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뭐 하러 골치 아프게 그런 걸 해?
아스테리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진귀하고 희귀한 것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봐 왔지만, 세상 다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 늑대는 그도 처음이었다.
“당연히 안전하게 가져오려고 하는 거다.”
- 그러니까 골치 아프게 왜?!
청개구리라도 된 것처럼 벨루카가 아스테리온의 속을 박박 긁었다.
얄미운 벨루카의 말과 행동에 아스테리온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벨루카는 록사나를 깨울 수 있는 귀한 존재였다. 전력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네 말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절로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아스테리온은 자신만 벨루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애통하고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도움이 되기 싫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못된 말을 하고 말았다.
- 남자 인간, 지금 설마 너 나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야?! 대답해!!
벨루카가 성을 잔뜩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스테리온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지금 싸우면 안 돼.’
원래도 둘은 자주 고양이와 개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였지만 예민한 시기에는 그라도 자제하고 싶었다.
마음을 다스린 아스테리온이 아이를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벨루카, 미안하다. 방금 전에는 말이 헛나갔어. 진심이 아니야. 조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만 네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고 말았군.”
아스테리온의 사과에도 벨루카의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 흥!
삐진 벨루카가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깨어난 후 가장 잘하면서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널 무시하는 것이 아니야. 록사나를 무사히 하루라도 빨리 깨우려면 정령석 씨앗이 필요하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단축하고 무사히 옮겨 오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서로 머리를 맞대는 거고. 물론 너도 좋은 의견을 내 준다면 환영이야.”
- 그러니까!! 답답하게 왜 이걸 놔두고 머리 아프게 그런 걸 생각하느냔 말이야!
벨루카가 콧김을 풍풍 내쉬었다. 무척 강했다.
그 바람에 바로 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알렉의 머리카락 몇 가닥과 풍성한 아이린의 긴 머리칼이 거센 바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마구 흩날렸다.
잠시 후, 콧바람이 가라앉고 모두의 시선이 벨루카가 입에 문 정령석으로 시선이 쏠렸다.
“멀쩡한 정령석이군요.”
마르셀의 지적처럼 초록빛으로 진하게 물들어 있는 정령석이었다.
“벨루카 님, 그건 어디서 나셨어요?”
- 여기 있던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따로 챙겨 놓은 것이다.
그 말을 아스테리온이 친절하게 통역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불만이 한가득 서려 있었다.
‘그걸 챙길 시간에 1초라도 빨리 일어나기나 할 것이지.’
은근히 괘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현재의 아스테리온에게 벨루카는 무척이나 고마우면서도 얄미운 정령이었다.
“하나 꿍쳐 놓은 것이라는군.”
아스테리온의 말에 벨루카가 입을 쩍 벌렸다. 그 바람에 물고 있던 정력석이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절친에게 배신당해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짓는 정령을 본 사람들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한가하게 티격태격하실 거야.’
‘아까 서로 사과하고 받아들이신 것 아니었어?’
제각각 속마음을 숨긴 채였다. 목이 타고 속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남자 인간,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따위로 통역할 거야? 자꾸 그러면 당장 다른 통역사 구한다?
“나는 괜찮은데. 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네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네 마음대로 해.”
벨루카의 협박에도 아스테리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너!
분을 이기지 못한 벨루카가 한 발을 쿵 하고 굴렀다. 그러자 벽과 바닥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즉각 그 진동을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잠시 후, 흔들림이 잦아들었다.
분하지만 통역 문제로는 아스테리온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벨루카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 꿍친 거 아니다! 꼭 필요한데 사용하려고 일부러 챙긴 거다. 내가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거지.
캠든 영지에 있을 때 벨루카는 정령석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록사나에게 하나만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록사나는 벨루카의 부탁을 단칼에 거부했다.
‘자신이 예전에 다른 정령한테 들었는데 아기 때 정령석을 이용한 급속 성장은 독이 될 수 있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에 아름답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많은 정령석들을 그림의 케이크처럼 바라보아야만 했었다.
‘크~ 그때 엄청 슬퍼서 많이 울었었지.’
벨루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길을 끊지 못하고 매일 하루에 두 번은 무조건 정령석을 보러 창고로 향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와중에 정령석에 담겨 있는 록사나의 힘을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꼈다.
잠자는 일밖에는 할 게 없는 지루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자신이 성장을 하고, 깨어나는 데 있어서 정령석 하나 정도는 없어도 괜찮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힘을 다 흡수하지 않고 일부러 정령석 하나를 남겨 두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기념으로 슬쩍 하나 챙긴 것이었다.
