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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81)화 (181/214)

181화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씨앗으로 남아 있던 것이 기어이 그 싹을 틔웠다.

록사나는 그와의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아스테리온이 재결합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은 적은 없지만 그가 자신과의 미래를 꿈꾼다는 것 정도는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생각만으로 심장 박동이 쿵쿵 평소보다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손을 들어 심장 언저리를 부여잡았다.

‘앞으로 난 그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아스테리온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일부러 그와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 주문을 걸듯 상기하곤 했었다.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그녀에게 단 한 번의 지독한 사랑은 깊은 상처를 내었다. 새 살이 돋아 딱지가 떨어지고 남은 흉터가 희미해졌다.

그래도 지나온 시간들의 고통마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간들이 익숙해져서 이제는 덤덤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어쩌면 겁쟁이가 되어 버린 걸지도…….’

어느덧 그녀는 새 삶과 목표를 찾았고,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가 그녀가 가는 길에 현재 어느 정도는 함께 걷고 있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특별해진다고 해도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희생하거나 돌아갈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허수아비 카일라니 공작 부인보다 아벨리오 남작이 더 좋아.’

설령 제대로 된 공작 부인의 자리가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록사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스테리온에게로 그녀의 마음이 점점 무게를 더하며 기우는 것과도 별개였다.

이는 록사나가 꿈속에서 정령계를 하염없이 헤맬 때 단연코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냉정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난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될 거야.”

잠시 갈피를 잃고 헤매던 록사나의 마음이 중심을 잡으며 확고해졌다.

‘정 나랑 다시 살고 싶다거나 한다면 아쉬운 쪽에서 장가라도 오든가.’

진지했던 록사나의 표정이 자신만만해졌다.

그녀는 과거처럼 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싶은 마음 따위 전혀 없었다.

그렇게 록사나는 전남편인 아스테리온에게 다시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도 않았다.

이혼 후 홀로서기를 하며 보내 온 시간들이 그녀를 한층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자.’

흘러간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며 록사나는 복잡했던 마음 정리를 끝냈다.

앞으로는 그와의 문제로 지금처럼 깊이 고민하거나 마음이 약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잠시 후, 아이린이 음식을 담은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건더기가 어느 정도 들어가고 소화시키기에 좋은 메뉴들로 구성된 식사였다.

허기를 느낀 록사나가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린이 음식들을 그녀의 앞으로 옮겨 놓아 주었다.

록사나가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던 벨루카가 돌아왔다.

사람들은 록사나가 회복과 휴식을 편하게 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벨루카가 곧바로 그녀의 방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덕분에 벨루카는 한참 동안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며 놀다가 온 참이었다.

록사나가 벨루카를 끌어안았다. 애정 어린 손길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은빛 털을 쓰다듬었다.

벨루카의 덩치가 워낙 커져서 둘의 모습은 벨루카가 록사나를 덮친 것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벨루카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품에 바짝 안긴 채 눈웃음을 지었다. 헤벌쭉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역시 벨루카, 너밖에 없어.”

- 당연하지! 나도 록사나뿐이야.

좀 전에 록사나와 아스테리온 사이에 벌어졌던 조그만 소동에 대해 벨루카는 알지 못했다.

- 더 많이 만져 줘. 나 착한 일, 좋은 진짜 많이 했어. 도움도 얼마나 많이 줬는데! 인간들이 다 인정한 사실이야.

“그래그래.”

만져 달라는 말에 다른 생각이 떠올라 록사나가 순간 움찔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는 부지런히 벨루카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록사나가 자신의 결혼 생활 중의 흑역사를 묻으며 멘탈을 회복하는 데에는 역시 벨루카 쓰담쓰담 테라피만 한 것이 없었다.

그사이 방을 나갔던 아이린이 서류 더미를 한 아름 안아 들고는 돌아왔다.

“더 쉬셔야 하는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지루해서 이거라도 안 하면 좀이 쑤실 것 같아. 게다가 알렉이 몸을 움직이는 게 회복에 좋다고 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록사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벨루카도 그녀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단순 서류 작업일 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네.”

계속되는 염려에 록사나가 힘들이지 않고 앉아서 하는 일임을 강조하자 아이린도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록사나의 몸만 괜찮다면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업무에 복귀하는 것이 밀린 일 처리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지 쪽은 프레드릭 집사님께서 알아서 잘 처리해 주고 계셔서 지금 당장 검토해 주셔야 할 건 없어요.”

널따란 탁자 위에 서류 뭉치를 종류별로 나누어 배치한 아이린이 가장 시급한 건부터 록사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4구역 관련 서류예요.”

“그래, 고마워.”

록사나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관련 사항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쓰러지면서 뜻하지 않게 4구역 주거 사업 진행 속도가 다소 늦춰진 상황이었다.

한동안 록사나는 서류에 파묻혀 고개를 들 시간도 없이 업무에 집중했다.

그녀는 오후가 훌쩍 지나고 나서야 겨우 서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록사나가 잠시 창문 너머 별채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대번에 착 가라앉으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린, 별채로 가자.”

다음 일정을 정한 록사나가 몸을 일으켜 오랜만에 방문을 나섰다.

