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알렉님, 벨루카 님은 혼자만 일하시게 됐는데도 너무너무 좋아하시는데요.”
“혼자 일하시는 게 편하고 좋으신 모양이군.”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지라 이 상황이라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흠.”
아스테리온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잠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다시 정돈되었다.
“벨루카, 너 혼자 열 배나 되는 정령석 씨앗을 옮겨 와야 되는데 괜찮을까?”
이에 벨루카가 입이 찢어질 듯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 당연히 괜찮지! 그리고 정령석 씨앗 아니고, 아기 정령석.
“그래, 아기 정령석.”
명칭가지고 꼬투리를 잡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아스테리온은 이를 쉽게 수긍했다.
어찌 되었든 이 이후로 특별한 다이아몬드는 ‘아기 정령석’과 ‘정령석 씨앗’이라는 두 개의 명칭으로 혼용되어 불리게 된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정령석 운반에 벨루카 혼자 독박을 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몹시 반긴다는 점이다.
다른 것은 자신들이 벨루카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벨루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말자고 굳게 약속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이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고, 실전은 실전이었다.
벨루카가 사람들에게 살갑게 다가갔다.
- 다들 너무 슬퍼서 그러는구나. 울지 마. 그만 뚝. 어서 뚝 해!
“푸읍. 큭. 크크큭. 흡.”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에이글이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았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툼한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흘러나오는 괴이한 자신의 웃음소리까지는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
- 저런. 다 큰 인간들이 왜 이래.
친절한 정령 벨루카는 앞발을 들어 마커스 경과 마르셀 경의 어깨를 친히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런 거 아, 아닙니다.”
마커스 경이 이를 악물며 위험 수위에 다다른 마르셀 경에게 강한 눈빛을 보냈다.
‘참아! 무조건 참아!!’
거의 떼굴떼굴 구를 것 같은 지경에 이른 것 같아지자, 마커스 경이 눈물을 머금고 최후의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퍽!
냅다 마르셀 경의 등짝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친 것이다. 아주 효과가 좋아서 마르셀 경은 진짜로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이 난장 속에서 통역이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아스테리온은 숨이 끊어질 듯, 때로는 숨이 막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통역을 이어 나가며 임무를 완수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니까 말이다.
한차례 거대한 폭풍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체면도 잊은 채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밤은 한참 늦었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는데도 체력을 너무 소모해서 다들 기운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자기 침실로 돌아가서 쉬는 것이 더 편할 텐데 이때까지도 누구 하나 방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록사나의 상태를 잠시 살피고 온 아스테리온이 벨루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벨루카는 정령석을 이용해 문을 열어 통로를 연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 부분으로 나뉘어 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을 열 열쇠인 정력석이 맨 앞에 놓였고, 조금 떨어진 그 뒤에는 검은 돌 조각이 위치해 있었다.
마지막 부분은 창문이 없는 널따란 벽 쪽에는 정령석 씨앗이 차곡차곡 쌓이며, 드나들 수 있도록 사각형의 문의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내내 벌러덩 드러누워 있던 에이글과 마르셀 경, 마커스 경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적극적으로 벨루카를 도왔다.
금세 커다란 문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한정된 정령석 씨앗으로 만든 문은 일반적인 문과는 다르게 폭이 좁고 높았다.
이것은 직접 정령석 씨앗을 옮기는 벨루카가 드나들기 편하도록 최대한 그의 몸에 맞춘 전용 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다 됐다, 남자 인간.
문이 되는 벽 앞에 서 있던 벨루카가 몸을 돌려세웠다.
“고생했어, 벨루카. 자네들도.”
아스테리온이 준비를 마친 벨루카와 이를 도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 그럼 지금 시작한다.
“아니, 내일 오후부터 시작하자.”
- 왜?
고개를 가로젓는 아스테리온을 보며 벨루카가 의문을 드러냈다.
그라고 왜 지금 당장 시작하고 싶지 않겠는가.
지금도 그의 심장은 시시각각 타들어 가고 있었고, 마음 같아서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일의 효율성 등을 따져봤을 때 한 박자 쉬어 갈 필요성이 있었다.
“다들 지친 상태이고 밤도 너무 많이 늦었어. 너도 다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잠시 쉬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 그렇군.
아스테리온이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말까지 하자, 쑥스러움이라는 걸 거의 처음 느껴본 벨루카가 고개를 슬쩍 모로 틀었다.
“게다가 필요한 정령석 씨… 아기 정령석은 지금의 열 배나 되지. 네가 그것을 입으로 한두 개씩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물어 나르는 것보다는 한 번에 많이 옮기는 것이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고, 네 수고로움도 덜할 거야. 그걸 가능하게 할 운반 수단을 만들 시간도 필요하고 말이야.”
- 맞는 말이다. 그래, 내일 오후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정령석 씨앗 운반은 하루 미뤄졌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배정된 침실로 향해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벨루카는 마지막까지도 록사나의 침실을 떠날 수 없다며 강하게 고집을 부리면서 버텼다.
