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 방금 한 말 사실이야? 】
세 사람의 발걸음은 또 다른 별채로 향했다. 알렉의 임시 연구실이 마련된 곳이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평소 때라면 저녁을 들 시간이었다.
다들 이미 간식을 배불리 먹었던지라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알렉이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자료를 들고 와 록사나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흙색 약과 관련해 진행했던 연구 결과물들이었다.
록사나가 맨 위에 놓인 서류철부터 하나씩 집어 들고는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워낙 흙색 약과 관련된 자료 자체가 부족했었기에 결과물의 양도 많지 않은 편이어서 마지막 장까지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 예상대로 이 약은 정령의 기운과 관련된 것이었군요.”
록사나가 맞은편의 알렉을 바라보며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역시 록사나 님께서는 약의 정체를 짐작하고 계셨군요.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아니에요. 제 짐작을 확신하게 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인걸요.”
방금 한 말은 사실이었다. 록사나는 고개를 자꾸만 수그리는 알렉을 말렸다. 그와 피레아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을 것이다.
록사나의 진심을 깨달은 알렉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가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록사나 님께서는 정령사셔서 약에 무엇이 섞여 있는 건지 쉽게 알아채신 겁니까?”
“맞아요. 저도 그동안 추측만 했었는데 오늘 렌시아의 몸을 확인하면서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녀는 렌시아의 몸 안을 탐색하며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알렉에게 말해 주었다.
“저도 사람의 몸속 기운을 잘 감지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저는 록사나 님께서 읽어 내신 걸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알렉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록사나의 엘프 절맥증을 밝혀낼 만큼 몸속 기운을 감지하는 데 있어서 탁월하고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일찍부터 남들보다는 수월하게 의원의 길을 걷게 되었고, 현재 리온 제국 내에서 의원으로서 최고의 실력자로 손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경험했다. 또한 정령사의 뛰어난 자질과 감각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정진해야겠군.’
알렉은 제자리에 안주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며 간만에 투지에 불타올랐다.
“그나저나 정령이나 정령사가 모두 사라진 시대에 어떻게 흙색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혹시 정령이나 정령사를 데리고 있는 걸까요?”
곁에서 조용히 록사나를 보좌하던 있던 아이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확히는 록사나와 그녀의 어머니가 정령사였으니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록사나가 자신이 정령사라는 걸 밝히기 전에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네 말처럼 로웰 후작 측에 정령이나 정령사가 있을지도 몰라. 벨루카가 그 증거니까.”
아이린과 알렉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벨루카는 록사나가 영지 시찰 중 납치를 당했을 때 적의 몸에 심어져 있었다가 적의 죽음과 함께 그 존재가 드러났었다.
그런 만큼 정령의 힘과 관련된 존재가 더 있을 가능성은 농후했고, 그들이 흙색 약에 정령의 기운을 사용한 것도 충분히 설명되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네요.”
“앞으로 하나씩 밝혀내야지.”
아이린의 말에 록사나의 얼굴빛도 어두워졌다.
“렌시아가 겪고 있는 약에 대한 부작용을 없애거나, 그… 몸을 예전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알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몸을 원상태로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렌시아에게 정을 준 그로서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록사나가 블루에게 의사소통 능력을 부여하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부작용은 없앨 수 있을 거 같아요. 아까처럼 제가 렌시아의 몸에 주기적으로 정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 준다면 고통은 점차 수그러들 테니까요.”
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알렉의 두 눈이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그러다가 뒤에 이어지는 말에는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몸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저도 장담할 수가 없어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방법을 찾았을 때 렌시아가 다시 끔찍한 고통과 부작용을 고스란히 겪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라리 그냥 어른의 몸으로 고통 없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성인의 몸을 하고 더 이상의 부작용을 겪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세 사람이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그렇다고 해도 방법은 반드시 찾아야만 해요. 뭔가 길잡이가 될 만한 정보가 있다면 좋을 텐데…….”
록사나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알렉과 아이린도 뭔가 방법이 없을까 열심히 고민을 했다.
그때였다. 알렉이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아! 지혜의 방을 뒤져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지혜의 방이 있었죠!”
록사나의 표정이 덩달아 환해졌다.
알렉이 말한 지혜의 방은 카일라니 공작저에 있었는데, 온갖 고서와 세상의 진귀한 서적이란 서적은 다 모아 놓은 곳이었다.
