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아스테리온, 역시 당신이었네요.’
정령들이 안내해 준 길을 따라 걷다가 또 길을 잃었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 록사나를 이끌어 준 목소리는 예상대로 바로 아스테리온이었다.
아스테리온의 바다 같은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록, 록사…나.”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뺨을 가로지르며 눈물이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그는 아예 서럽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맙소사, 울고 있는 카일라니 공작이라니!’
록사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믿기 힘들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스테리온의 눈빛에는 원망과 서러움의 감정들이 뒤섞여서 나타났다.
‘아니,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억울한 마음이 든 것은 물론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깨어난 게 이렇게 울 일인가 싶었다.
록사나가 속으로 허둥거리며 그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 왜 그러지?’
눈물이 앞을 가리며 시야가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아스테리온이 용케 이를 곧바로 알아챘다.
그가 곧장 한 손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그러더니 몸을 계속 버둥거리는 록사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지그시 붙들었다.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면 안 좋아.”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볼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눈물을 훔쳐 낸 손끝에 물기가 묻어 있어서 맞닿은 피부에서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록사나는 기분이 나쁘거나 전혀 찝찝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은 눈물을 멈춰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시며 욱신거렸다.
‘공작 성을 떠나면서 내 마음속에서 당신을 말끔히 지워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보고 싶었어, 록사나.”
깊은 애정과 갈망이 담긴 눈빛으로 아스테리온이 상체를 숙였다. 그러곤 넓은 가슴 안으로 그녀를 깊숙이 끌어안았다.
불시의 공격에 록사나가 눈을 끔벅거리는 사이 그의 머리가 그녀의 가녀린 어깨 위에 얹어졌다.
맞닿은 가슴 부위를 통해 아스테리온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급하게 달려온 사람처럼 빠르면서도 힘차게 뛰는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 사람의 심장도 이렇게 뛸 수 있구나.’
그리고 신기했다. 결혼 생활 내내 그녀에게 늘 얼음같이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의 모습들이 떠올라서 더욱 그러했다.
물론 이혼 후에는 그녀에게 매달리며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고 있지만 말이다.
록사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이 이상해지고 몸이 점점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의식하고 나니 침대 위에서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자세도 몹시 신경이 쓰였다. 엄밀히 따져 말하면 아스테리온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덮친 것이지만.
록사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으아.”
갑작스런 움직임에 목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소리는 제대로 된 말이 되지 않은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목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려던 그녀의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곧바로 상체를 세운 아스테리온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뜯어말렸다. 그가 자신이 더 아픈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록사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너무 오랫동안 목을 사용하지 못해서 많이 아플 거야.”
그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인 록사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에메랄드빛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가 얼마나 오래 잤기에 그러지?’
꿈을 매개로 한 세상에서 정령계에 오래 머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녀의 체감상으로는 하루 정도였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령계와 인간계의 시간의 흐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검은 기운에 잠식되며 졸음이 몰려왔던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기껏해야 며칠이었을 거고 길어 봤자 일주일 정도 누워 있었겠지.’
그사이 아스테리온이 협탁에 준비되어 있던 컵에 물을 쪼르르 따랐다.
록사나의 등과 머리를 살짝 들어 올려 팔로 받치고는 그녀의 입가에 물컵을 기울여 주었다.
록사나가 물을 한 모금씩 받아 넘겼다. 수분이 들어가자 메마르고 까끌거려 내내 아프던 목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으며 한결 편해졌다.
물을 다 마시자,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시 눕혀 주었다.
록사나가 눈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아스테리온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로웰 후작저에 갇혀 있던 이종족들을 모두 무사히 구출했는지, 이에 대한 후작의 반응이나 대처는 어떤지, 현 정세와 함께 그녀가 챙겨야 할 일들의 진척 상황이라든지.
특히 이종족을 탈출시키는 일이 실패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가장 염려가 되는 부분이었기에 꼭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록사나가 입 모양으로나마 말을 걸었다.
이종족들은요?
“걱정하지 마. 무사히 다 구출했어.”
그녀의 입 모양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낸 아스테리온이 화답했다.
록사나의 얼굴에 곧장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더 묻고 싶었지만 우선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잠시만 기다려. 지금 당장 알렉을 부를게.”
몸을 막 일으키려다가 아스테리온이 다시 엉덩이를 침대 위에 붙였다.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록사나가 왜 그러느냐는 물음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난 2주간 밤이나 낮이나 간절하게 그리던 싱그러운 여름을 닮은 녹음이었다. 이를 올곧게 마주한 아스테리온의 심장이 금세 울렁거렸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기꺼운 현실에 감사하며 그의 가슴은 격하게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록사나가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본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감정을 겨우겨우 추슬렀다.
“당신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무사히 깨어나 줘서 고마워.”
