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더 이상의 말이 없자 록사나는 자신의 심장이 자꾸 쿵쾅쿵쾅 뛰어 대는 것을 느꼈다. 너무 크게 들려서 귀 바로 옆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공작령에 게이트를 설치할 수 없다고 반대를 할까 봐 무척 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게이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게이트를 설치했을 때의 장단점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게이트를 통해 이동 시간이 단축된다는 이점과 함께 반대로 앙심을 품은 누군가 혹은 적대 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을 빠르게 허용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양날의 검이 되는 것이다.
아스테리온이 이 점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는 한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으로서 영지민과 공작령에 미칠 이해득실을 철저하게 따지는 사람이었고, 거래 상대가 가까울수록 더욱 그러했다.
록사나는 자신에게 한층 유해진 아스테리온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침착함을 가장한 채 애써 초조함을 깊숙이 내리눌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언제쯤 설치할 수 있지?”
“…네, 뭐라고요?”
록사나가 벙찐 얼굴을 하며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알렉과 아이린도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아스테리온을 쳐다보았다.
“공작령에 게이트를 언제쯤 설치할 예정인지 물었어.”
아스테리온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친절하게도 다시 말해 주었다.
그는 록사나의 얼빠진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혹들이 있다는 사실에 내심 아쉬워했다.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요.”
록사나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무심결에 답했다.
그녀 혼자서 생각만 했을 뿐이지 아직 세세한 계획까지 세운 것은 아니었기에 게이트를 설치하는 시기 역시 당연히 정해진 바가 없었다.
록사나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날짜는 당신하고 상의해서 해야죠.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고개를 휘휘 내저은 후 정신을 가다듬고는 원래 아스테리온이 했어야 할 물음을 던졌다.
“공작령에 게이트를 설치해도 괜찮아요? 왜 설치하려고 하는지는 안 물어봐요?”
“그런 거 물어봐야 해?”
아스테리온의 입가가 슬쩍 풀어졌다. 사실 그의 마음은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조금 전 자신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한 록사나의 달콤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그의 귓가와 심장 언저리에 연신 맴돌았다.
게이트 설치 여부와 그 이유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록사나가 대번에 호통을 쳤다.
“당연히 물어봐야죠! 당신은 한 영지를 책임지는 영주고,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요!”
그녀가 열변을 토하며 게이트를 설치했을 때의 장점과 단점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특히 장점보다 단점을 더 부각시켰다. 희한하게도.
‘잔소리도 참 예쁘게 하는군.’
아스테리온은 바가지 긁히는 남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실컷 만끽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맛을 늦게 맛보게 된 것이 어찌나 억울한지 몰랐다.
이때 대화의 중심에 놓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아이린과 알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록사나는 남의 영지를 걱정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고, 정작 영지의 주인인 아스테리온은 태평한 표정으로 진귀한 예술품을 마주한 듯 록사나를 감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열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스테리온이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먼저 나가떨어지는 것은 록사나였다.
“나 할 만큼 했어요. 앞으로 잘못돼도 몰라요.”
록사나가 지쳐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그녀 앞에 아스테리온이 직접 새로 내린 차를 한 잔 놓아 주었다.
“목 좀 축여.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고마워요.”
약 올리는 것처럼 그의 하는 행동이 은근히 얄밉기는 했지만 록사나는 마침 목이 말랐던지라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호로록.
아스테리온도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왕이면 공작 성 안에 설치하는 것이 좋겠어.”
“제 입장에서는 그러면 더 좋죠.”
게이트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질문을 하지 않는 그에 대해 설득하기를 포기한 록사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치 후 게이트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그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
록사나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렌시아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알아내려고요. 제가 직접 몸을 살펴보고 약의 연구 결과를 봤을 때 흙색 약에는 분명 정령의 힘이 섞여 있어요.”
그녀는 자신과 알렉이 파악한 바를 아스테리온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렌시아 한 명으로 끝난다는 보장이 없으니 약을 해독하거나 원래대로 몸을 되돌리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지.”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어디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정체불명의 흙색 약으로 인해 육체적 변화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렌시아 외에 없더라도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니 해결책을 찾아 미리미리 대비해 놓는 것이 좋았다.
