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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74)화 (174/214)

174화 

“벨루카 님과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니 차 맛이 참 향긋한 것이 정말 좋군요.”

알렉이 찻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안경 너머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맞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고 무척이나 감격스럽습니다.”

에이글은 물기 하나 없는 눈가를 두꺼운 손가락으로 쓰윽 훔쳤다.

물론 처음 벨루카가 깨어났을 때 바로 그 옆에 있었다. 게다가 록사나의 몸속 이질적인 기운을 탐색할 때도 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서로 제대로 대화를 나눌 틈이 거의 없었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기분이 한껏 고양된 벨루카가 에이글의 말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 주었다.

- 나도 그래, 독수리야. 이 생크림 케이크 정말 끝내줘, 맛이 아주 환상적이야.

그러더니 진지하면서도 비장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말했다.

- 하지만 너희들에게 내 케이크를 나눠 줄 수는 없어. 미안, 나도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거거든.

지금 벨루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스테리온뿐이었다.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아스테리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정령의 말을 통역해 주지 않았다.

한편 케이크 접시까지 싹싹 핥아 먹던 벨루카가 아쉬운 눈으로 빈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더 먹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주방에 남아 있는 케이크는 하나도 없었다.

밤이 늦어 주방 식구들은 모두 다 자러 들어갔고, 방금 벨루카가 먹어 치운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일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했다.

벨루카는 괜스레 텅 빈 정령석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때 무언가 번쩍하며 번개처럼 머릿속을 강타했다.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찾았다!’

벨루카의 입이 금세 헤벌쭉 벌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게 된 사람들이 생각했다.

‘케이크를 하나밖에 못 드셨으니 어이없어하실 만도 하지.’

‘앉은 자리에서 최소 대여섯 판은 거뜬하게 해치우시는 정령님이신데 간에 기별도 안 가셨겠군.’

‘케이크를 잔뜩 만들라고 주방에 말해야겠어.’

벨루카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 냈다는 걸 아직은 알지 못한 채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만약 알았다면 그들도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웃거나 행동했을 터였다.

아무튼 민감한 주제라 그런지 다들 주저하는 가운데 아스테리온이 화제를 먼저 입에 올렸다.

“벨루카, 정말로 네가 록사나를 무사히 깨우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지?”

목소리에서는 간절함이 듬뿍 배어 있었다.

록사나의 몸에 깃든 이질적인 기운을 제거해야만 깨울 수 있는데, 그릇이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불안감이 강하게 엄습했다.

아스테리온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런데!

- 응, 물론이야!

코에 하얀 크림이 묻어 있는지도 모른 채, 벨루카가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밝게 대답했다.

“그 말은! 그릇이 될 만한 걸 기억해 낸 거야?!”

사람들의 고개가 번쩍 들리며 일시에 벨루카에게로 향했다.

“그게 뭐지?”

- 그릇은 바로 이거야! 여기에 검은 돌의 기운을 옮겨 담을 수 있어.

자랑스럽게 텅 빈 정령석 하나를 앞발로 단단히 움켜쥐고는 사람들 눈앞에 대고 마구 흔들었다.

“정말이지?”

아스테리온이 빈 정령석 하나를 손에 들어 살펴보면서 물었다. 꿈이라면 결코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 그럼. 사실이야.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기쁨과 환희로 물들었다.

“고맙다, 벨루카.”

- 천만에 말씀을.

벨루카의 콧대가 높아졌다.

“바로 눈앞에 해답이 있었군요.”

“어쨌든 바로 방법을 찾아서 다행입니다.”

알렉과 에이글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때 순간 아스테리온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릇을 찾았으니 지금 바로 깨울 수 있나?”

- 지금 당장은 어려워.

기쁨도 잠시였다. 이번에도 아스테리온의 기대감이 무너져 내리며 어깨가 대번에 축 처졌다.

사실 그는 벨루카가 깨어났을 때만 해도 오늘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두 눈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음 잔뜩 품고 있었다.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스테리온이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그럼 언제쯤 가능하지?”

- 지금보다 이런 정령석이 더 많이 필요해.

벨루카가 주위의 텅 빈 정령석들을 둘러보았다. 안에 담겨 있던 록사나의 모든 힘을 빨아들이며 정령석은 티 하나 없이 투명하게 빛났다.

반면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는 가운데,

“정령석이 얼마나 더 필요하지?”

- 지금의 열 배 정도는 필요해.

“열 배라……. 록사나의 힘이 담겨 있던 정령석들은 여기 있었던 게 다였어. 그리고 지금은 그저 평범한 다이아몬드에 불과한 거 아닌가?”

그의 말을 통해 대화의 맥락을 파악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덩달아 어둡게 변했다.