‘록사나 님의 엘프 절맥증을 치료하는 방법도 그곳에 있는 책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지.’
순간 알렉의 양 볼이 발그레해졌다. 자연스레 다소 민망한 치료 방법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록사나와 아이린은 그가 정보를 얻을 실마리를 찾아서 기쁜가 보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흠흠. 분명 그곳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물론 가주의 승인을 받은 자만이 그곳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만.”
“알렉은 가능하지 않나요? 몇 년 전에 공작님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 어떻게?”
알렉이 순간 굉장히 당황했다. 자신이 그곳의 출입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록사나의 엘프 절맥증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설마 그 사실을 알고 계신 건가?’
아스테리온은 이에 대한 모든 사실을 본인에게 철저히 함구할 것을 명했고, 그는 충실히 따랐다.
현재까지도 아스테리온과 자신만의 비밀로 생각하며 지켜 오고 있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동공이 흔들리던 알렉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록사나를 발견하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록사나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휴, 하마터면 내 입으로 다 불 뻔했군.’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편 록사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혼자서 깜짝 놀랐다가 안심하는 알렉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좀 의심스러웠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군. 그게 뭘까?’
알렉을 추궁하는 것은 일단 당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지혜의 방에 출입이 어려운가 보군요. 그럼 다시 승인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아, 한시적이긴 합니다만 아직까지 출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 출입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공작저에 있을 때 하녀들이 그러던걸요. 주치의가 하루 종일 지혜의 방에 들어가 살면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고요.”
우연히 하녀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허허허. 그랬었지요.”
알렉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록사나가 자신이 지혜의 방 출입을 허락받은 이유를 물어볼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그에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록사나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지혜의 방에서 자료를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로웰 후작과 이종족하고 중요하게 얽힌 일이니 서둘러야겠네요.”
“네! 공작 성이 있는 레드포드까지 다녀오려면 여러 날이 걸리니 오늘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맨몸으로라도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는 듯이 알렉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잠깐만요, 알렉. 앉아요.”
“예? 한시가 급한 일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록사나가 허겁지겁 그를 말리자, 알렉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몇 마디 덧붙였다.
“지혜의 방은 공작저 내에서 저만 출입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조인족을 보내면 더 빠르겠군요.”
아스테리온이 조인족 중 한 명에게 지혜의 방 출입을 승인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평범한 인간보다 빠르게 공작령과 수도를 오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강인하기도 했으니.
그러나 록사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알렉.”
“그럼 다른 방법이 있으신 거군요.”
알렉이 곧장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네, 맞아요. 당장은 아니지만 더 빠르게 공작 성에 다녀올 방법이 있어요.”
“궁금하군요. 혹시 벨루카 님이 연결해 놓은 게이트를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수도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게이트를 타고 캠든 영지로 넘어가 레드포드로 영지로 가는 것이 단 며칠이라도 더 빨랐다.
“비슷해요.”
자신이 최근에 떠올린 생각을 어쩌다가 아스테리온보다 먼저 알렉에게 말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레드포드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게이트를 만들 거예요.”
“네?!”
“공작령으로 넘어가는 게이트를 만든다고?”
화들짝 놀라는 알렉의 목소리와 동시에 다른 사람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단숨에 그에게로 향했다.
“아스테리온.”
록사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스테리온이 척척 걸어왔다. 그러곤 대뜸 알렉을 옆으로 밀어내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했다.
서둘러 일을 끝내고 귀가했는데 요양을 하고 있어야 할 록사나가 별채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그녀를 일에서 떼어 놓고 다시 방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말이다.
“방금 한 말 사실이야?”
아스테리온의 매서운 눈빛에 알렉과 아이린이 긴장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최대한 몸을 뒤로 물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금의 상황과 대화로 인해 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같아 록사나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네, 맞아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레드포드와 수도를 연결하는 게이트를 설치하고 싶어요.”
“그게 가능해?”
“네, 제 계산으로는 충분히 가능해요. 이미 벨루카가 연결에 성공한 게이트가 있잖아요.”
“그건 불완전하잖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캠든 영지의 동굴과 연결된 게이트는 벨루카가 아니면 그 안에서 영원히 길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드나들 수가 없었다.
“맞아요. 하지만 동굴과 이종족 실험 시설이 연결된 게이트를 생각해 봐요. 거긴 게이트만 작동시키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죠.”
“그렇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