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감사 인사는 케이크로 받을게 】
벨루카는 본격적으로 정령석 씨앗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정령석 씨앗 셔틀이 된 것이다.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의 측근들은 벨루카가 정령석 씨앗을 수레에 한가득 싣고 돌아올 때마다 열렬한 환호성을 보냈다.
- 나 환영하는 거 맞지?
“언제든 환영이야.”
정령석 씨앗을 수레에서 꺼내느라 바쁜 사람들을 대신해서 아스테리온이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벨루카의 입이 절로 헤벌쭉 벌어졌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훗날 자신이 한 이 말을 가슴을 치며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언제든’이라는 중요한 한 단어 차이로 말이다.
그때 다른 사람이 트롤리를 밀며 벨루카의 곁으로 다가왔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벨루카가 코를 벌름거렸다.
“짜잔! 여기요, 벨루카 님. 많이 힘드실 텐데 당 보충하셔야죠.”
아이린이 딸기 케이크를 착 받쳐 들고는 그것을 벨루카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러자 벨루카가 바로 그 자리에서 한입에 꿀꺽 삼켰다.
“그렇게 급하게 드시면 체하세요. 이번에는 천천히 드셔야 해요?”
- 알았어, 아이린.
아이린의 손에 시선이 꽂혀 있던 벨루카가 단번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벨루카의 행동으로 확답을 받은 아이린이 그제야 새 케이크를 앞에 놓아 주었다.
현재 아스테리온이 자리를 잠시 비운 상태라 벨루카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제 아이린에게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척하면 척이었다.
벨루카는 아이린의 눈치를 살짝살짝 살피며 딸기 케이크를 조금씩 나누어 베어 먹었다.
먹을 것을 챙겨 주는 사람 앞에서는 위대한 늑대 정령도 한낱 약자이자 순한 양에 불과했다.
“이제 한 번만 다녀오시면 되시는 거죠?”
- 응.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더 맛있는 걸로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이린이 하얀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그녀는 벨루카가 미처 스스로 닦아 내지 못해 하얀 크림이 묻어 있던 입 주변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혼자서 정령석 씨앗을 나르는 것에 대한 그녀 나름의 감사 표현이자, 서비스 정신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 * *
록사나의 침실에 모인 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대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침대 중앙에 자리한 록사나와 벨루카에게 고정된 채였다.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벨루카가 정령의 힘을 끌어올렸다. 록사나의 몸에 깃든 검은 기운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벨루카가 정령의 힘을 가느다란 실처럼 뽑아내 록사나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벨루카의 털색과 같은 은빛의 기운이 서서히 록사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면서 사라져 갔다.
이를 지켜보는 아스테리온은 입 안이 바짝 마르며 속이 탔다. 그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벨루카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아스테리온은 온 신경이 쭈뼛 섰다.
벨루카와 마주 닿지 않은 록사나의 반대편 손끝에서 희끄무레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각자 두 눈을 홉떴다. 그들의 시선이 검은 기운에 가닿았다.
허공에 떠오른 끈적끈적한 검은 기운이 이리저리 방황하듯 넓게 퍼져 나가는가 싶더니 침대 주변에 쌓여 있는 정령석 씨앗 안으로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물에 검은 잉크가 한두 방울 떨어지듯이 투명한 정령석이 탁한 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아스테리온의 푸른 눈에 가득 서려 있던 긴장감이 한 줄기 햇살을 만난 빙하처럼 서서히 녹아내렸다.
잔뜩 굳어 있던 어깨도 조금은 풀어졌다.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혹여 부정이라도 탈까 봐 다들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록사나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내 그 빛깔마저 서서히 옅어져 갔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검은 기운의 흐름이 갑자기 뚝 끊겼다.
한편 투명하던 정령석 씨앗들은 완전히 검은빛을 띠며 반짝거렸다.
벨루카는 이 모든 변화를 감지했으나 마지막까지 힘 조절에 집중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록사나의 몸 안에 검은 기운의 잔재가 한 톨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탐색했다. 그런 벨루카의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벨루카가 록사나의 손 위에 얹어 놓았던 자신의 앞발을 떼어 냈다.
간절한 표정을 한 아스테리온과 사람들의 시선이 벨루카에게로 집중되었다.
- 검은 기운이 모두 제거되었어.
“정말이지?”
아스테리온이 벨루카의 말에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이어서 그는 다른 이들에게 벨루카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벨루카 님, 거짓말 아니죠?”
“그런데 왜 안 깨어나시는 거죠?”
아이린은 제발 이 상황이 꿈이 아니기를 바랐고, 성격 급한 에이글은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 내 케이크를 걸고 맹세하는데 록사나의 몸에 남아 있는 검은 기운은 이제 하나도 없어. 바로 안 깨어나는 건…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지.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 봐. 반드시 오늘 안으로 깨어날 거야.
벨루카가 호언장담했다. 아스테리온이 이 기쁜 소식을 한 문장도 빠뜨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벨루카 님, 감사합니다.”
“휴우, 다행이군요.”
