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이때 피레아와 알렉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알렉이 씩 웃었다.
모종의 음모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는데, 당연히 이 모습을 등 뒤에 있는 렌시아는 볼 수 없었다.
초코케이크는 렌시아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죽고 못 사는 간식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듯이 렌시아의 몸이 절반 이상 알렉의 등 뒤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초코케이크…….”
렌시아가 침을 꼴깍 삼키며 중얼거렸다. 케이크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짙은 간절함과 열망으로 번들거렸다.
“제가 좋아하는 버터 쿠키는 없습니까?”
“무슨 말씀이에요. 당연히 있죠. 여기요!”
알렉의 의도된 물음에 아이린까지 나서서 거들었다. 그를 향해 버터 쿠키 하나를 쑥 내밀었고, 렌시아의 손이 재빠르게 그것을 탁 하고 가로챘다.
게임 끝이었다.
와그작와그작.
렌시아가 맛있게 버터 쿠키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방 안의 모든 이들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렌시아, 급하게 먹다가 체할라.”
알렉이 렌시아의 팔을 잡고 이끌어 소파에 주저앉혔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이 무척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이미 소파 근처까지 다가와 있어서 식은 수프 먹기였다.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고 쿠키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피레아가 재빨리 포크와 함께 초코케이크 접시를 렌시아 앞에 들이밀었다.
이번에도 렌시아는 초코케이크를 맛보느라 정신이 팔려 그녀의 경계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록사나는 렌시아가 간식을 양껏 먹을 수 있도록 한동안 내버려 두었다. 간혹가다 렌시아의 손에서 간식거리가 떨어질 것 같으면 다른 케이크나 머핀 등을 직접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평화 아닌 평화가 찾아온 가운데 한결 마음이 편해진 알렉과 피레아, 아이린이 록사나와 함께 간식을 곁들인 티타임을 즐겼다.
꽉꽉 차 있던 간식 바구니가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록사나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와, 진짜 잘 먹는다!’
거의 대부분의 간식은 렌시아의 배 속으로 다 들어갔다. 네 명의 어른이 먹은 양을 합한 것보다 렌시아 혼자 먹어 치운 양이 더 많았다.
‘하긴, 렌시아 몸은 이제 어른이고, 나이로만 따지면 한창 성장기니까 그럴 수 있지.’
록사나가 작은 스푼을 조그만 그릇에 꽂아서 렌시아에게로 건넸다.
경계심이 눈 녹듯이 사라진 렌시아가 그것을 덥석 받아 들었다. 말캉한 내용물을 스푼으로 푹 떠서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마자 진녹색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맛있지? 그거 푸딩이야?”
“푸딩?”
고개를 격하게 끄덕여 긍정을 표한 렌시아가 곧장 되묻자, 록사나가 맞다고 가볍게 응수했다.
렌시아는 한 입 맛본 달달하고 상큼하며 부드러운 과일 푸딩을 태어나 처음 먹어 보고는 그 황홀한 맛에 푹 빠져 버렸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푸딩이 담긴 그릇과 그녀의 입을 향해 스푼을 바쁘게 움직였다.
록사나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벨리오 남작저에서 식사와 간식을 책임지는 주방장은 기거하는 모든 이들 대부분의 식성과 취향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방장은 록사나가 렌시아의 식성에 대해서 물었을 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대답했다.
그녀가 렌시아가 좋아하는 간식들 위주로 준비해 달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렌시아가 아직까지 먹어 보지 못한 간식 하나를 더 챙겨 달라고 하기를 잘했네.’
혹시 몰라서 새로운 간식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었는데 렌시아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시키는 데 있어서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록사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렌시아의 경계를 손쉽게 없앰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렌시아가 간식 바구니로 안정을 되찾자 록사나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렌시아, 안녕? 나는 록사나 아벨리오야.”
“안녕하세요. 저는 렌시아예요.”
렌시아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가림하며 경계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 마커스 경에게 렌시아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꼭 직접 만나 보고 싶었단다.”
“진짜요? 제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마커스 경이 말해 줬어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줘서인지 아니면 마커스 경이 자신을 화제에 올린 것이 좋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기뻐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맞아. 마커스 경이 렌시아라는 예쁜 아이가 있다고 알려 줬거든.”
“음. 저도 록사나 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구출되어 아벨리오 남작저에 왔을 때 마커스 경과 피레아를 통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록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록사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고, 기회가 된다면 생명의 은인을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는데 실제로 록사나를 마주하게 되니 자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는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얼굴을 살짝 붉히는 렌시아를 보며 록사나는 자신이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떠올렸다.
내 이야기 많이 들었다면서 왜 그렇게 피했냐는 질문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미 알렉에게 들어서 렌시아의 현재 몸 상태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본인에게 직접 들어 보고 싶었다.
“렌시아, 요즘 몸은 좀 어떠니? 종종 많이 아파한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많이 아프니?”
“처음에는 진짜 많이 아팠는데요. 알렉 할아버지랑 피레아가 만들어 준 약을 먹은 뒤부터는 두 번 아플 거 한 번밖에 아파요.”
