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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76)화 (176/214)

176화 

아이린은 아스테리온이 꼼수를 부리지 못하도록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을 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하겠다. 약속하지.”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아이린을 보며 아스테리온은 기가 팍 죽었다.

그의 기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록사나 한 명뿐이었는데, 오늘부로 한 사람이 더 늘어났다.

아이린이 시선을 거두자, 그제야 아스테리온은 숨을 편하게 내쉴 수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아이린에게 구박받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본 벨루카가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꽉 막힌 남자 인간과는 달리 아이린이 자신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주었다는 생각에 두 눈을 반짝이면서 그녀를 향해 복슬복슬한 꼬리를 연신 흔들었다.

이후 아스테리온은 아이린의 감시하에 토씨 하나 들리지 않게 벨루카의 말을 통역했다.

- 이거로 하자! 그럼 모든 문제 해결이야!

아이린의 입장에서 방금 전에 한 말은 벨루카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저도 모르게 그냥 던져 본 말이었다.

‘벨루카 님, 그걸로는 정령석 씨앗 하나도 못 가져와요.’라는 말이 아이린의 목 끝까지 솟구쳤다가 턱 걸렸다.

그로 인해 입은 자꾸 근질거리고, 딱 울고 싶은 심정이 든 아이린이 양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도 모르고 한껏 의기양양해진 벨루카가 주절주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 쯧쯧. 너희 인간들은 쉬운 방법을 두고 도대체 왜 그렇게 귀찮고 어려운 방법을 쓰는 거야?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벨루카가 사람들을 쓰윽 훑어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 이 벨루카 님을 보라고! 이 정령석 하나만 있으면 하루 만에 아기 정령석을 가져올 수 있다, 이 말이야.

한껏 고개를 치켜들며 뻐겨 대는 벨루카를 보며 아스테리온과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정령석으로 정령석 씨앗을 가져올 수 있다고?! 정말이야?”

아스테리온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남자 인간?

“그럼 혹시…….”

벨루카가 아스테리온의 말을 탁 가로챘다.

- 록사나가 예전에 했었던 것처럼 이 정령석으로 아기 정령석들이 있는 다이아몬드 동굴과 연결하면 된다.

“정말입니까?”

“벨루카 님, 진짜죠?”

- 진짜라니까! 이 사람들이 말이야, 이 벨루카 님의 말을 안 믿는 거야? 이거 엄청 서운한데.

그때였다. 꼬리를 불만스레 흔드는 벨루카의 목을 아스테리온이 와락 끌어안았다.

“벨루카!”

- 어어? 남자 인간, 왜 이래? 징그럽게.

심지어 벨루카의 볼에 자신의 볼을 맞대고 열렬히 비비는 아스테리온을 쳐다보며 사람들은 기쁨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꼈다.

“허,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거였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트레버와 마르셀이 주거니 받거니 했다.

“우리 그동안 뭘 한 건지…….”

“열심히 삽질했죠.”

마커스 경의 좌절에 아이린이 한술 더 떴다.

“진작 벨루카 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맞는 말이오.”

에이글의 말에 알렉이 맞장구를 쳤다.

자신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늑대 정령의 콧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 남자 인간, 이제 그만해라.

“어, 그래.”

벨루카의 단호한 제지에 아스테리온이 후딱 양팔을 풀고는 몇 발자국 뒤로 군말 없이 물러났다.

“괜찮다면 다이아몬드 동굴하고 연결하는 방법을 자세히 좀 말해 줄 수 있을까?”

벨루카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아스테리온이 힘이 쫙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테리온의 정중해진 부탁에 벨루카가 고개를 더욱 빳빳이 세웠다. 이렇게 기고만장해진 벨루카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벨루카가 바닥에 몸을 낮춰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도 모두 정령을 중심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 나는 지금 록사나가 가졌던 정령의 힘을 많이 받아들인 상태야. 그래서 록사나가 정령석을 이용해 다른 곳과 연결을 했던 것을 이제는 나도 할 수 있어.

“자라느라 고생 많았다.”

뭔가를 기대하는 벨루카의 눈빛에 아스테리온이 앞발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벨루카가 새초롬한 눈빛을 했다가 고개를 살짝 틀었다.

- 그런데 이 정령석 하나만으로는 통로를 열기가 힘들어.

부정적인 말을 한 벨루카가 사람들의 안색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다들 놀라거나 걱정을 안 하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리다가 혹시나 하고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벨루카는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살짝 당황을 했고, 늑대 정령의 마음을 눈치챈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입을 꼭 악물었다.

‘드러내 놓고 웃었다가는 미운털 박힐라.’

그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 건 이제는 벨루카를 전적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부정적인 상황을 말했지만 분명 해결책이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새를 참지 못한 벨루카가 술술 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스테리온은 벨루카가 무척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이었다.

- 거기 다이아몬드 동굴에도 회색 돌이 있었잖아. 통로를 연결하려면 그런 돌이 여기에도 꼭 필요해.