“역시 벨루카 님께서는 위대하신 정령이십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르셀 경과 알렉, 트레버의 얼굴이 밝아지며 금세 화색이 감돌았다. 마커스 경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굳어 있던 그의 표정도 풀어져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커다란 손을 뻗어 벨루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벨루카는 그의 손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머리를 더 들이밀었다.
“수고했어, 벨루카. 그리고 고마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속삭이는 아스테리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살며시 떨렸다.
최근 며칠간 그와 사람들이 벨루카에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벨루카가 해 준 일들은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아스테리온의 따뜻한 손길이 멈출 줄을 몰랐다.
벨루카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몽글몽글해졌다. 낯간지럽다는 것을 생전 처음 느껴 보며 고개를 살짝 모로 틀었다.
- 모든 감사 인사는 케이크로 받을게.
“푸하하핫.”
사람들이 너도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지극히 벨루카다운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 * *
다른 모든 사람들이 록사나의 방을 떠났다. 힘을 써서 허기를 느낀 벨루카 역시 케이크를 먹기 위해 자리를 뜬 상태였다.
오직 아스테리온만이 홀로 남아 아직 깨어나지 않은 록사나의 곁을 지켰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걸터앉아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후 그의 시선이 아래로 옮겨 갔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바스라질 것 같은 록사나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쓰러진 이후로 내내 차갑기만 하던 그녀의 손에서 봄 햇살보다 더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몹시도 반갑고 기꺼웠다.
주인을 잃고 서서히 죽어 가던 그의 심장이 겨우 제 속도를 찾으며 정상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줘서 고마워, 록사나.’
아스테리온은 속으로 울컥했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난 2주간 록사나를 이대로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얼마나 자책했던가.
그녀를 로웰 후작저에 데리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가겠다고 했어도 어떻게든 뜯어말렸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를 한다 한들 돌이킬 수 없었다.
시시각각 심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느다란 희망만을 겨우겨우 붙들고 있는 것뿐.
하늘이 그를 가엽게 여겼는지 주변 사람들과 벨루카의 도움을 받아 다행스럽게도 록사나를 깨울 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방법마저 찾지 못했다면 그는 진즉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스테리온이 한 손을 들어 올려 록사나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세상 가장 귀한 것을 만지듯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록사나, 지금 내 말 들려? 있지……. 오늘을 넘기지 말고 눈을 떠 주면 안 될까? 제발, 부탁이야……. 그대가 예쁜 그 눈으로 날 다시 바라봐 줬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어.”
중간중간 목이 메어 와 끊어지듯 이어지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손을 끌어 제 뺨을 기대었다. 그녀와 보냈던 시간들이 머리와 가슴속으로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어린 그녀를 처음 만나고, 재회하고, 그녀에게 청혼했던 어느 여름날, 그녀가 엘프 절맥증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그들의 결혼식, 그리고 그들이 이혼하던 날 등.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며 그가 했던 모든 선택들은 그저 저열한 제 욕심을 채우기 급급했던 행동들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뒤늦게라도 바로잡으려고 했으나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들로 인해 어느 것도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에게 세웠던 벽에 금이 가고 있음을 조금씩 느끼면서 한발 가까워지나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내내 그를 좀먹었다. 그녀가 오늘 깨어날 거라는 말을 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최후의 보루와 같이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시여, 부디 그녀를 무사히 제 곁으로 보내 주소서.’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내리 숙였다. 록사나의 반듯한 이마에 그의 붉은 입술이 낙인처럼 내려앉았다가 잠시 후 마지못해 떨어졌다.
그 찰나였다. 기다란 검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며 꿈틀거렸다.
단숨에 록사나의 변화를 감지한 아스테리온이 상체를 곧바로 세웠다.
록사나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는 그의 눈빛은 어두컴컴한 동굴에 빛이 내리쬐듯 기대감과 떨림으로 반짝거렸다.
“록사나, 내 말 들려? 들리지?!”
그가 저도 모르게 힘을 주며 구명줄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더욱 간절하게 록사나의 손을 붙들었다.
그때였다. 록사나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순식간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희열에 넘쳤다. 그는 록사나가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맞아.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다른 데 헤매지 말고 곧장 여기로 와. 제발, 내게로 와 줘. 그대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아스테리온은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속마음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절실하게 실감했다.
막 날갯짓을 배우는 아기 새처럼 록사나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원하면서도 아름다운 짙푸른 녹음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아!”
경탄에 가득 찬 탄성과 함께 아스테리온이 두 손으로 록사나의 얼굴을 감쌌다. 작디작은 얼굴이 그의 손안에 단번에 폭 들어왔다.
간신히 눈을 뜬 록사나가 눈꺼풀을 반복해서 여러 번 깜박거렸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하던 눈의 초점이 돌아오며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아스테리온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에 환희와 고통 비슷한 것이 뒤섞인 가운데 투명한 물기가 가득 어린 채였다.
놀란 록사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왜 울고 있는 거야?’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애절하고 절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아스테리온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록사나는 눈을 뜨기 전의 꿈속 상황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