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오잉?! 키얀, 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어?
“그래,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러니까 옆에서 너무 크게 말하지 마, 귀 아파.”
키얀 자신도 어쩌다가 제가 정령인 벨루카의 말을 갑자기 알아듣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그냥 방금 전부터 저절로 들렸다. 당장 짐작되는 거라곤 한 가지뿐이었다.
‘최근 실력이 늘어서 그런가?’
좀 전의 키얀의 말을 새까맣게 지운 벨루카가 입을 쫙 벌렸다.
- 으하하하하~, 키얀이 내 말 알아듣는다. 진짜 신난다!
벨루카가 춤추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거대한 몸을 뱅글뱅글 돌려 댔다. 그 덕분에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먼지 나니까 그만해. 그리고 정신 사나워.”
- 그래.
키얀의 지적을 흔쾌히 수긍한 벨루카가 부산스럽게 굴던 움직임을 즉각 멈추었다.
키얀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벨루카 뒤에서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기사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마침 내가 저택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벨루카의 별것 아닌 것 같은 행동에도 몇 명 정도는 부상을 당하고 성내 시설은 여기저기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갑자기 모습이 바뀌어 다들 벨루카가 강아지같이 그 조그맣던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다.
한편 얼음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이 여러 차례 낮게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울음에 하나둘씩 제정신을 차렸다.
키얀이 늑대를 벨루카라고 부른 것을 본 그들의 얼굴에는 깨달음과 경악이 잔뜩 서렸다.
“뭐라고? 저 늑대가 벨루카 님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분명 거짓말일 거야!”
“그 귀엽던 벨루카 님이 어떻게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변할 수가 있어?!”
그때 키얀의 몇 발 뒤에 서 있던 프레드릭이 앞으로 나섰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과 비상사태라는 이 사달이 난 이유를 파악한 상태였다.
‘오늘 키얀 덕분에 벨루카 님께 깔려서 세상을 하직하는 신세는 면했군.’
프레드릭이 눈빛으로 키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키얀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화답했다.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을 닦아 내며 프레드릭이 입을 열었다.
“벨루카 님이셨군요. 너무 늠름하게 성장하셔서 제가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자신을 몰라본 것에 대해서 벨루카가 서운해할까 봐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프레드릭은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살짝 숙여 사과했다.
- 오랜만이야, 프레드릭 할아범.
벨루카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키얀을 주둥이로 쓱 밀어내서 치우고는 프레드릭의 앞에 제 고개를 한껏 들이밀었다. 더욱 늠름해 보이도록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로.
그때였다. 영지 시찰을 나간 기드온 경을 대신해 로사 경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의 근처에 당도했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외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캠든 성을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얼어붙었던 공기가 일시에 사라지고, 한층 분위기가 누그러졌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드릭, 모두 괜찮은 겁니까?”
“네, 로사 경. 벨루카 님께서 저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허허허.”
“벨루카 님?”
- 로사 경, 보고 싶었어.
벨루카가 몸을 돌려 넋이 나간 얼굴을 한 로사 경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대고 마구 비볐다.
덩치 큰 강아지 같은 행동에 로사 경이 반사적으로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려 벨루카를 쓰다듬어 주었다.
- 로사 경 좋아. 역시 남자 인간들은 환영해 주는 법을 잘 모르는 거 같아.
프레드릭과 로사 경이 동시에 키얀을 바라보았다. 자신들 중에서 그가 가장 벨루카의 말을 잘 알아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벨루카의 말을 그대로 통역하기에는 좋지 않다는 판단이 든 키얀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캠든 성에 돌아와서 좋대요.”
다행스럽게도 벨루카는 키얀의 대꾸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로사 경에게 실컷 예쁨을 받은 후에야 벨루카가 마지못해서 몸을 돌려세웠다.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키얀은 고개를 한껏 빼고 성문 쪽을 연신 바라보았다. 혹시나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이 짜잔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키얀의 눈에서 한순간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가 기대감이 슬슬 고개를 내밀었다.
“벨루카, 록사나 님은 어디쯤 오고 계셔?”
- 나 혼자 왔는데!
“뭐라고?! 너 혼자 왔다고? 대체 왜?”
대번에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그건! 아, 나 배고프다. 먼저 밥부터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본 벨루카가 화제를 돌리며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본인은 사리 분별이 분명한 정령이었다.
거대해진 몸으로 성장해서 나타난 벨루카를 본 사람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사실에 옆 사람과 수군수군하며 연신 놀라움을 표출했다.
“별일 아니었으니 이제 그만 그대들 자리로 돌아가서 원래 하던 일들 이어서 계속하게.”
프레드릭이 고용인들을 해산시켰다. 로사 경 역시 수하들을 즉시 돌려보내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키얀과 함께 벨루카의 뒤를 따라갔다.
결론은 별일 아닌 아군의 소행(?)이었다지만, 어쨌든 캠든 성의 보안이 뚫린 일이었다.