* * *

별채에 발을 들이자, 1층 계단을 내려오던 피레아가 록사나와 아이린을 발견하고는 성큼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서로 간에 안부 인사가 짧게 오고 간 후, 피레아는 록사나가 별채로 발걸음할 일을 떠올리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남작님, 혹시 렌시아를 보러 오신 거세요?”

“맞아요, 피레아. 렌시아가 있는 곳으로 안내 좀 해 줄래요?”

“물론이에요. 3층 방에 기거하고 있어요.”

피레아가 몸을 곧장 돌려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녀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록사나의 상태를 떠올리고는 걸음 속도를 현저히 늦추었다.

피레아의 배려를 느끼며 록사나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는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아이린은 그런 록사나를 부축하며 옆에서 함께 걸었다. 록사나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방을 나서면서부터 이어진 아이린의 과보호는 별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렌시아가 기거하는 3층 방에 다다른 피레아가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사람도 함께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알렉이 반갑게 록사나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채 감추지 못한 염려가 스치고 지나갔다. 환자의 상태에 예민한 의원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염려 마세요, 알렉. 자주 걷기 운동을 하는 게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록사나가 방긋 웃으며 그의 처방을 상기시켜 주자, 알렉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내 록사나의 시선이 알렉의 등 뒤로 향했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놀라 알렉의 등 뒤에 몸을 급히 숨긴 사람의 은발 머리가 나풀거렸다.

“렌시아, 숨을 필요 없단다. 이분이 바로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님이셔.”

알렉이 어린 손녀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등 뒤에서 여자가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진녹색 눈동자에는 채 감추지 못한 경계심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허허허. 이 녀석이 낯을 이렇게까지 가리는 편은 아닌데……. 아무래도 간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록사나가 이런 일로 경을 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지만 괜한 조바심에 알렉이 먼저 선수를 쳤다.

“사람을 경계해서 나쁠 건 없죠.”

이종족들은 음지나 로웰 후작 같은 세력들에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부당한 대우들을 받아 왔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앞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록사나는 생각했다.

록사나는 억지로 렌시아를 알렉의 등 뒤에서 끌어내려 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에 마련된 소파로 다가갔다.

그녀와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아이린이 차를 준비할 때까지도 렌시아는 알렉을 방패 삼아 두 사람을 힐끔거리며 관찰했다.

덩달아 알렉은 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등 뒤에 렌시아를 단 채로 엉거주춤 서 있어야만 했다.

“허허허, 이 녀석이.”

차마 야단을 치지 못하는 알렉을 보면서 록사나는 그가 렌시아를 그녀의 짐작보다 많이 아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록사나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조그맣게 나는 딸깍 소리에 알렉의 등 뒤에 숨은 렌시아가 몸을 순간 움찔거렸다.

겁먹은 새끼 고양이 같은 렌시아를 한 번 힐끔 쳐다본 록사나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린, 별채 앞에서 바구니 좀 받아 와 줄래?”

“네, 남작님. 금방 다녀올게요.”

아이린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별채로 오기 전에 록사나는 주방에 간식 바구니를 요청했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낯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면 렌시아의 경계심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해서 자신을 내려보내는 것이라고 짐작하며 아이린이 방을 나섰다.

그사이 피레아까지 나서서 렌시아를 어르고 달랬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레아가 포기했을 때쯤 아이린이 묵직한 바구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턱. 아이린이 보란 듯이 바구니를 탁자에 올려놓고는 그 위에 덮여 있는 천을 열어젖혔다.

순식간에 고소하고 온갖 맛있는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져 나갔다.

렌시아의 시선이 단숨에 간식 바구니를 향해 꽂혔다. 진녹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거렸고, 고개는 아까보다 더 쑥 내밀어진 채였다.

록사나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일부러 찻잔을 들어 올려 실룩거리는 자신의 입가를 쓱 가렸다.

‘몸이 아무리 자랐어도 역시 아이는 아이야.’

얼핏 봐도 렌시아는 강압적인 폭풍 성장으로 인해 성인의 몸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록사나보다도 한참이나 키가 커 보였다.

잠시간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렌시아에게로 쏠렸다.

“간식인가 봅니다. 냄새가 아주 좋습니다.”

알렉의 확인 사살에 렌시아의 몸이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알렉의 등을 쿡쿡 찔렀다.

간식 좀 어떻게 해 보라고.

“허허허. 녀석아, 저건 내 게 아니라서 말이다.”

“알렉, 피레아, 어서 이리로 오셔서 쿠키랑 간식 좀 드셔 보세요. 제일 맛있는 걸로 해 달라고 주방에 특별히 부탁해서 가져온 거예요.”

록사나가 풀이 죽은 렌시아의 반응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두 사람에게 재차 간식을 권했다.

“사양하지 않고 먹을게요.”

“그럼 저도.”

먼저 피레아가 자리를 간식 바구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알렉은 렌시아를 뒤에 달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렌시아가 느리지만 주춤거리면서 바짝 따라붙었다.

피레아가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는 한껏 과장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이거 제가 좋아하는 초코케이크잖아요.”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달콤한 조각 케이크 한 접시가 보란 듯이 대놓고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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