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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73)화 (173/214)

173화 

- 평범한 인간은 느끼지 못해. 게다가 소드 마스터인 너도 알아채지 못했잖아. 독수리도 그렇고. 나나 되니까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거지.

지금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게 벨루카가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 몸이 록사나를 살피는 동안 남자 인간,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뭐든지 할게. 시켜만 줘.”

아스테리온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벨루카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진지해졌다.

- 누군가에게 기운을 흘려 넣어 탐색하는 건 처음 해 보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을 경계해 줘.

웬만해서는 실패하거나 방해받을 일은 없으리라고 벨루카는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자신과 록사나에게 이상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다인가?”

- 아! 독수리도 데려와라.

자신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에이글이 옆에 있게 된다면 더욱 안심이 될 거 같았다.

그들의 부름에 이미 방 안에 자리하고 있던 에이글이 곧장 침대로 다가왔다.

에이글의 표정은 어두웠다. 밖에서 휘장 안의 말소리를 다 들었던 것이다.

물론 아스테리온의 목소리만 들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충분했다.

아스테리온이 에이글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 한눈팔지 말고 잘 지켜.

벨루카가 두 사람을 경비병처럼 침대 양쪽에 세우고는 신신당부를 했다.

아스테리온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눈치로 벨루카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를 대충 짐작한 에이글이 알겠다고 우렁차게 대답했다가 둘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후, 벨루카의 몸에서 정령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루카는 자신의 앞발과 맞닿은 록사나의 한쪽 손으로 기운을 흘려 보냈다.

바늘이 떨어지면 그 소리가 종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은 록사나와 벨루카에게 붙박이처럼 단단히 고정되었다.

많이 힘들고 어려운지 눈을 꼭 감고 집중하는 벨루카의 미간이 가끔씩 꿈틀거렸다. 때로는 신음 비슷한 소리가 낮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한편 에이글도 잔뜩 긴장을 했다. 그의 목울대가 가끔씩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그는 벨루카의 기운이 가느다란 실처럼 뻗어 나가며 록사나의 몸으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록사나는 갑자기 나타난 빛을 따라 들어선 곳이 정령계를 벗어나는 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정령계의 또 다른 공간이었다.

여기서도 한참 동안을 헤매야만 했다. 그러다가 다른 정령들을 만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정령들은 사념이 된 정령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벌어졌던 끔찍하고 비극적인 일들을 록사나에게 보여 주었다.

수시로 장소가 바뀌었다. 록사나는 그들이 보여 주는 장소 속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장소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보거나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록사나는 그들과 접촉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보였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차례 폭풍처럼 몰아쳤던 충격적인 끔찍한 장면들이 엔딩을 향해 달려가며 서서히 막을 내렸다. 이후 사방이 온통 회색빛으로 확 바뀌었다.

록사나는 한동안 멍하니 선 채,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에메랄드빛 두 눈과 양 뺨은 물기로 가득 젖어 있었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희끄무레한 빛의 형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 그녀에게 과거의 진실을 보여 준 정령들이었다.

록사나가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쳐 냈다. 그러자 그들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정령들은 마치 말을 잊거나 하지 못하는 것처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건 록사나도 마찬가지였다. 묻고 싶은 말도 많았고, 해 주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입을 아교로 단단히 붙인 듯이 단 한마디도 소리 내어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마치 어떤 존재가 그들과 록사나의 대화를 방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샤일리를 만났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 공간에서는 정령의 힘도 무용지물이었다.

너무나도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유추할 수는 있었다.

잠시 후, 정령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마치 저쪽으로 따라가면 된다고 그녀에게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에 록사나는 이들과의 만남이 이제 끝나 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도 만져지는 않는 그들 중 몇몇을 번갈아 가며 꼭 끌어안았다.

록사나의 행동은 그저 혼자서 허공을 향해 포옹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과 약속을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너희를 반드시 꼭 구해 줄게. 그리고 그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결연한 마음이 전달되었을까. 정령들의 얼굴에 차츰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록사나가 정령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을래.’

