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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89)화 (189/214)

189화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내 생각에는 그게 가장 안전해요. 호위하기도 수월하고요.”

록사나의 제안에 모니카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일순 먹구름이 끼며 어두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 바로는 어려울 거 같아요. 괜찮으시다면 제게 며칠 정도 시간을 주실 수 있으세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황태자와의 사이도 완전히 끝낸 마당에 무슨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요?”

록사나는 진심으로 모니카가 걱정되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해 줘요.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사이나 다름없잖아요.”

“벨라, 제 동생 벨라를 혼자 두고 오기가 불안해서요. 제가 황태자에게서 벗어나려는 낌새를 아버지가 눈치채신 것 같아요. 아마 이미 끝낸 관계라는 걸 알면 벨라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모니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의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원래는 궁을 나온 날 곧바로 벨라를 제 곁으로 데려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일로 정신이 없다 보니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모니카 자매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록사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니카는 4구역 사업에 대부분의 재산을 투자했고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분간 생활할 돈은 따로 마련해야만 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번 아벨리오 남작저를 다녀간 이후 곧바로 황태자에게 이별을 고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절약한다면 벨라와 단둘이 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돈을 모았다.

모니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태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미 그에게 새로운 정부가 생긴 상황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록사나가 커피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황태자가 영애에게 마련해 준 집은 누구 소유로 되어 있나요? 설령 영애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동생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현재 제가 살고 있는 그 집은 팔거나 세롤 놓을까 해요.”

그녀는 속 시원하게 자신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밝혔다.

“그리고 우선은 평민 지구에 당분간 살 작은 집을 구하고, 나중에 4구역 내 주택이 완공되면 그곳으로 이사하려고요.”

“나쁘지 않은 계획이에요. 하지만 잠시일지라도 평민 지구에 머무는 건 위험해요. 그러니까 오늘 당장 동생분을 데리고 와서 여기에 같이 머무르세요. 향후 거취 문제는 위험이 사라지면 그때 영애가 원하는 대로 하시길 추천해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반색하는 모니카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이에요. 마지막으로 황궁에서 본 아이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내게 전적으로 맡겨요.”

“감사합니다.”

모니카는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을지 모를 그 아이가 내내 마음이 쓰였었다. 성별은 달랐지만 벨라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까닭에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이 문제 역시 잘 해결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 때마침 영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왔나 보네요.”

록사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이글과 아이린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록사나는 모니카에게 그녀의 호위를 담당할 에이글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어서 에이글에게는 그가 맡을 주된 업무와 함께 오늘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지시를 꼼꼼하게 내렸다.

얼마 후 모니카는 이곳에 올 때와는 다르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발걸음으로 에이글과 함께 아벨리오 남작저를 나섰다.

* * *

캠든 성과 수도 아벨리오 남작저의 게이트가 연결되었다. 게이트 설치가 성공했다는 증거로 벨루카가 먼저 게이트를 통해 넘어왔다.

록사나와 짧게 해후한 후에는 캠든 성으로 돌아가 프레드릭을 데리고 다시 남작저로 왔다.

록사나가 프레드릭를 직접 맞이했다. 그는 얼굴이 살짝 해쓱해 보였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프레드릭. 지금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프레드릭은 반갑고 감격에 겨워 속이 안 좋은 것도 잊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울컥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록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영주님, 그동안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게이트를 넘어올 때 조금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었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테리온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차마 둘을 뜯어말리지는 못했다.

록사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프레드릭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게이트 멀미를 하신 모양이에요.”

마차 멀미를 하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 멀미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멀쩡했다.

“네, 그런가 봅니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영주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지금 침대에 더 누워 계셔야 하는 것 아니신지요?”

“프레드릭, 저 어디 안 가니까 하나씩 물어봐요. 그러다 숨넘어가겠어요.”

손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처럼 꼬치꼬치 캐묻는 프레드릭의 행동에 아이린이 풋 하고 웃었다.

“흠흠. 제가 좀 유난을 떨었군요.”

록사나를 놓아준 프레드릭이 민망한 듯 말했다. 그러곤 잠시 잃었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에 록사나가 그를 배려해 화제를 돌렸다.

“영지 소식이랑 성 식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정말 많이 궁금해요.”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아스테리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말리지 않으면 선 채로 계속 이야기를 나눌 기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지?”

“이런! 어서 내 집무실로 가요.”

