되게 부었다.
마지막으로 잔에 얼음을 채워 넣었다.
한 모금 들이켠 아스테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맛까지 보니 분명 틀림없는 커피였다.
“맞아요. 마셔 본 소감이 어때요?”
“아이스 카페라테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라. 우유를 넣었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맛있군. 나름의 매력적인 풍미를 가지고 있어.”
“후후후, 나쁘지 않은 평이라 다행이에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맛이 뛰어나서 분명 잘 팔릴 거야. 무엇보다도 커피를 만드는 방법도 편리하고 준비 시간도 단축되니까 말이야.”
“역시 한 번 보고 다 파악을 해내네요. 이건 일회용 믹스커피예요.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처럼 아이스로 마셔도 되고, 뜨거운 물만 부어서 따뜻하게도 마실 수 있고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무엇보다도 만들기도 쉽고 휴대도 편리하죠.”
믹스커피는 록사나가 제공한 아이디어 중 하나로 최근에 베렛 공국의 오스카 대공자 측에서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얼마 전 그 시제품을 대량으로 보내왔다며 프레드릭이 남작저에 넘어오면서 잔뜩 들고 왔었다.
그 첫 시음을 일부러 아스테리온과 함께 지금에서야 하게 되었다. 미식가인 그의 평가라면 신뢰할 만했다.
“얼마에 팔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시장성이 있어 보여. 그대가 어련히 다 알아서 생각해 둔 바가 있겠지. 타깃 고객층은 평민일 테고 말이야.”
“뭐, 그렇죠.”
앞에서 대놓고 하는 아스테리온의 평가와 칭찬에 절로 민망해진 록사나가 말을 얼버무렸다.
“참, 황궁 쪽 동태는 어때요?”
“튜베 영애가 목격했다는 그 아이는 여전히 황태자 궁에 갇혀 있는 상태야. 경비가 삼엄해서 접근이 쉽지가 않아. 그래서 오늘 밤에 내가 직접 움직여 보려고.”
“당신이요?”
뜻밖의 말에 록사나의 눈이 확 커졌다.
튜베 영애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아스테리온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가 떠올랐다.
이미 그도 이미 리키 경을 통해 황태자 궁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해 왔다.
다만 그 기간에 록사나가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또 그녀가 막 깨어난 시점이었기에 바로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내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한 아이가 그렇게 고통을 받게 되지는 않았겠지.”
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록사나는 그의 입가에 지어진 씁쓸한 미소를 발견하고는 그가 스스로를 원망하며 자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아, 이 사람은 뼛속까지 타고난 귀족이지. 귀족이라면 응당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고, 숨 쉬는 것처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설령 자신과 관련이 없는 아이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이였다.
그녀가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등을 자신의 작은 손으로 덮으며 다독였다.
“맞아요. 당신 말처럼 조금 더 일찍 움직여 손을 썼다면 그 아이가 지금과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는 않았겠죠.”
이내 록사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만약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아니, 조금만 더 일찍 깨어났더라면 아이를 온전한 상태로 더 빨리 구해 낼 수 있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않아! 당신이 모든 걸 대비하거나 통제할 수는 없어. 지금도 충분히 넘치도록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아스테리온이 강한 어조로 그녀의 말에 반박을 했다. 그러자 록사나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다.
“맞아요. 내가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어요. 그건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그 아이가 황궁에서 지금 안 좋은 일을 겪고 있는 건 절대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지금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를 구해 내고 다시는 아프지 않도록 도와주기로 해요.”
아스테리온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같이 충격을 받은 얼굴을 했다.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대는 정말…….”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귀 끝이 꽃물이 든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록사나는 그의 이런 모습을 눈감아 주었다.
한동안 아스테리온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단단히 한몫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위로가 너무 달콤하고 기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록사나는 정말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 미치겠다. 더 욕심이 나서 큰일이야. 역시 나에겐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지.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절대로!’
깊은 후회가 저 밑에서부터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보았더라면, 눈과 귀를 닫고 독불장군처럼 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말과 행동을 더 주의 깊게 살폈더라면, 이혼을 선택하고 지금과 같은 남남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