그러더니 풍성한 가슴팍 털 사이 어딘가에서 짜잔 하고 무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이밀고서는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뒤집어서 활짝 펼쳐진 벨루카의 앞 발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기 주먹보다 조금 큰 검은 돌 조각 같은 것 하나가 놓여 있었다.

벨루카의 발바닥이 워낙 커서 그냥 보면 검은 돌 조각이 방울토마토처럼 보이는 착시 효과를 일으켰다.

“이건! 로웰 후작의 지하 감옥에 있던 검은 돌의 조각인가?”

검을 돌 조각을 바라보는 아스테리온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 맞아. 역시 눈썰미 좋네, 남자 인간.

“선견지명이 있었군.”

벨루카의 입이 절로 귀에 걸렸다.

- 그래! 그러니까 이 몸의 선견지명을 찬미할 수 있는 영광과 기회를 내 친히 주도록 하지.

한껏 신이 난 늑대 정령의 화제가 잠시 옆으로 샜다. 아스테리온은 이를 타박하는 대신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늑대 정령은 지혜로운 것 같아.”

입에 기름칠이라도 잔뜩 한 듯 아부가 아주 술술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자괴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 맞아! 남자 인간이 날 제대로 볼 줄 아네.

입가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벨루카를 보며 아스테리온이 물이 흐르듯이 화제를 돌렸다.

“지혜로운 벨루카에게 생각이 있겠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군.”

- 뭔데? 어서 말해 봐.

“다이아몬드 동굴에 있는 것보다 크기가 너무 작은데 말이야. 이걸로 통로를 생성하는 데는 전혀 이상이 없는 건가?”

다이아몬드 동굴의 회색 돌은 어른 키만 했고, 그거에 비하면 벨루카의 손에 든 검은 돌 조각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 좋은 질문이야. 다이아몬드 동굴에 있는 건 회색이고, 이건 검은색이잖아. 이게 크기는 작아도 담긴 힘은 비슷해. 그래서 통로를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어.

벨루카의 설명에 아스테리온도, 다른 사람들도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벨루카 님은 지혜로우세요.”

아이린이 벨루카를 치켜세웠다. 에이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이에 동참했다.

기분이 좋은지 벨루카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러면서 설명을 이어 갔다.

- 다만 문제가 하나 더 있어. 아닌가, 두 개라고 해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몹시도 명랑한 울음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벨루카 님, 문제라고 하시는데 문제가 전혀 아닌 거 같습니다.’

알렉이 조용히 허허 웃으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벨루카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또 있었다.

‘이번에도 해결책이 있는가 보군.’

트레버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한 개든 두 개든 상관없겠군.’

아스테리온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다들 벨루카의 화법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에이글이 귀를 기울였다.

“벨루카 님, 그 문제라는 것이 뭡니까?”

- 통로가 만들어지면 아마 문이 여러 개가 나타날 거야. 그중에서 다이아몬드 동굴 문을 찾아야 해.

“여기랑 다이아몬드 동굴이 바로 연결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래서 혹시라도 착각해서 문을 잘못 열면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건가요?”

- 맞아, 아이린. 하지만 이것도 걱정하지 마! 인간들은 어렵겠지만 다이아몬드 동굴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나는 찾아낼 수 있어.

“다행이네요. 역시 벨루카 님이세요!”

- 헤헤헤. 내가 좀 멋있긴 하지.

“마지막 남은 하나는 뭐지?”

아스테리온의 물음에 벨루카가 다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건 인간들이 나와 함께 문을 넘어갈 수 없다는 거야. 원래는 가능한데, 이게 너무 작아서 지금은 통로를 무사히 연결하고, 한 명만 왔다 갈 수 있는 정도라서 말이야.

사람들이 별다른 반문 없이 벨루카의 말에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다이아몬드 동굴의 회색 돌을 봤던 이들은 그 어마어마한 크기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 힘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내 벨루카가 짐짓 미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 아까 말했듯이 여러 개의 문들 중에 다이아몬드 동굴 문을 찾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넘어가야지. 너무 실망들 하지 마.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아스테리온은 정령석 씨앗을 옮겨 오는 데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고, 무사히 연결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반면 일부 다른 사람들은 ‘단 한 명만’, 그것도 ‘벨루카 혼자만’ 통로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벨루카 님만이 문을 왕래하실 수 있다면 정령석 씨앗을 이리로 옮겨 오는 것도 벨루카 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 그렇지. 마커스 경도 똑똑하군.

활짝 웃으며 긍정하던 벨루카가 갑자기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면서 앞발을 들어 올려 가렸다.

‘다들 그곳에 가고 싶을 텐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되지.’

벨루카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정령의 문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벨루카의 잘못된 오해였다.

모두가 록사나를 위해 정령석을 빨리 챙겨 오고 싶어서 가고 싶은 것이지 일을 하러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마르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되면 벨루카 님 혼자만 일하시겠군.’

‘그러게 말이야. 이거 하고 싶어도 상황이 안 도와주네 참. 이걸 어쩌나.’

그들의 입꼬리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애써 웃음을 참느라 파르르 떨리기도 했다.

어떤 이는 제 팔과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웃음이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말이다.

아이린이 바짝 몸을 기울이며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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