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먼저 록사나의 몸에서 빼낸 이질적인 기운을 옮겨 담은 검은 정령석과 정령의 힘을 불어 넣은 새로운 녹색 정령석들을 당장 사용할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작저 보물 창고로 옮겼다.
워낙 그 양이 많아 수십 개의 상자가 가주의 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다음으로는 정령석 씨앗을 옮겨 오기 위해 가주의 방에 설치했던 게이트를 집무실 맞은편 넓은 방으로 옮겨 재설치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추후 대량의 물건 운송과 마차까지 오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게이트 규모를 키우고, 전용 건물을 지어 보안을 강화할 예정이었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벨루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게이트의 재설치가 완료된 방에 모였다.
캠든 영지의 동굴과 수도 남작저를 잇는 게이트가 재설치되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봤던 아스테리온이 감탄을 쏟아 냈다.
“정령석만 옮기면 된다니 신기하군.”
“파장으로 연결되는 거라서 그래요. 그렇다고 아무 데로나 옮겨서 다시 설치한다고 게이트가 작동되는 건 아니에요.”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이 파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덩달아 반듯한 그의 금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지?”
“게이트에 사용되는 정령석은 주변에 자리한 자연의 기운과 공명을 해요. 그래서 게이트가 처음 설치된 곳에서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나서 재설치를 하게 되면 원래 맞춰진 파장이 틀어지면서 공명이 깨지게 돼요. 그러면서 제구실을 못 하게 되거든요.”
“놀랍군. 그렇다면 잘못된 게이트를 이용하게 되면 원래의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떨어진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에요. 보통 잘못된 게이트는 작동 자체가 아예 되지 않아요.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도 한번 깨진 파장은 복구되지 않아서 무용지물이 되고요.”
“아까운 정령석만 버리는 셈이군.”
“맞아요.”
사실 복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최상급 정령사라면 한번 파장이 깨진 정령석을 복구시킬 수 있지.’
록사나는 현재 최상급의 실력에 근접하긴 했지만 아직은 복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지만 이 사실을 지금 당장 다 밝힐 필요는 없어.’
나중에 정령석을 풀고, 리온 제국 곳곳에 게이트를 설치했을 때 혹여라도 이 사실을 적들이 알게 된다면 악용될 소지가 있었다.
즉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게이트를 파괴하고 사용 불능이 된 정령석들을 일부러 모아서 어떻게든 활용하려 들 것이다.
검은 약과 흙색 약을 만들 때 정령의 힘을 사용한 것처럼 말이다.
‘정상적인 정령석을 구할 수 없을 테니까.’
그녀는 게이트 설치를 위한 정령석을 시장에 풀 때 적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물량을 조절하고 통제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정령의 힘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궁금한 점이 여전히 많았다.
그의 질문이 계속 이어졌고, 록사나의 상념이 이내 깨졌다.
“게이트를 재설치할 수 있는 일정 거리라는 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지?”
“정령석이 가진 힘에 비례해요. 품고 있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처음 설치되었던 자리에서 이동 설치할 수 있는 거리가 그만큼 더 길어져요.”
“그러면 여기에 사용된 정령석은 어느 정도야? 이 저택 내에서만 이동이 가능한 건가?”
“맞아요. 이 게이트 설치에 사용된 정령석은 남작저 안에서만이라면 어디든 이동시켜서 재설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담고 있어요.”
이번 게이트는 처음 설치되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전에는 대충 정령석을 쌓아서 문의 형태를 만들었다면, 지금은 방의 중앙에 사람 여럿이 옆으로 나란히 서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나무 기둥이 높게 세워진 형태였다.
게이트에는 녹색 정령석과 검은 정령석 한 쌍이 필요했고, 왼쪽 기둥에는 어른 팔뚝만 한 검은 정령석이, 오른쪽 기둥에는 녹색 정령석이 나무 기둥에 박혀 있었다.
게이트를 작동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정면을 향해 있는 녹색 정령석의 방향을 바꾸어 검은 정령석과 마주 보게 하면 두 정령석이 공명하면서 안쪽 빈 공간에 빛으로 이루어진 실제 게이트가 형성되는 방식이었다.
“작동되는지 실험해 볼까요?”
마커스 경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록사나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아스테리온을 올려다보았다. 직접 작동시켜 보겠냐는 그녀의 눈빛을 읽어 낸 그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이에 록사나가 고개를 돌려 마커스 경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그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대표로 마커스 경이 한번 작동시켜 보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신이 난 마커스 경이 녹색 정령석에 바로 손을 대었고, 다른 사람들은 한숨을 삼키며 못내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파악!
잠시 후, 밝은 빛을 뿜어내며 게이트가 작동되었다.
“우와!”
“멋집니다.”
다들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박수를 치면서 연신 감탄사를 쏟아 내었다.
그러더니 너도나도 게이트 주변을 한 바퀴씩 혹은 몇 바퀴씩 돌면서 나무 기둥을 쓰다듬었다.
더러는 뿜어져 나오는 빛에 살짝 손을 가져갔다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뒤로 물렸다.
혹시라도 곧바로 게이트 너머로 빨려 들어갈까 봐서 겁이 났던 것이다.