이어서 록사나가 카일라니 공작 성에 게이트를 설치하려는 이유와 용건을 밝혔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현재로서는 정령의 힘과 관련된 자료나 실마리를 지혜의 방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빠른 시간 안에 공작 성에 다녀와야 해서 게이트 설치를 떠올린 거고요.”
그녀는 원래 카일라니 공작 성보다 캠든 성에 게이트를 가장 먼저 설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군.”
“알렉과 함께 지혜의 방에 직접 들어가서 실마리를 찾고 싶어요. 저도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래요?”
“얼마든지 마음껏 이용하도록 해.”
기대감이 어린 눈빛에 기꺼운 승낙이 뒤따랐다.
“제가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어느 정도예요?”
“다 알면서 묻는군. 당연히 평생이지.”
“고마워요. 꼭 방법을 찾아서 보답할게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것을 하나하나 굳이 따져야만 하는 사이냐는 마음을 담아 아스테리온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는 대비되게 록사나가 활짝 웃었다.
그가 제게 아무리 마음이 있다지만 이혼한 전 부인에게 가문의 비고를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은 가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수도에서 출발해서 가는 것보다는 캠든 영지에서 공작 성으로 가는 게 더 빠르지. 그럼 게이트를 이용해 동굴로 갔다가 카일라니 공작 성으로 넘어가서 게이트를 설치하면 되겠군.”
“맞아요. 그런데 캠든 성과 공작 성 두 군데에 게이트 설치를 동시에 진행할 거예요.”
“그대 마음대로 해.”
아스테리온에게 어느 쪽에 게이트가 먼저 설치되는지 여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그답지 않게 아스테리온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제발 그녀가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뭔데요?”
“그 게이트 말이야. 수도 카일라니 공작저랑 여기 남작저를 연결하는 게이트도 설치해 주면 안 될까?”
“왜요?”
그녀의 의문은 타당했다. 두 가문의 저택은 대문에서 대문까지 마차로 십여 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로 무척이나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 록사나는 모르지만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다 지급하지 못한 위자료 명목으로 이 저택을 건넨 이유에는 가까운 거리가 한몫 단단히 했다.
아스테리온은 오랜만에 자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가 두 저택 간 게이트 설치를 원하는 이유는 단 1초라도 록사나의 얼굴을 빨리 보고, 그녀의 곁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를 쥐어짰다. 워낙 표정이 침착해서 적절한 변명을 만들어 내느라 애쓰고 있다는 걸 연구실 안의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조차 부족해. 게다가 앞으로 로웰 후작과 황태자에게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하면 모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일분일초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는 취지의 설득력 있는 발언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양쪽 저택에도 게이트를 설치하도록 하죠.”
록사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스테리온이 탁자 아래에서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사이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차피 공작 성이랑 수도 공작저를 연결하는 게이트를 설치하고, 공작저와 남작저를 연결하는 건 정령석 파장만 맞춰 주면 되는 일이니까요.”
벨루카가 동굴 정령석 파장을 찾아 남작저 게이트와 연결한 것과 같은 원리였다.
“게이트 설치는 언제 시작하실 예정이십니까?”
내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앉아서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알렉이 입을 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지혜의 방에 들어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릴 지경이었다.
“내일부터 하지.”
록사나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어두운 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보나 마나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하다고 록사나가 대답할까 봐 미리 그가 선수를 친 것이었다.
“네, 내일 오전에 시작하죠.”
역시 그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오늘 밤에 정령석을 좀 만들어 놔야겠어요.”
그다음 곧바로 이어진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에는 대번에 불만이 서렸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계속 무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일 하는 것은 어때?”
“그래요, 록사나 님. 몸을 생각하셔야죠.”
그가 타협안을 제시하고, 아이린까지 나서서 거들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록사나가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아이린, 아까 내가 정령 새를 만들어 낼 정도로 힘이 강해진 거 봤잖아. 그러니까 이제 정령석 만드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야. 몇 날 며칠을 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숨 쉬는 것처럼 아주 쉬워.”
세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말리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어느 지역에 게이트를 추가로 더 설치할지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마자,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단단한 품 안에 갇힌 채로 그녀의 방까지 옮겨져야만 했다.
괜찮다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돌덩이 같은 가슴을 팡팡 내려쳤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소소한 보복이었다.
* * *
다음 날, 아벨리오 남작저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