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프레드릭이 다 읽은 편지를 로사 경에게 건넸다. 그러자 키얀이 로사 경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두 사람은 같이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마주 보며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동의합니다. 요즘에는 이 늙은이가 오래 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사 경의 말에 프레드릭의 주름진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전직 카일라니 정보부 소속 비밀 요원이었던 그는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겨 왔다.
개중에는 정말로 삶의 끈을 놓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심한 부상을 입은 적도 더러 있었다.
록사나가 오기 전부터 그가 캠든 영지의 집사를 맡게 된 것도 그때의 여파로 더 이상 현장에서 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운명이겠지. 내가 캠든 성으로 오게 되고, 여태까지 살아 있는 건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보라고 신이 안배하신 건지도 모르겠군.’
점점 이상적인 곳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캠든 영지와 록사나가 서신에 적어 보낸 일을 떠올리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키얀이 상기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프레드릭과 로사 경을 향해 말했다.
“어서 빨리 시작해요!”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뭔가를 잔뜩 조르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실제로 키얀은 열네 살의 어린아이가 맞았다.
수인족의 특성상 육체적 성장이 빠르다 보니 인간들과는 다른 성장 속도를 보였고,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성인의 몸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키얀이 몸이 달았네요.”
“허허허, 그러니 당장 서둘러야겠습니다.”
그들은 록사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서둘러 식당을 나섰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앞장을 섰다.
거의 뛰다시피 분주하게 놀리는 세 사람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벨루카는 정령석이 든 가방을 다시 등에 메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벨루카가 캠든 성에 가 있던 그 시각, 록사나는 예정에 없던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누가 왔다고?”
“모니카 튜베 영애요.”
아이린의 대답에 록사나가 두 눈을 몇 번이나 깜박거렸다. 자신이 쓰러졌었던 이야기는 극비였고, 현재 사교계에서는 그녀의 몸이 안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병문안을 오겠다는 사람들을 지금까지도 다 거절하고 있는 상황인데 깨어난 지 이틀도 되지 않아 튜베 영애가 방문하다니. 마치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고 온 것 같은 형국이었다.
“병문안을 받고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는데도 꼭 직접 뵈어야겠다며 돌아가지 않고 계세요. 중요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으시대요.”
“그래? 그럼 일단 만나 볼게. 응접실로 모셔.”
“네.”
아이린이 집무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하녀에게 지시를 내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그대로 가실 건가요?”
“응. 병자로 소문났는데 너무 차려입고 내려가면 거짓말했다고 생각할 거야.”
“실제로 반병자시죠. 아직 몸이 다 회복되시지 않았잖아요.”
아이린이 록사나를 부축해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응접실에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튜베 영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록사나가 아이린의 도움을 받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일상적인 활동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지금은 약간의 눈속임이 필요했다.
잔뜩 야윈 얼굴과 몸을 한 튜베 영애를 보며 록사나가 먼저 입을 떼었다.
“오랜만이에요, 튜베 영애. 우선은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많은 아프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몸은 좀 어떠신가요?”
모니카가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록사나에게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건넸다.
“보다시피 거동이 불편해요.”
“아직도 몸이 많이 편찮으신데 만나 달라고 억지를 부려서 너무 죄송해요.”
모니카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가식이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영애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네요.”
“네…….”
록사나의 지적에 모니카가 목을 움츠렸다.
오늘 그녀가 저를 만나려는 이유가 초췌해 보이는 모습과 관련되어 있으리란 생각이 록사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실례를 무릅쓰고 저를 만나고자 하신 건 그만큼 제게 꼭 알려야 할 것이 있으셨던 거겠죠. 그렇지 않나요?”
“네, 맞아요.”
록사나의 뒤에 서 있는 아이린 쪽을 힐끔거리며 모니카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주저주저했다.
록사나가 아이린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아이린이 눈치껏 핑계를 대었다.
“이런, 손님이 오셨는데 차를 내오지 않았네요. 나가서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날씨가 더우니까 냉차를 준비할까 하는데, 두 분 괜찮으세요?”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해.”
