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록사나가 렌시아의 앞에 제 손을 디밀었다.
“렌시아, 한번 만져 볼래?”
“정말요?”
렌시아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록사나와 정령 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만졌다가 혹시나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하는 불안감이 눈에 언뜻언뜻 비쳤다.
렌시아의 마음을 느낀 록사나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네가 아무리 만져도 절대 사라지지 않아. 내가 힘을 풀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그제야 용기를 낸 렌시아가 한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손가락이 파란 깃털에 가 닿았다.
“아! 진짜 안 사라져요.”
렌시아가 달뜬 표정으로 정령 새를 연신 쓰다듬었다. 입은 참새처럼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몸이 따뜻해요. 진짜 새 같아요!”
“손 좀 내밀어 볼래?”
“이렇게요?”
렌시아가 양손을 붙여 펼치자, 록사나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정령 새를 턱 하니 옮겨 주었다.
“어떡해, 어떡해!!”
행여나 정령 새가 놀라서 날아가거나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얼음처럼 온몸이 잔뜩 굳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몹시 좋아했다.
아이다운 반응에 모두가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조금 긴장이 풀린 렌시아가 정령 새의 몸에 제 얼굴을 과감하게 비비었다.
- 삐잇~!
정령 새가 첫 울음소리를 내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정령 새가 렌시아를 마음에 들어 하나 봐요.”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피레아가 옆에 있는 아이린에게 속삭였다. 이에 아이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피레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피레아도 만져 보고 싶으면 한번 만져 볼래요?”
“네! 저도 만져 보고 싶어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오자 피레아는 거절하지 않았다.
록사나가 렌시아에게 눈짓을 했다.
렌시아는 살짝 아쉬워하면서도 자신이 더 데리고 있고 싶다는 고집이나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어느새 정령 새는 렌시아의 손을 거쳐 피레아의 손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정령 새가 부리로 피레아의 손바닥을 콕콕 쪼았다. 피레아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록사나 님, 정령 새님이 배가 고프신 걸까요?”
살아 있는 생물처럼 대하는 피레아의 반응에 록사나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지금 보는 정령 새는 정령의 힘을 불어 넣어 만든 존재라 벨루카와 같은 정령하고는 좀 달라요. 무생물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이게 진짜 새가 아니라고요?! 이렇게나 살아 움직이는데……. 보고도 믿기가 어렵네요.”
피레아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는 방금 머릿속에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럼 이 모습으로 계속 있을 수 없는 건가요?”
“맞아요, 힘이 다하면 저절로 사라질 거예요.”
“아, 그렇군요.”
피레아가 굉장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령 새의 모습에 홀딱 반한 아이린과 알렉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피레아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정령 새를 향해 번갈아 가며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힘이 다해 정령 새가 사라지기 전에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렌시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귀엽고 예쁜데…….”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록사나가 은근슬쩍 미소를 지었다.
정령 새는 피레아의 손바닥을 연신 쪼아 댔다.
그러자 렌시아가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쪼개어 작은 조각 하나를 정령 새에게 내밀었다.
콕. 콕콕.
정령 새가 쿠키 조각을 쪼아 먹기 시작했다.
“어?”
“우아~!”
렌시아와 피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령 새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서선이 한참 동안 정령 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령 새가 쿠키 조각을 다 먹어 치우자, 피레아가 렌시아에게 눈질을 했다.
그 의미를 바로 알아들은 렌시아가 쿠키 부스러기를 피레아의 손바닥 위에 떨어뜨렸다.
정령 새는 기다렸다는 듯 쿠키 부스러기를 콕콕 집어 먹었다. 잠시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무생물인데도 음식을 먹을 수 있나 봐요.”
아이린이 록사나 옆에서 조그맣게 속삭였다.
“응. 다는 아니지만 간혹가다 인간의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더라고.”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록사나가 말했다.
쿠키를 실컷 맛본 정령 새가 갑자기 휙 날아올랐다. 보란 듯이 방 안을 한 바퀴 돌고는 록사나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록사나가 렌시아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정령사임을 고백한 이유에 대한 본론을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렌시아, 보다시피 나는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알려진 정령사야. 너와 같은 이종족들은 정령의 기운을 인간보다 훨씬 잘 느껴. 너도 조금 전에 그걸 느꼈을 거야.”
렌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사용하자, 자신의 몸에 청량한 기운이 와 닿았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지만 그 기운이 록사나가 말한 정령의 기운임을 직감했다.
“내가 가진 정령의 힘으로 네 몸 상태를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 네가 먹은 흙색 약이 정령의 힘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어떻게 확인해요?”
“내가 가진 정령의 기운을 네 몸 안에 살짝 불어 넣을 거야. 처음이라 좀 이상한 느낌이 들겠지만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아.”
“좋아요.”
렌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나는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었고, 자신을 아프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주기 위한 행동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기에 의심 같은 건 전혀 들지 않았다.
렌시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록사나가 두 손바닥을 편 채로 앞으로 내밀었다.
“자 그럼, 손 좀 줘 볼래?”
렌시아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두 손을 록사나의 손 위에 각각 하나씩 내려놓았다.
“몸이 불편하거나 속이 안 좋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 그 즉시 멈출게. 자, 마음 편하게 가지렴. 그럼 바로 시작할게.”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렌시아가 두 눈을 꼭 감았다.