벨루카는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밝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소멸할 때까지 평생 가슴속에 묻어 두자고 굳게 다짐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벨루카는 더욱 강하게 발뺌을 하기로 했다.
- 중요하게 사용할 데가 있어서 챙긴 거라고!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에서 괘씸했던 벨루카의 행태가 번뜩 떠올랐다.
그가 록사나의 생일날 그녀에게 달맞이꽃을 선물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벨루카가 강탈해서는 마치 자신이 준비한 것처럼 록사나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화려한 전적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은 아스테리온이 두 눈을 부릅떠 벨루카를 노려보았다.
“먼저 챙기고 나중에서야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겠지.”
너무나도 정확한 지적에 벨루카는 속으로 뜨끔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자신의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해 두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한 아이린이 소리를 빽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두 분 다 제발 좀 그만 다투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아이린의 천둥 같은 호통에 벨루카가 허공으로 들어 올렸던 두 앞발을 슬그머니 내리고서는 얌전히 겹쳐 모았다.
하지만 이대로 좋은 정령처럼 허허거리며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 내겐 중요한 일이다, 아이린. 설마 너까지 저 남자 인간 편이냐?
벨루카의 고개가 아스테리온에게로 휙 돌아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이린이 벨루카의 알아듣는 것 같은 말을 했다.
“저는 공작님 편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벨루카 님 편도 아니고요. 저는 제 편이라고 해 두죠. 아무튼 그만 좀 싸우세요. 제발요!”
물론 정말 알아들은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벨루카의 행동에서 읽혔을 뿐이었다.
내심 아이린을 통역사 후보로 점찍었던 벨루카의 원대한 꿈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두 분 다 싸움은 모아 놓으셨다가 록사나 님 일어나시면 실컷 하세요. 그때는 제가 기쁜 마음으로 참관인이 되어드릴게요.”
아이린의 잔소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로 악감정은 내려놓으세요. 두 분 다 록사나 님이 빨리 깨어나셨으면 좋겠죠?”
벨루카와 아스테리온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벨루카, 다시 한번 사과하도록 하지. 정말 미안하다. 내가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나도 모르게 작은 일에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받아들인 것 같다.”
- 흠흠, 까짓거 받아 주지, 뭐.
귀족 중의 귀족이자, 신사 중의 신사인 아스테리온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정령들 중에 자신이 가장 품위 있다고 생각하는 벨루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아이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통제 불능인 저 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록사나밖에 없었다.
‘오, 록사나 님! 제발 빨리 일어나셔서 저 둘을 어떻게든 해 주세요.’
아이린은 몸의 기운이 쭉쭉 빨리는 느낌을 받으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좋아요. 우리는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해요. 계속 서로 다투기만 한다면 배는 바다가 아니라 산으로 가고 말 거예요.”
구경꾼들은 너도나도 옳소 하며 속으로 열렬히 아이린을 응원하며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그런데 하필 에이글만 저도 모르게 진짜로 박수를 쳐 버렸다. 그것도 솥뚜껑만 한 손으로 아주 우렁차게 말이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박수라니.’
아이린이 거슬린다는 듯 에이글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에 에이글이 몸을 움찔거렸다.
옆에 있던 트레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이글의 한쪽 손목을 붙잡아 슬그머니 끌어 내렸다. 커다란 어깨가 곧장 움츠러들며 쪼그라들었다.
벨루카와 아스테리온에게로 아이린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난관이자 목표는 어떻게 안전하게, 그리고 빠르게 여기로 정령석 씨앗을 가져오느냐 하는 거예요.”
다들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은 마차와 조인족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셨어요. 그리고 벨루카 님은…….”
아이린이 어떻게 말해야 벨루카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과부하가 걸려 머리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지 않을까 할 때쯤 벨루카가 떨어뜨렸던 정령석 씨앗을 다시 주워 들었다.
“정령석 하나를 제시하셨네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눈으로 본 것이 말이 되어 아이린의 입에서 곧장 흘러나왔다.
입에 문 정령석을 흔들어 보이는 벨루카의 모습은 당당했다.
- 응!
“네, 그러시군요.”
아이린의 벨루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고는 시선을 돌려 아스테리온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가슴 안쪽에 팔짱을 끼고는 눈가에 힘을 팍 주었다.
“카일라니 공작님, 지금부터 벨루카 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제!대!로! 저희에게 통역을 해 주세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에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움찔거렸다.
“알겠다.”
“그리고 공작님 마음대로 해석하시거나 본인에게 불리하시다고 빼먹으셔도 절대로 안 돼요! 서로 오해가 쌓이면 안 되니까요. 아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