렌시아가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알렉과 피레아를 번갈아 한 번 돌아보았다.
이에 알렉이 주름진 손을 뻗어 렌시아의 은빛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의 은발과 진한 녹색 눈동자도 아이의 외모에 잘 어울렸지만 원래 렌시아는 갈색 머리칼에 검은색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놈의 흙색 약만 아니었어도 이 아이가 본연의 모습을 잃고 밤마다 아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렌시아를 바라보는 알렉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두 모습을 모두 본 그는 렌시아가 태어날 때부터 지닌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덜 아프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록사나가 알렉과 피레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수고했다는 눈인사를 건넸다.
두 의원은 록사나가 쓰러져 있던 기간 동안 잠을 줄여 가며 그녀를 돌보면서 동시에 렌시아를 위한 진통제를 개발했었다.
알렉과 피레아는 별것 아니었다는 듯 살짝 상체를 굽혀 화답했다. 더없이 겸손한 자세였다.
다만 두 사람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렌시아의 고통을 싹 없애 주거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흙색 약의 성분 역시 완벽하게 분석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요즘 그들은 각자의 가슴에 돌덩이 몇 개가 얹어져 있는 상태였다.
두 사람은 그 약이 정령의 힘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추측과 가설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정령사인 록사나가 깨어났으니 조만간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잠시 말이 없던 록사나가 맞은편에 있는 렌시아를 올곧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렌시아, 만약에 말이야.”
운을 떼는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신중했다.
렌시아가 눈을 깜박이며 록사나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만약에 다시 네 예전 몸으로, 그러니까 지금처럼 어른의 몸이 아닌 원래의 네 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넌 어떻게 하고 싶니?”
“…원래의 내 몸으로요?”
렌시아가 자신의 예전 몸 상태를 떠올렸다. 얼굴이 울 듯 말 듯 일그러졌다.
삐쩍 마르고 작은 몸, 힘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약해 빠졌던 몸.
그동안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렌시아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던 예전의 한없이 나약하고 힘없던 자신의 몸뚱이가 싫었다.
반면에 보라. 지금은 키도 쑥 커지고 힘도 훨씬 세졌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어른 앞에 서더라도 전보다 덜 무섭게 느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몸이 아픈 것을 빼고는 말이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렌시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당장 결정하라는 말은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가 어떤 모습으로 있고 싶은지 한 번쯤 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록사나가 렌시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럴게요.”
내내 어두웠던 렌시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록사나는 렌시아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해져도 만약 렌시아가 지금의 모습, 그러니까 성인의 몸으로 있고 싶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렌시아의 의사였다.
물론 흙색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는 방법 역시 최대한 서둘러 찾을 것이다.
“렌시아, 나는 정령사야.”
록사나의 뜬금없는 고백에 렌시아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커졌다.
“진짜요?”
이내 록사나가 거짓말 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렌시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령사는 이제 없는데…….”
올해로 열세 살이 된 렌시아는 자신이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내 갇혀 지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 중에는 어른들도 있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는 지식이나 그들이 겅험하거나 알고 있던 세상, 시설 바깥의 이야기를 별다른 놀거리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동화처럼 들려주곤 했었다.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가 정령과 정령사였다.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왔다.
정령사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린 렌시아가 자신이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어른들이 그랬어요. 옛날 옛날에 신이 노해서 정령사들이 모두 사라졌다고요.”
“정령사들이 사라졌었다는 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모두는 아니란다. 내 어머니도 나처럼 진짜 정령사셨거든. 자, 여길 보렴.”
역시 백 번의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
록사나는 렌시아가 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손안에서 정령의 힘이 둥글게 모여들었다.
그렇게 구 형체를 갖춘 힘이 서서히 다른 형태로 변모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안에 파란 깃털을 가진 작은 새 한 마리가 짠 나타났다.
“우아~!”
“맙소사!”
렌시아뿐만 아니라, 아이린과 알렉까지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렸다.
피레아는 두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그러면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 혹여나 환상은 아닌지 재차 확인을 거듭했다.
“전과는 다른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힘이 더 커지신 거 같아요, 맞죠?”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린 아이린의 질문에 록사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힘도 거의 돌아왔고, 이제는 예전처럼 힘 조절도 더 세밀하게 할 수 있어.”
신기한 모습들이 네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렇게 새도 만들 수 있고, 나비도, 다람쥐랑 다른 것도.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말이야.”
록사나 손안의 파란 새가 곧장 노란 나비로 변하며 날개를 팔랑거렸다. 이어서 다람쥐, 물고기, 고양이 등 다른 여러 가지 다양한 동물들로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마지막으로는 파란 새로 다시 돌아왔다.
“허허허, 정말 놀랍군요.”
“내 생애 정령사를 직접 보게 되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알렉의 감탄에 이어 두 손을 꼭 모은 피레아가 감격에 겨워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실제로 이 중에서 렌시아와 함께 피레아는 록사나가 정령의 힘을 다루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정령사를 만난 것 자체도 물론 처음이었다. 그녀 역시 오늘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 정령사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