록사나가 맞잡은 손을 통해 렌시아의 몸 안으로 조금씩 정령의 기운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렌시아가 몸을 약간 움찔거렸다. 몸속으로 무언가 밀려 들어오는 낯선 감각에 살짝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록사나는 렌시아가 적응할 시간을 갖도록 잠시 멈추었다. 점차 렌시아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지면서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자, 그때부터 다시 기운을 흘려보냈다.
잠시 후,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록사나 역시 두 눈을 내리감았다.
‘흠. 자, 어디 볼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인간과 이종족들이 가진 생명의 기운이었다.
렌시아의 몸 전체, 구석구석 기운을 퍼뜨린 록사나가 손으로 하나하나 만지듯이 세세하게 몸 안을 훑어 나갔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온 힘과 정성을 기울였다.
‘이거다!’
렌시아의 몸 안의 생명의 기운과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내 몸 안에 있었던 검은 기운과 닮은 것 같아.’
다른 점도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은 얕은 살얼음처럼 위태롭게 그지없었다.
정령의 기운을 그쪽으로 좀 더 흘려보내자, 아무 변화가 없던 것이 갑자기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그러했다.
‘안 되겠다. 지금 상태로는 위험할 수 있겠어!’
록사나가 기운을 서서히 뒤로 물렸다.
그녀는 렌시아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이질적인 기운은 강제로 폭풍 성장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자, 현재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렌시아의 몸 전체에 넓게 깔려 있었다.
만약 이걸 지금 건드린다면 현재의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의 여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놓치는 곳이 없도록 머리에서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려간 록사나가 서서히 정령의 기운을 거둬들였다.
잠시 후, 록사나가 눈을 떴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청량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렌시아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와, 정말 신기해요!”
“어디 불편하거나 이상한 곳은 없니?”
“전혀요. 저 지금 몸이 엄청 가볍고 시원해요!”
렌시아가 자신의 팔과 다리, 머리를 번갈아 만져 보았다. 이내 두 손으로 뺨을 감싸고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이 급격하게 변한 이후로 자주 뼈마디가 쿡쿡 쑤시고 머리가 무거웠었는데 그게 싹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렌시아는 간만에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무엇 때문에 렌시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잘 아는 록사나가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정령의 기운은 몸속 찌꺼기 같은 기운을 없애 주기도 하거든.”
“다음에도 또 해 주세요!”
“그래.”
해맑게 웃는 렌시아를 바라보며 록사나가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걱정으로 무거워졌다.
‘흙색 약의 기운이 렌시아가 계속 아픈 원인인 것 같은데……. 너무 위험해서 그걸 당장 없앨 수는 없고, 어쨌든 괜찮은 해결 방법을 찾는 동안은 렌시아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좋겠어.’
그녀는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뒤로 미뤄 두었다.
이후 록사나는 별채에 조금 더 머물면서 렌시아가 남작저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나 어려움은 없는지 물었다.
대부분의 생을 로웰 후작저의 지하 감옥에서 보냈던 렌시아에게 비교군 자체가 없어서 그런지 이곳에서의 생활을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록사나가 렌시아의 방을 나설 때쯤에 두 사람의 사이는 언니와 동생처럼 허물없이 가까워졌다.
그래서 렌시아는 록사나를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용기를 내어서 자신이 푸딩을 언제 다시 맛볼 수 있는지를 물었다.
오늘 먹은 간식 중 푸딩이 가장 맛있고,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록사나는 이가 썩지 않게 매일 양치를 하고, 간식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일이 없도록 정해진 횟수와 시간을 지킨다면 간식 시간에 푸딩을 매일 먹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다.
렌시아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뛸 듯이 기뻐한 건 당연했다. 기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감히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록사나가 파란 정령 새를 렌시아 곁에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힘이 다해서 파란 정령 새가 사라지지 않도록 록사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주었다.
정령사인 그녀가 매번 힘을 불어 넣어 주지 않아도 정령 새 스스로 자연에서 정령의 기운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신에 정령 새는 밤낮없이 깨어 있지 못하고 여타 살아 있는 새들처럼 종종 수면을 취해야만 하는 제약을 갖게 되었다.
렌시아는 이 제약을 무척이나 기꺼워했다. 자신처럼 잠들고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살아 있는 생명처럼 느껴져서 더 친근하다나 뭐라나.
록사나는 고차원적인 것은 어려웠지만 정령 새가 렌시아와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도록 말을 배울 수 있는 능력도 일부 부여했다.
말 그대로 말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능력이었고, 실제로 말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가르치는 소통자이자 양육자에게 달려 있었다.
즉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공감자와 어느 정도로 교류하고 감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온전한 힘을 갖지 못한 예전의 록사나라면 이런 일들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꽤 많은 힘을 되찾은 지금은 손쉽게 가능했다.
렌시아는 정령 새에게 ‘블루’라는 직관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벌써부터 블루에게 말을 가르치기 시작하느라 여념이 없는 렌시아와 그 모습을 구경하는 데 정신이 쏙 빠진 피레아를 뒤로하고 록사나가 별채를 빠져나왔다.
아이린이 곁에서 그녀를 부축했고, 알렉이 몇 걸음 떨어져서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