게다가 부재중인 기드온 경을 대신해 현재 성의 경비를 총괄하고 있었기에 작은 소란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이와는 별개로 로사 경은 아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을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키얀, 너 혹시 벨루카 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네, 맞아요.”
혹시나 하고 물었던 로사 경이 깜짝 놀랐다. 그건 프레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벨루카가 성장을 하면서 록사나가 가장 먼저 벨루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뒤로 정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아스테리온뿐이었고, 키얀은 자신들과 같았다.
“정말입니까, 키얀 경? 대체 언제부터 가능해지신 겁니까? 혹시 오늘부터입니까?”
“집사님 짐작이 맞아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요즘 제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게다가 전 이종족이잖아요.”
자신이 기사가 된 이후부터 존칭을 써 주기 시작한 프레드릭을 바라보며 키얀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잘된 일입니다.”
“그러게요. 이제 벨루카 님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겠네요, 키얀 덕분에.”
프레드릭과 로사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두 사람은, 아니, 세 사람은 벨루카가 혼자서 캠든 성에 온 이유에 대해 빨리 듣고 싶었다.
앞장서 가는 벨루카의 사뿐거리는 발걸음은 집무실이나 회의실이 아닌 식당으로 곧장 향했다.
어쩔 수 없이 세 사람도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벨루카의 귀환 소식을 들은 니아와 주방 식구들이 벌 떼처럼 달려 나왔다. 그들은 벨루카에게 열렬한 환영의 인사를 건네고는 정령을 위한 보다 특별한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빠져나갔다.
때마침 점심 식사를 준비 중이었고, 비상사태가 발동되어 잠깐 멈추기는 했었지만 식탁에 음식이 오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벨루카의 몸집이 워낙 커졌기에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몇십 명이 먹어도 될 정도로 넉넉한 양이었다.
벨루카는 서둘러 있는 힘껏 먼 거리를 달려왔던지라 무척 허기가 진 상태였다. 앉은 자리에서 말없이 음식만 폭풍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제나 벨루카의 입이 열리기를 오매불망 바라던 세 사람은 배가 다 차기 전에는 절대 그 입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덩달아 이른 점심을 들게 되었다.
후식으로 딸기 케이크와 블루베리 케이크를 연달아 해치운 벨루카가 만족스런 얼굴로 드디어 식탁에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가 바짝 탄 키얀은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벨루카, 왜 록사나 님은 같이 못 오신 거야?”
프레드릭과 로사 경이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만약 나쁜 소식이었다면 자신들이 묻기도 전에 벨루카가 먼저 뭔가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좋은 소식임이 틀림없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초조해하는 키얀과는 달리 두 사람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어렸다.
그들은 록사나가 깨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을 그 당일 날인 그제, 그것도 수도에서 캠든 성까지 단 몇 시간 만에 전해 들었다.
두 곳의 어마어마한 거리 차이를 생각한다면 당일에 소식을 접한다는 것은 고대 대마법사 할아버지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페어리 레이크 인근 동굴에 게이트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설치되면서 그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벨루카가 그 게이트를 통해 수시로 양쪽을 오고 가면서 소식을 전했고, 동굴 근처에 상주하며 그곳을 관리하는 기사들이 전서구를 보내옴으로써 정보 전달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진 것이다.
게다가 기쁜 소식을 전한 지 이틀 만에 벨루카가 지금 캠든 성에 와 있다는 건 게이트를 통해 넘어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벨루카가 올 수 있다면 록사나 님도 오실 수 있는 거 아닌가?’
키얀은 그녀가 당분간 요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하루빨리 보고 싶다는 마음에 그리움만 몽글몽글 솟아났다.
- 록사나는 지금 엄청 바빠. 그래서 못 왔어.
“바쁘다고?! 일어난 지 얼마나 되셨다고!”
마치 벨루카가 일을 시킨 당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키얀의 두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그녀가 못 왔다는 사실보다 무리하고 있다는 말이 이제는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반면에 프레드릭과 로사 경의 반응은 평이했다.
“허허허, 여전하신가 보군요.”
“일을 시작하실 정도라면 다행히 건강이 괜찮으신가 봐요.”
로사 경이 잔뜩 흥분한 키얀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달랬다. 프레드릭은 장성한 손자를 보는 듯 벨루카를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벨루카 님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오신 것이겠지요?”
- 맞아. 프레드릭 할아범은 귀신이라니까.
벨루카가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등에 멘 가방끈을 입으로 물어 풀어내더니 그 가방을 세 사람 앞에 척 내려놓았다.
- 열어 봐. 거기에 록사나가 쓴 서신이 있어.
“가방 안에 록사나 님 서신이 있대요.”
“그럼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키얀이 벨루카의 말을 전해 주자, 프레드릭이 손을 뻗어 가방에서 서신을 꺼내 봉투를 열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프레드릭의 표정에 놀라움이 깃들며 입에서는 경탄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이것 참! 놀랍군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는지…….”
“프레드릭, 대체 뭐라고 써 있길래 그러세요?”
셋 중 가장 인내심이 있는 편인 로사 경이 이번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질문을 했다.
“직접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