그 모습을 말없이 조용히 지켜보며 록사나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급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많이 어설퍼 보이네. 이다음에 후원으로 옮길 때는 게이트 틀을 아예 석재로 해야겠어. 더 멋있게!’
옮긴 게이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걸 확인한 사람들이 차츰 흥분을 가라앉혔다.
트레버가 살짝 내려간 안경을 추켜올렸다.
“정령석이라는 건 정말 대단하군요. 사람들이 이 정령석과 게이트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여기저기서 난리가 날 겁니다.”
“앞으로 세상의 판도가 뒤바뀌겠지.”
아스테리온이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오늘부로 리온 제국의 역사는 게이트 시대의 전과 후로 나뉠 겁니다.”
록사나가 자신들의 편인 것에 대해 속으로 감사하며 트레버가 말했다.
두 사람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이며 공감했다.
새로운 이동 수단의 등장은 혁신 그 자체였다. 앞으로 이 게이트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위대한 정령사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혼녀라고 무수히 손가락질받은 일개 남작의 집에서 말이다.
* * *
록사나의 특명을 받은 벨루카가 녹색 정령석과 검은색 정령석 두 쌍, 서신이 담긴 가방을 메고는 캠든 영지 내에 있는 동굴 게이트로 넘어갔다.
벨루카는 곧장 동굴을 나와 캠든 성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캠든 성에 복귀하는 것이 무척이나 신이 났던 모양이었다. 은신술을 펼치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산과 들, 거리를 내달렸다.
“까악!! 늑,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
“엄마야, 나 살려!”
“악! 이게 뭐야! 경, 경비대!!”
벨루카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비명과 경악이 난무했다. 성체인 말과 크기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커다란 늑대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누군들 놀라지 않으랴.
다들 혼비백산하며 이제는 저 짐승에게 물어뜯겨 죽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천만다행히도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멀어져 갔다.
그날부터 캠든 영지 내에서는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이면 거대한 늑대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특히 벨루카가 지나간 길목일수록 그 정도가 더 심했고, 경비대에는 목격담과 신고가 빗발쳤다. 이러한 행태는 멈추지 않고 한동안 지속되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고, 자신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꿈에도 모르는 벨루카는 드디어 목적지를 코앞에 두게 되었다.
성문이 보이자, 경비병과 기사들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창과 검을 곧장 빼 들었다.
- 인간들아, 안녕^^ 오랜만이야.
갑작스런 늑대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오금이 저린 몇몇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면서도 치켜든 창과 검을 잡은 손의 힘은 굳건했다.
햇빛에 반사되는 금속 무기들을 보며 벨루카는 그들에게 반갑다고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런데 성문이 열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고민 한 번도 없이 성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드디어 성안에 발을 들인 벨루카가 중앙에 자리한 가장 큰 건물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당연히 뒤편 성문에서는 난리가 났다. 난데없이 성을 침범한 은빛 늑대를 잡기 위해 비상 신호 종소리가 성안에 울려 퍼졌고, 그렇게 모든 병력이 비상사태에 돌입하며 긴급 소집되었다.
비상 신호는 저택 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각자 맡은 바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어린아이들과 노약자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고,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손에 쥐어 들었다.
때마침 저택 내부에 있던 집사 프레드릭이 고용인들을 진두지휘했고, 그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프레드릭이 발걸음을 서둘러 저택 1층 홀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따라 힘깨나 쓰는 고용인들이 따랐다.
프레드릭이 저택 밖으로 막 나왔을 때였다. 때마침 벨루카 역시 저택 앞에 당도했다.
- 인간들아~, 집사 할아범~, 이 벨루카 님이 돌아오셨다!! 우헤헤헤~!
쩌렁쩌렁한 포효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힘껏 뛰어오른 늑대가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프레드릭에게로 달려들었다.
사람들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고, 그들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덩어리가 아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한겨울에 눈사태가 덮치는 듯한 압박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어어어어어?!”
“집, 집사님, 위험합니다!!”
“맙소사! 안 돼~!!”
사람들이 대응할 틈도 없이 늑대가 프레드릭을 덮치기 직전, 둘 사이로 한 남자가 파고들었다.
- 프레드릭 할아범~!!
턱.
- 으잉?
남자가 자신의 온몸으로 벨루카를 받아 내며 힘껏 저지했다. 상대가 어찌나 세게 달려들었는지 맞닿은 충격으로 땅을 딛고 선 남자의 두 발 아래가 움푹 패었다.
벨루카의 시선이 록사나와 닮은 검은 머리에 가닿았다가 이내 둘의 눈이 가까이에서 마주쳤다.
“벨루카, 그렇게 막 달려들면 어떡해. 프레드릭을 깔아 죽이고 싶어?”
철없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듯 푸른 눈이 한심스럽게 벨루카를 바라보았다.
- 나 힘 조절 무지 잘해, 키얀.
당당한 표정을 보니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어떤 사태가 벌어진 것인지 모르는 듯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네가 생각하는 힘 조절과 인간들이 견딜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다를 것 같은데.”
갑자기 벨루카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