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아스테리온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쓱 쓸어 넘겼다. 이어서 그의 뺨을 감싸 안고 엄지손가락으로 금빛 눈썹을 살살 만지작거렸다.
‘어쩜 눈썹도 이리 잘생겼을까?’
같이 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그와의 결혼 생활이 저절로 떠올랐다.
두 사람이 밤을 함께 보낸 후에는 거의 대부분 홀로 쓸쓸한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다.
가뭄에 콩 나듯 정말 어쩌다가 운이 좋은 날에만 지금처럼 그가 잠든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록사나는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실컷 바라보면서 몸도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대로 봐 주지 않는 아스테리온이 때때로 몹시 밉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사랑했다.
결혼 생활 내내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들이 귀중하고 소중했다. 한순간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록사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는 도둑고양이가 되었고, 평소에는 함부로 바라보거나 만질 수 없는 그를 눈앞에 두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곤 했다. 지금처럼.
‘지금처럼?!!’
갑자기 드러난 파란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두 눈이 대번에 커졌고, 풍랑을 만난 배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이거는…….”
나비가 꽃을 찾아가듯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록사나의 손은 붉은 입술에 가 닿아 있었다.
몸이 쩡 굳은 록사나는 손을 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동작과 사고가 멈춰 버렸다.
아스테리온이 그런 그녀의 손을 감싸 쥐어 제 얼굴을 더욱 밀어붙였다.
요사스런 눈빛을 뿜어내며 나른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말했다.
“이런, 들켰네?”
움직임에 따라 말캉한 입술이 손가락에 더욱 깊이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자 록사나의 손끝이 구부러들었다.
“…허락 없이 함부로 만져서 미안해요.”
자신의 입술을 탐하던 손가락이 곧장 멀어지려 하자, 아스테리온은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그가 록사나의 손을 아예 자신의 손으로 덮어 버리며 물러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내렸다.
록사나가 자신을,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예뻐해 주기를 기다리기에는 초조하고 애가 닳았다. 그대로 놓으면 손을 물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록사나보다 훨씬 먼저 깨어 있었다. 다만 1분 1초라도 더 그녀의 곁에 머물고 싶어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잠에서 깨 제 얼굴을 여기저기 만지작거리기 시작하자, 하마터면 눈을 번쩍 뜰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간신히 발휘하며 위기를 여러 번이나 넘겼다.
부드럽게 와 닿는 손길이 주는 감각은 그를 끝도 없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간질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는 한 꺼풀 너머 어둠 안에서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상상했다.
‘집중할 때 살짝 튀어나오는 앙증맞은 입술을 하고 있을까? 비단 같은 검은 속눈썹 아래 두 눈은 울창한 숲 같은 빛깔로 변했으려나?’
너무나 황홀해서 이를 악물고 버텨 내며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던 찰나였다. 그녀의 손길이 옮겨 와 그의 입술을 두드렸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그는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좀 더 참을 걸 하는 후회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금세 사라졌다.
상상이 아닌 제 앞에 있는 록사나를 직접 볼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실시간으로 당황하는 모습은 깨물고 싶을 정도로 몹시도 귀여웠다.
‘역시 실제가 더 예쁘고 좋아.’
아스테리온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파란 눈이 한층 깊고 그윽해졌다.
당장에라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온몸을 불사를 듯한 뜨거운 열기와 갈망을 발견한 록사나가 화들짝 놀랐다.
“왜, 왜 그래요?”
그녀가 붙잡힌 손을 빼내기 위해 힘을 줬다. 하지만 제 신체 일부를 고이 가둔 단단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록사나가 자유로운 왼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이 그 손마저 제 손아귀 안으로 잽싸게 낚아챘다.
이로써 그녀의 두 손은 모두 아스테리온의 양손에 포로로 잡혀 버렸다.
“어어…….”
록사나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그녀의 왼손가락 모두에 입을 맞춘 아스테리온이 마지막으로 양 손바닥에 차례로 입술을 진득하게 묻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록사나는 두 눈 벌겋게 뜨고 그의 모든 행동을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다. 손이 간질거렸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다시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에 록사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록사나의 말캉한 입술을 머금었다.
“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스테리온이 집요하게 안쪽으로 침범해 파고들었다.
속눈썹이 내려앉았고, 부드럽고 촉촉한 살결이 맞닿으며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록사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스테리온에게 제 입술을 온전히 내준 채 온몸이 찌릿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점점 숨이 가빠 왔다. 한계에 다다랐다 싶을 때쯤 촉 소리를 마지막으로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아쉽다.’
자신의 생각에 놀란 록사나가 속으로 흠칫했다. 빠르게 뛰는 제 심장을 애써 외면하며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이내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아스테리온의 푸른 눈에는 채 지워 내지 못한 열기가 남아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찌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아스테리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꾸 입술 깨물면 또 키스할 거야.”
엄중한 경고를 날린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물기 어린 록사나의 입술을 쓸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살짝 뭉그러졌다가 제 형태를 찾았다.