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축 처졌고, 록사나는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녀가 그와 맞닿아 있는 손의 한 손가락을 까닥였다. 미약한 움직이었지만 괜찮다는 그 다정한 신호가 아스테리온에게 전해졌다.
록사나의 마음 씀씀이에 서늘하던 그의 심장에 온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봄이 찾아들었다.
아스테리온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잠시 후, 아스테리온이 팔을 쭉 뻗어 침대 머리맡에 설치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이를 신호로 얼마 안 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쿵쾅쿵쾅 어지럽게 들려왔다.
발이 빠른 벨루카를 선두로 알렉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벌 떼처럼 우르르 들이닥쳤다.
록사나가 깨어난 것에 대해 모두가 기뻐하며 왁자지껄 격한 환영 인사와 안부를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가장 우선시해야 할 알렉의 록사나 검진이 뒤로 미뤄지는 사태가 발생했지만 이 또한 어찌 되었든 무사히 이루어졌다.
알렉은 목의 회복에 좋은 약과 건더기 없는 수프를 시작으로 몸을 보할 음식 위주로 섭취하고, 운동을 병행하도록 하는 처방을 내렸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록사나에게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다.
록사나는 몸이 좀 굳고 목이 아프다는 것을 빼고는 별달리 불편한 곳이 없었다. 궁금증과 현 상황에 대해서 빨리 알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강렬한 눈빛을 띤 채 입 모양으로 열변을 토하며 괜찮다고 우겼다.
당연히 아스테리온을 필두로 모두가 그녀를 강력하게 뜯어말렸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조차도.
록사나는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귀로만 들으면 된다는 그럴듯한 항변을 내놓았다.
이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테리온을 쳐다보며 록사나가 환한 미소를 지음으로써 모든 논쟁이 종료되었다.
묽은 수프를 한 그릇 뚝딱 해치운 록사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그녀의 바람대로 각종 상황과 보고를 들었다.
‘내가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었네.’
벨루카와 그녀를 깨우기 위해 각종 위험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한 자신과 아스테리온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록사나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록사나는 렉시아가 정체불명의 약의 영향으로 폭풍 성장을 했다는 것과 테오도르가 습격을 당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어린아이들이 무슨 죄야! 앞으로 해결하고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이 태산이구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낀 록사나가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들을 마음속으로 하나둘씩 차근차근 정리했다.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다.
한편 몸속의 검은 기운을 없애고 자신을 깨우는 데 있어서 일등 공신이 된 벨루카의 활약상을 들었을 때는 팔불출 부모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뭐, 내가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오구오구, 기특한 내 새끼.’
게다가 검은 돌과 하나 남은 정령석을 이용해서 동굴과 연결되는 통로, 그러니까 고대에나 존재했다던 게이트를 만들어 내다니 놀라웠다.
자신이 동굴과 이종족 실험 시설을 연결했을 때는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깊게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거 잘만 이용하면 캠든 성이랑 다른 곳과 연결하는 게이트를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록사나가 침대 주변에 널려 있는 검은 정령석 무더기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으로 록사나는 자신이 꿈속에서 겪은 일들을 아스테리온과 측근들에게 공유했다.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기에 정령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유출될 걱정은 들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와 논의가 오고 갔다. 그러다 보니 늦은 밤이 되어서야 록사나의 고집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록사나는 뒤늦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얼마 안 있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피로가 풀리면 깰 잠이었지만 아스테리온은 또다시 그녀가 긴 잠에 빠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잠든 록사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보던 벨루카가 참지 못하고 아스테리온의 귓가에 으르렁댔다.
- 남자 인간, 눈이 토끼야. 이럴 거면 그냥 록사나 옆에서 누워서 자! 남자 인간이 쓰러지면 우리 모두 손해라고.
빨갛게 충혈된 아스테리온의 눈을 본 벨루카가 주둥이로 아스테리온의 등을 툭 밀었다.
아스테리온이 못 이기는 척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렇게라도 록사나의 옆자리를 차지하자, 그의 가슴속에 단단히 박혀 있던 불안감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 움큼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벨루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들의 발치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커튼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온 햇살이 록사나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록사나가 스르르 눈을 떴다.
‘음, 왜 이렇게 갑갑하지?’
몸을 옆으로 돌리려던 록사나가 묵직한 감각을 느끼고는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자신의 몸을 두 팔로 단단히 옭아맨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한 침대에 아스테리온과 함께 누워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 것도 잠시, 록사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녀의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길고 풍성한 속눈썹, 오뚝한 콧날을 따라 탐스런 과일처럼 붉디붉은 입술에 시선이 가닿았다.
‘심장에 좋지 않아도 안구 정화에는 탁월하네.’
록사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가 슬며시 한 손을 들어 올려 덧그리듯 그의 눈가와 입술 부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혹여나 그가 깰까 봐 눈치를 살살 살폈다. 미동이 전혀 없자, 그녀의 손길은 더욱 대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