록사나가 직접 프레드릭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프레드릭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전 상사였던 아스테리온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하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 * *

“감회가 참 새롭습니다. 캠든 성 식구들 중 제가 가장 먼저 게이트를 통해 수도로 올라오는 영광을 누리다니요. 이곳 남작저도 잘 구하신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도 쏙 드는 곳입니다.”

프레드릭이 잠깐 본 남작저의 창밖 풍경과 복도의 모습을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앞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올려 시원한 커피를 음미했다. 그리고 수도 내에 남작저를 구입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서신으로 전후 사정을 모두 전해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역시 많이 다르지!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아벨리오 남작저에 걸맞은 곳이야.’

발전하는 캠든 영지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리온 제국 내에서는 물론 타국으로까지 퍼져 나가며 아벨리오의 이름 역시 드높아져만 갔다.

“나중에 시간 되실 때 마음껏 둘러보세요. 임시로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프레드릭이 캠든 성과 여기 저택을 모두 총괄해야 할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프레드릭은 단출한 남작저를 꾸밀 생각을 하니 신이 절로 났다. 그의 눈가가 부드럽게 접히며 우아한 형태의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 노련미 넘치는 세월의 흐름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캠든 영지 소식을 비롯해 서로 공유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항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지 내 주거 지역이 모두 새롭게 정비되었고, 이미 다들 입주를 해서 새집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 지역이 여전히 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다음 달 정도면 다 마무리가 될 예정입니다.”

게다가 넓고 반듯한 길과 마차 전용 도로가 생기며 이동이 한결 수월해졌다.

눈비가 내려도 길이 질척거리지 않으니 오고 가는 길이 더욱 편한 것은 당연했고, 시간도 단축되면서 영지 내 교류가 무척 활발해졌다.

캠든 성 주방장 니아의 주도하에 콩을 이용한 요리뿐만 아니라,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바탕으로 하는 식문화가 단기간 내에 자리를 잡았다. 계절상 아직 시장에 나오기 전인 식재료들도 추후에 각종 요리로 재탄생될 것이다.

“이종족들이 이주해서 거주할 동굴 내 시설도 70% 정도 진행이 된 상황입니다.”

이쪽은 코델리아와 키얀이 주축이 되어서 진행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일 말고도 그 전에 이미 각자 맡은 다른 업무가 있었지만, 이종족에 대해서만큼은 그들만 한 적임자가 따로 없었다.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다행이에요.”

록사나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로웰 후작저에서 구출해 낸 이종족들과 앞으로 실험 시설에서 구해 낼 이종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킬 날이 머지않았기에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캠든 상단이야 록사나와 잭이 주도적으로 맡고 있었으므로 프레드릭이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었다.

다만 베렛 공국에 다녀온 사람이 프레드릭이었기에 커피 유통과 종이 개발에는 한 발씩 걸치고 관여를 하고 있었다.

“종이 개발은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조만간 최종 결과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무척 기대가 되네요.”

반가운 소식에 록사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금화가 차르륵차르륵 산처럼 가득 쌓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중에 기드온 경을 불러서 따로 보고를 받기는 하겠지만 요즘 기사단과 경비대 상황이나 영지 치안은 어때요?”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기사단과 경비대의 실력이나 상황이 전보다 확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인원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만큼 영지 치안도 안정되어서 영지 중심지는 사람들이 늦은 밤에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정도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네요. 아, 말이 나온 김에 면담자 명단과 순서를 지금 작성해야겠어요.”

“여기 있습니다.”

록사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린이 그녀의 펜과 종이를 앞에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혼자 여기 올 때 다들 어찌나 눈총을 주던지, 이 늙은이가 그 눈살에 하마터면 이 세상을 하직할 뻔했지 뭡니까.”

프레드릭이 너스레를 떨면서 수도 저택 방문자의 명단 작성을 더없이 반겼다.

록사나가 첫 방문자로 그를 콕 집어 서신을 통해 지명했을 때 가장 큰 불만을 품은 이는 단연코 키얀이었다.

‘키얀 그놈은, 내가 저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저보다 내가 먼저 영주님을 뵙는다고 어찌 내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것이 내 뜻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으면서 말이야.’

저를 오만불손하고 배은망덕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던 키얀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지금은 이미 다 지난 일이 되었지만, 프레드릭은 속마음으로나마 ‘경’으로 예의를 갖춰 불러 주었던 호칭을 과감히 생략했다. 소심한 복수였다.

‘이 명단만 있으면 키얀이랑 다른 사람들이 다시는 뭐라고 자신을 닦달하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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