“음. 설마 나 벌받은 거예요? 아니면 실수?”
“글쎄. 뭐일 것 같아?”
민망해하는 록사나와는 다르게 아스테리온은 능구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둘 다?”
“땡!”
그의 대답에 록사나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물려 그와의 간격을 벌렸다.
“그럼 뭔데요?”
“벌과 실수를 빙자한 사심 충족.”
“…어?”
아스테리온의 솔직한 발언에 록사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만지면 붉은 물이 묻어 나오지 않을까 싶어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건드렸다.
록사나가 몸을 움찔거렸다. 이와 동시에 자신의 입술을 또 꾹 깨물었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녀가 아스테리온의 진득한 시선을 슬쩍 피하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또 할 건가요?”
“당신이 원한다면.”
“뭐예요? 아까는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 놓고선.”
“도저히 참을 자신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는데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등허리를 은근히 쓰다듬었다. 이에 그녀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록사나가 널따란 가슴팍을 팍 밀어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별수 없이 아스테리온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록사나가 그와 거리를 벌렸다.
“누가 허락해 준대요?”
새침하게 말하며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한껏 토라진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아스테리온이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당신이 내 몸 주물럭거리며 여기저기 만져도 내버려 두었는데…….”
“그건……! 아니, 내가 언제 여기저기 만졌어요? 얼굴밖에 안 만졌다고요!”
“정말? 또 모르지. 내가 잠들어 있었을 때 얼굴 말고 다른 은밀한 부위도 만졌을지. 그건 하늘과 그대만이 아는 진실일 거야.”
록사나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그 은밀, 아니, 중요한 부위는 절대, 절대로 손도 안 댔어요!”
“중요한 부위?”
곤란한 단어를 피하자고 다른 단어를 선택했던 록사나의 시도는 곧장 실패로 돌아갔다. 낭패한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다 만졌다는 얘기잖아.”
“…….”
아스테리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순진한 소년처럼 두 팔로 제 가슴을 엑스자로 교차해 가렸다.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록사나가 옆에 놓인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그를 향해 냅다 던졌다.
아무런 타격감도 주지 못하는 베개를 아스테리온이 손쉽게 받아 냈다. 그가 베개를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씩 웃는 얼굴로 말했다.
“책임져.”
자신은 이제 어디 가서 재혼하기 힘든 몸이 되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덧붙였다.
록사나의 분노가 재점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화를 피하고자 그가 재빠르게 방 밖으로 도망쳤다.
아스테리온이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록사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고작 얼굴이랑 어깨, 팔 같은 데 만진 게 다인데! 자기는 나한테 더한 것도 했으면서.’
아, 잘 생각해 보니 단단한 허벅지가 신기해서 아주 가끔은 쿡쿡 찔러 보기도 했었다.
“어쨌든 난 억울하다고!”
자신을 파렴치한으로 만들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몸을 밝히는 쪽은 오히려 자기였으면서!’
록사나가 베개를 퍽퍽 내려치며 꽥 소리를 내질렀다. 이 소란에 깜짝 놀란 아이린이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록시 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가 아프세요?”
어느 순간부터 제풀에 지친 록사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요?”
“…….”
록사나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아이린이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지막까지 아이린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한껏 열을 내던 록사나가 진정하자, 아침 식사를 가져오겠다며 아이린이 방을 나섰다.
록사나는 그제야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어제 오후에 깨어난 이후로 아스테리온과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곁을 지키면서 수시로 머물렀었기 때문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은 록사나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정확히는 자신의 몸에 담긴 정령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심장을 중심으로 온몸에 퍼져 있는 정령의 기운이 기분 좋게 찰랑거렸다.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거의 모든 힘이 돌아왔어!’
한 손을 들어 힘을 모았다. 순식간에 손바닥 위에 바람 줄기가 형성되더니 그녀의 의지에 따라서 빠른 속도로 세차게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가히 그녀가 쓰러지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이것은 마치 바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록사나가 기존에 지녔던 힘의 크기와 비교해 보자면, 지금은 컵에 담긴 물의 양이 전보다 10분의 1 정도가 덜 찬 상태였다.
하지만 12년 전에 모든 힘을 잃었다가 지금 이 정도까지 되찾게 된 것은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동안 힘을 운용해 보던 록사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람의 힘을 모조리 거두었다. 그러고 나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전보다 힘을 빠르게 되찾게 된 것은 검은 돌에 담겨 있던 기운이랑 꿈속에서나마 샤일리를 만난 영향 때문일까?’
어떻게 해야 부족한 힘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최대 고민이었다.
‘샤일리와 정령들을 구하고 나머지 힘까지 온전히 되찾는 데 모든 것이 검은 돌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 같아.’
그런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내 록사나의 생각이 아스테리온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흘러갔다.
결혼 생활 내내 매몰차게 대했을 때는 언제고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표하며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전남편.
‘그에 대한 마음은 먼지 한 톨 남겨 두지 않고 폭풍우에 씻겨 모두 떠내려 보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고 오만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