“저도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귀한 얼음을 준비해야 하니 아이린이 돌아오는 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아이린이 응접실을 나가자, 잠시 시간 차를 두고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요?”
자신의 보좌관인 아이린은 믿을 만한 측근이니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니카가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니카가 주먹 쥔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고서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제가 본 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남작님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모니카의 목소리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거렸고, 양손은 가늘게 떨렸다.
록사나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뜬 모니카가 말했다.
“일주일 전쯤에 입궁했다가 황태자 궁에서 이상한 걸 봤어요. 그날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분명 아이였는데 몇 시간 뒤에 갑자기, 갑자기……!”
모니카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녀가 본 것은 누구도 믿지 못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황태자와 연을 끊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갔어요. 집으로 돌아가려고 새벽에 방 밖으로 나왔는데, 누군가 아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어요.”
록사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모니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록사나는 말하는 걸 힘들어하는 모니카를 대신해서 그녀가 할 다음 말을 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가 아이가 어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거군요. 내 말이 맞아요?”
“맞아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모니카의 두 눈이 대번에 확 커졌다. 놀람과 두려움이 얼굴에 가득 차오르더니 어느 순간 후회의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둠처럼 스며들었다.
록사나가 손을 뻗어 모니카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모니카는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몸을 움찔 떨어 댔다.
“혹 영애가 그 광경을 본 걸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았나요? 만약 본 사람이 있다면 영애의 신변이 몹시 위험해요.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예요.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영애 곁에 비밀 호위를 붙여 줄 거예요.”
모니카는 마주 본 따스한 에메랄드빛 두 눈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녀의 떨림이 서서히 멈추면서 몸에서 힘이 빠졌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분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계셔.’
방금 전 순간적으로 자신이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깊은 후회를 했었다.
그렇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린 채 횡설수설하는 제 말을 듣고는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을 단번에 짚어 냈으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목격한 일과 관련된 자라고,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이번에는 모니카가 손에 힘을 꼭 주며 록사나의 양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말 제 말을 믿으시는군요.”
“믿어요. 왜냐하면 우리 저택에도 그 피해자가 한 명 있거든요.”
모니카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록사나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고 눈물을 닦아 내는 것을 지켜보며 다시 물었다.
“영애가 거기에 있었을 때 아이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요?”
“네, 황태자랑 그의 측근 시종이 있었어요. 제가 나올 때 웬일로 일찍 자리를 떴나 싶었는데 그곳에 있더라고요.”
당시 상황을 떠올린 모니카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애가 그 장면을 봤다는 걸 그 두 사람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킨 거 같아요?”
“아니요.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남작님이 처음이고요.”
모니카가 확신에 차서 고개를 세게 가로저었다.
“몇 날 며칠 동안 혼자 속앓이를 많이 했겠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흑흑, 감사해요.”
등을 다독여 주자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충격적인 그 일을 겪은 날부터 도저히 제대로 잠을 자거나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여기저기에 떠들어 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심적·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털어놓을 곳이 없어 고민만 깊어져 갔었다.
계속 이러다는 말라 죽겠다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이 떠올랐다.
그녀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어쩌면, 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비로소 모니카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으며 잊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록사나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로웰 후작과 황태자가 감추고 있는 그들의 추악한 면모를 모니카가 알게 된다면 그녀가 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역시 만만치 않게 그녀를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었기에 진실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아이린이 커피를 내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각자의 앞에 놓이자마자 록사나와 모니카를 그것을 쭉 들이켰다.
“두 분 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가 배앓이하시면 어떻게 해요.”
“후아, 시원해서 살겠다.”
록사나가 유리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용물이 3분의 1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모니카도 조금 뒤늦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잔은 바닥을 거의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마신 아메리카노에는 설탕 한 조각 들어가지 않았었지만 그렇게 꿀물처럼 달 수가 없었다.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천천히 드세요.”
아이린이 튜베 영애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모니카는 아이린의 잔소리(?)마저 달콤하다는 생각을 하며 방긋 웃었다.
“아이린, 지금 바로 에이글 좀 불러와 줄래?”
“네, 금방 다녀올게요.”
아이린이 에이글을 불러올 동안 록사나는 모니카와 함께 그녀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