하지만 검은 돌 조각과 한 방에 계속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내일을 위해 푹 쉬어야 한다는 설득에 어쩔 수 없이 겨우 침실을 나섰다.
지금까지 검은 돌 조각을 지니고 있으면서 록사나와 같은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아스테리온은 또 다른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뒤늦게라도 벨루카에게 이질적인 기운이 깃들게 된다면 록사나를 깨울 수 있는 일이 영영 불가능해질 것 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벨루카는 반강제로 록사나의 옆방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 * *
모두가 자리를 뜨면서 적막이 찾아들었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의 침대 바로 옆에 높여 있는 장의자에 피로에 찌든 몸을 기대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곯아떨어질 것 같은 몸 상태였지만 바로 잠이 오지는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눈앞에 고지가 점점 가까이 보이게 되면서 긴장감과 기대감이 더욱 배가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휘장이 살짝 걷어져 있는 상태라 반듯하게 누워 있는 록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록사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불러보았다. 속으로는 수도 없이 하도 많이 불러서 만약 이름도 닳는다면 그녀의 이름은 지금쯤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을지도 모른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얼굴을 향해 왼쪽 팔을 길게 쭉 뻗었다. 그의 손끝은 그녀에게 가 닿지 못했다. 손톱만 한 틈을 남겨 둔 채로.
마치 두 사람의 관계 같은 틈이었다. 딱 그만큼까지만 록사나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아스테리온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뻗었던 왼손을 거둬들이고, 이번에는 오른손을 쭉 뻗었다.
그제야 록사나의 부드러운 뺨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조금 더 팔을 뻗어 한쪽 뺨을 폭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손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촉과 미약한 온기가 수선거리던 그의 마음을 차츰 진정시켜 주었다.
“내일 오후부터 그대를 깨울 정령석 씨앗을 모두 운반해 올 거야. 이 정도면 잠 많이 잤잖아, 그치?”
아스테리온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건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는 왜 이름이 정령석 씨앗인지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내 생각에는 빠르면 모레, 아니면 아마 그다음 날 그대가 눈을 뜨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자신의 바람이 현실이 되도록 소망을 가득 담아 말했다.
“정령석 씨앗을 옮기는 건 벨루카가 직접 다 하기로 했어. 그 늑대 녀석이 정령석 하나를 꿍쳐 놔서 다이아몬드 동굴과 통로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어. 참, 다행이지?”
그렇게 된 이유나 방법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 녀석의 공이 적지 않군.’
검은 돌 조각을 챙긴 것이라든가, 록사나를 깨울 방법을 찾아낸 것이라든가. 일등 공신이 아닐 수 없었다.
아스테리온은 괜스레 심술이 삐죽 솟아났다.
“그대가 안 볼 때 나만 보면 맨날 못 잡아서 먹어서 안달인 거 그대는 모를 거야. 당연하지. 그대 앞에서만 세상 얌전한 척하니까 말이야.”
어쩌다 보니 고자질쟁이가 되었다.
“뭐, 이번 공은 깔끔하게 인정해.”
이내 민망해진 그가 뒤끝 없는 사람인 척했다.
“그런데 벨루카는 어떻게 정령석으로 통로를 여는 방법을 아는 것일까?”
헤어지기 전까지 벨루카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록사나에게 물었다.
캠든 영지의 다이아몬드 동굴에서 록사나가 통로를 여는 것을 몇 번씩 옆에서 목격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변형해서 통로를 여는 방법이라든가, 이질적인 기운을 옮겨 담는 그릇에 관련된 정보는 결코 갓 태어난 아기 정령이 가진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정령과 관련된 지식들을 원래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말이 되기는 하지.’
이내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털어 내며 그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으로 치워 두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록사나를 깨울 수만 있다면 벨루카가 그런 것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대수롭지 않았다.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리다 보니 다소 긴장이 풀린 아스테리온의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져 갔다.
여명이 차츰 밝아 오는 가운데 불편한 자세에서도 아스테리온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거의 2주 만에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게 되었다.
* * *
다음 날 오후, 사람들이 침실에 다시 모였다.
벨루카가 정령석, 검은 돌 조각, 정령석 씨앗들을 이용해 문을 생성하고, 다이아몬드 동굴까지 갈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동굴을 향해 건너간 벨루카가 입에 정령석 씨앗을 몇 개를 물고 돌아오자, 다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 이후로는 모든 과정이 막힘없이 착착 진행되었다. 먼저 단시간에 특수 제작된 벨루카 전용 수레가 몸에 곧장 장착되었다.
수레는 문 크기에 맞춰져 일반적인 수레와는 조금 다르게 좁고 높았다.
그리고 벨루카 혼자서 정령석 씨앗을 수레에 싣고 끌어야 했기에 수레를 끌거나 내려놓기가 용이하도록 튼튼한 줄을 설치했다. 혼자서 목에 걸거나 벗기 쉬운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