그렇게 록사나가 그들에게 등을 돌렸다. 정령들이 가리켜 준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벨루카가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어 록사나의 몸에 깃들어 있는 이질적인 기운을 탐색하기 시작한 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에게는 단 몇 초도 천년만년처럼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뭔가 변화를 느꼈는지 에이글이 아스테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벨루카를 가리켰다. 끝나 간다는 신호였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고마움을 표했다. 빛의 속도로 흐르던 그의 시간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자 조금씩 제시간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벨루카가 파르르 눈을 떴다. 콧잔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내 잠깐 동안 숨을 골랐다. 그사이 앞발을 들어 올려 콧잔등을 한 번 쓱 닦아 냈다.

“벨루카 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이글의 말에 벨루카는 누구와 참 다르게 인사성이 바른 독수리라고 생각했다.

벨루카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검은 돌의 기운이 맞다. 록사나와 내가 가진 기운이랑 거의 비슷해서 처음에 나도 알아채지 못했던 거였어.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꾹 참고 계속해서 벨루카의 말을 경청했다.

- 내가 봤을 때 지금까지는 몸에 영향을 미친 게 없어 보여. 그릇에 물이 담긴 듯이 록사나의 몸에 담겨 있는 상태야. 하지만…….

답지 않게 늑대 정령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가슴속 어둡고 깊은 곳에서부터 쑥 치밀어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꾹 누르며 아스테리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 맞아.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나도 잘 몰라.

그 말을 듣자마자 급격하게 가라앉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벨루카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 걱정하지 마라, 남자 인간. 방법이 있어!

아스테리온의 눈빛이 대번에 살아나는 것을 보며 벨루카는 생각했다.

‘내가 얄미운 저 인간을 안심시키는 날이 다 오다니……. 오늘은 달이 서쪽에서 뜨겠군.’

“어떤 방법이지?”

- 검은 기운을 몸 밖으로 빼내서 다른 그릇에 옮겨 담으면 돼. 없애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나도 어려울 것 같아.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고? 다른 그릇이라면 혹시 다른 인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스테리온은 그렇다면 기꺼이 자신이 그 그릇이 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벨루카의 이어진 말에 의해서 바로 가로막혔다.

- 넌 안 돼!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하잖아. 당연히 독수리, 너도 제외야. 물론 지금의 나도 할 수가 없고 말이야…….

끝으로 갈수록 벨루카의 말이 흐려졌다.

“왜지?”

“왜 안 됩니까?”

즉각 두 남자가 동시에 같은 의문을 쏟아 냈다.

- 이질적인 기운과 같은 파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그릇이어야만 가능하니까.

벨루카가 잠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지금 그 그릇에 가장 가깝고 유력한 건 바로 나야. 하지만 내가 지금 상태에서 검은 돌의 기운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 옮기지도 못하고, 다시 작아지게 될 거야.

“그럼 벨루카 님께서 다시 한번 성장하시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 맞는 말이야.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어. 지금보다 세 배 이상의 양이 필요해. 그런데 지금 더 이상 남아 있는 정령석이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벨루카를 깨우기 위해 가져온 정령석이 캠든 영지에서 여분으로 보관하고 있던 전부였다.

아스테리온과 에이글의 얼굴에는 급격하게 먹구름이 끼었다.

“벨루카,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을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아스테리온이 벨루카를 쳐다보았다.

- 그게, 음…….

밸루카는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하지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내 시무룩한 목소리로 사실대로 말했다.

- 기억이 날 듯 말 듯 잘 생각이 안 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군.”

아스테리온이 힘없이 말했다. 그러자 벨루카는 자신이 죄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아주아주 빠르게 벨루카는 해결책을 찾게 되며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게 된다.

* * *

벨루카와 두 사람이 휘장 밖으로 나온 후, 투명해진 정령석 무더기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탁자나 의자도 없이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벨루카는 정령석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에 놓인 대형 생크림 케이크 한 판을 즐겼다.

생각이 안 떠오를 때는 단것을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아이린이 말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조금이나마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쫑긋 서 있던 벨루카의 두 귀가 축 처졌다.

입 한번 댔을 뿐인데 케이크의 절반이 뭉텅이로 쑥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벨루카는 차선책을 택했다. 한입에 털어 넣는 행동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이내 혀를 할짝거리며 조금씩 핥아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손에 각자 찻잔 하나씩 들고 말없이 차를 연신 홀짝였다. 덕분에 그들의 마음은 한결 차분해지고 안정되어 갔다.

이렇게 모여 앉아 있는 것은 록사나를 깨우는 일에 대해서 논의하고, 앞으로의 진행할 일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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