남아 있는 정령석이 단 한 개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예전에 정령석이었던 것들은 텅 빈 투명한 돌덩이에 불과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벨루카가 빈 정령석 하나를 장난스럽게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 맞아, 엄밀히 말하면 지금 상태는 정령석이 아니긴 해. 하지만 이건 정령석이 될 수 있는 특별한 다이아몬드야.

“일반적인 다른 다이아몬드와는 결이 다르다는 말이군.”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았다.

- 응. 이건 달라! 특별해. 너희 인간들이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것들은 쓸모없는 돌덩이야.

벨루카가 커다란 두 앞발로 특별한 다이아몬드를 품 안에 그러안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 아! 아기 정령석이라고 보면 돼. 아니면 정령석 씨앗?

아스테리온이 벨루카가 말한 정령석 씨앗을 하나를 집어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육안으로는 평범한 다이아몬드와 다를 바 없었다.

“지금부터 이 특별한 다이아몬드는 앞으로 아기 정령석이나 정령석 씨앗이라고 불어야겠군.”

- 남자 인간, 그거 좋은 생각이야. 나 이거 아기 정령석이라고 부를래.

벨루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반면에 정령의 기운을 느끼는 데는 탁월하지만 벨루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에이글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고 말았다.

“정령석 씨앗이라고 하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고개를 휙 돌려 벨루카가 에이글을 째려봤다.

- 아기 정령석이야!

으르렁거리는 벨루카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마커스 경과 트레버가 소신 있는 발언을 했다.

“정령석 씨앗에 한 표입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정령석 씨앗이요.”

아이린의 뒤를 이어 손을 들어 마르셀 경과 알렉까지 모두 동의했다.

돌을 아기라고 하느니 씨앗이라고 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씨앗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아기보다는 나았다.

- 아기 정령석인데…….

사람들이 다들 정령석 씨앗에 한 표를 던지자, 승세는 금방 기울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벨루카가 꼬리를 말고는 앞발에 턱을 기대었다. 쫑긋한 두 귀는 당연히 축 처져 있었다.

그렇게 정령의 의견은 힘을 잃고 특별한 다이아몬드는 ‘정령석 씨앗’이라고 명명되었다.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벨루카의 앞발을 토닥거리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면서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할 말은 했다.

“벨루카, 그래서 힘이 깃든 정령석이 필요한 거야, 아니면 정령석 씨앗이 필요한 거야?”

- 이기 정령석이 필요해.

풀이 죽은 목소리였지만, 벨루카는 꿋꿋하게 일관된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테리온의 표정은 대번에 밝아졌다. 정령석 씨앗이라면 캠든 영지의 다이아몬드 동굴에 널려 있었으니까.

내심 힘이 깃든 정령석을 말하는 거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었는데 모든 염려가 체증처럼 한순간에 쑤욱 내려가며 사라졌다.

아스테리온이 아까부터 쥐고 있던 정령석 씨앗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알렉이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벨루카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각하, 정령석 씨앗이 필요한 거죠?”

“맞아.”

“정말 잘됐어요. 다이아몬드 동굴에 많잖아요.”

아이린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석 씨앗 열 배라……. 수도까지 운송해 오려면 장난 아니게 힘들겠는데요.”

트레버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캠든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멀어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둘째치고, 그 양이 너무 많았다.

“여기 있는 것들이 한 상자이니 적어도 열 상자는 가져와야겠군요.”

마커스 경이 정령석 씨앗을 한눈에 담았다.

그 한 상자는 거의 성인 남자의 키만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트레버는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게 인간들이 귀히 여기는 다이아몬드라면, 그것도 무더기로.

“보안에 신경 쓰면서 주의를 기울여 운송한다고 해도 지난번과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지.”

정보가 샐 염려보다는 변수가 문제였다.

“저희 조인족들이 나서서 하늘길을 이용해 옮긴다고 하면 마차보다는 며칠 정도, 조금 빠르긴 할 겁니다.”

긴 생각에 잠겨 있던 에이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 방해를 받지 않고 옮길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내 에이글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캠든 영지에서 수도까지 중간중간에 마련된 카일라니 소속 거점이 존재한다.

마차를 이용하면 그 거점에서 말을 교체할 수 있어서 말의 피로도를 낮추며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조인족들은 교대 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피로가 엄청나게 누적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에이글이 말한 것처럼 결과적으로는 마차운반이나 조인족들이 운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턱 얹어 놓은 것처럼 갑갑한 마음에 아스테리온이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정령석이 아니라 정령석 씨앗이 필요한 거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아스테리온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차와 조인족 모두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가 제시한 절충안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이 본격적으로 정령석 운송 작전을 짜기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인간들이 하는 양을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벨루카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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