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에이글은 두 무릎까지 꿇고 경배했고, 알렉은 호탕하게 인사를 건넸다.
트레버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참 어이가 없군. 진짜로 뚫어져라 노려보니까 일어났어. 아니지, 소드 마스터의 딱밤을 못 견디고 깨어난 거지.”
사실 트레버는 벨루카가 깨어나기 전에 전조 증상처럼 뭔가 거대하고 신비한 빛이나 기운이 감돌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착각과 환상이 던진 돌에 맞은 거울처럼 한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다 보니 방 안은 도떼기시장처럼 왁자지껄해졌다.
그사이 벨루카는 아스테리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네 발로 서서 그를 원수 보듯이 노려보았다.
- 너무 아프잖아, 남자 인간!! 아주 못되고 나빴어. 대체 왜 때린 거야? 내 잘생긴 이마 빠개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이를 으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로써 정령도 이를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늑대, 너 진작 깨어 있었는데도 계속 잠들어 있는 척했잖아. 맞을 만한 짓을 했으니까 맞은 거야. 그러니까 누가 그런 짓을 하래?”
아스테리온의 목소리는 한없이 엄했다. 벨루카를 부르던 호칭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 칫! 들켜 버렸네. 쓸데없이 소드 마스터씩이나 되어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속아 넘어갔는데 왜 하필 저 남자 인간만…….
눈에 불이라도 켠 듯 아스테리온이 두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벨루카가 몸을 움찔거리며 점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잠든 척한 건 5초도 안 된다고!
벨루카가 이까지 드러내고는 으르렁거리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은 10초, 아니, 20초 정도쯤, 아닌가? 깼으면서도 30초 정도쯤 여전히 잠든 척을 했다.
자신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몸을 쓰다듬는 손길들이 좋아서 가만히 있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깨어나야 멋지고, 더 좋아해 줄까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저 남자 인간 때문에 다 망쳤다.
- 흥!
벨루카가 고개를 팩 돌렸다. 몸을 둥글게 말고는 몸통 사이로 얼굴을 파묻기까지 했다. 아스테리온과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항의의 표시였다.
“너 눈꼬리 바르르 떨리는 거 내가 그 전에 봤거든.”
움찔.
털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속이 뜨끔했던 벨루카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 남자 인간, 완전 유령이잖아!’
이런 낭패가 없었다. 그럼에도 벨루카는 묵묵히 모르쇠로 일관된 태도를 고수했다.
“내가 이 방에 도착하기 전에 너는 이미 깨어 있었을 거야.”
그러나 참지 못하고 이어진 아스테리온의 말에 발끈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막 깨어났을 땐 네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걸 느꼈어.
아스테리온이 방에 도착하고 그가 벨루카의 앞에 자리한 후에 깬 거라는 말이었다.
“그런 거였군.”
갑자기 부드럽게 풀어진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 벨루카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온이 씨익 웃었다.
- 너!!
자신을 놀린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벨루카가 번개처럼 아스테리온에게 달려들었다.
커다란 덩치로 단숨에 아스테리온의 몸을 와락 덮치며 바닥에 쓰러뜨렸다. 거대한 파도를 정면으로 맞은 듯 그의 몸은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벨루카와 아스테리온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벼락이 내리친 것처럼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사람들이 황망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각하?”
아스테리온의 금빛 머리칼이 한 올도 보이지 않자, 알렉이 안절부절못했다.
딱 붙은 저 덩치들을 어떻게 떼어 놔야 하나 사람들이 고민을 하던 때였다.
- 흐응. 흑. 안 돼, 하지 마. 큭!
날카로운 발톱을 바짝 세워 당장에라도 상대의 얼굴을 내리그을 것 같던 벨루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댔다.
뭔가 극한의 고통을 참는 것 같았다.
- 크아아악! 하지 마, 하지 마! 알았다고! 내가 졌어. 항복이야, 항복!
걱정이 무색하게도 벨루카가 자지러지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벌러덩 배를 드러내 보이며 철퍼덕 드러누웠다.
벨루카의 몸에 가려졌던 아스테리온이 간지럼을 태운 것이다. 극악무도한 공격에 벨루카는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자유롭게 풀려난 아스테리온이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고, 귀족의 고상한 체면도 잊은 채 몸을 데굴데굴 굴러 벨루카의 옆에 가서 착 달라붙었다.
그사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벨루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아스테리온을 쳐다보았다.
아스테리온이 손을 뻗어 벨루카의 머리 쪽 은빛 털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늦지 않게 깨어나 줘서 고맙다, 벨루카.”
그러더니 벨루카의 머리를 자신의 넓은 가슴팍에 꼭 끌어안았다.
- 흥, 그런다고 내가 봐주거나 용서해 줄 줄 알아?! 뭐, 이 몸이 다시 깨어난 걸 영광으로 알라고.
“그래, 영광이다. 영광.”
느닷없이 한 남자와 한 늑대 정령의 브로맨스를 강제로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턱이 빠질 듯이 다들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말로 다투다가 몸싸움을 벌이고, 그러다가 순식간에 화해 모드로 돌아서며 핑크빛 기류를 뿜어내니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정말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 다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것이 좋겠군요.”
트레버가 짠하게 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속으로는 한 사람과 짐승 한 마리라고 말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면서.
그렇게 긴 잠에서 깨어난 벨루카맞이 소동이 우당탕탕 떠들썩하게 마무리되었다.
【 그릇이 될 만한 것 】
덩치 깡패가 된 벨루카가 록사나의 옆에서 몸을 엎드리고 있었다. 성인 예닐곱 명이 누워도 될 정도로 넓고 큰 침대였건만 좁아터져 보였다.
그가 침대에 오르기 전, 못된 남자 인간은 그의 몸집이 커진 것에 대해서 엄청 트집을 잡았었다.
침대가 무너지고 말 거라면서 록사나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며 온몸으로 막았다.
둘 사이에서는 한동안 실랑이가 벌어졌고, 벨루카는 잠든 록사나의 옆자리를 겨우겨우 쟁취해 낼 수 있었다.
벨루카는 자세가 불편해서 몸 여기저기가 저려 오는 것 같았다. 자세를 바꾸려고 상체를 아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얼음처럼 굳어졌다.
지금 남자 인간은 휘장 밖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벨루카가 슬쩍 바깥쪽 눈치를 살폈다. 속으로는 분노를 터뜨렸다. 쫓겨날까 봐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에 성질 한번 더럽게 나쁜 남자 인간 같으니라고! 봐라, 남자 인간. 침대 하나도 안 무너졌다. 록사나가 일어나면 너의 만행을 낱낱이 다 이르고 말 거야.’
벨루카가 사악한 미소를 짓다가 잠시 멈칫했다.
남자 인간에게 또 트집을 잡히기는 싫었다.
벨루카는 어쩔 수 없이 조금의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최대한 자신의 덩치가 작아 보이도록 몸을 더욱더 잔뜩 웅크렸다.
이내 고개를 들어 록사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징그럽게 커졌다는 남자 인간의 말이 떠올랐다. 그로 인해 갑자기 우울해졌다.
벨루카의 여린 마음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날 보고 록사나도 징그럽다고 하면 어떡하지?’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지 않고, 더 이상 다정하게 안아 주지도 않으며 자신을 멀리하는 록사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쿡쿡 쑤셨다.
절로 벨루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는 절대 안 돼!! 이제 어떻게 하지?’
벨루카는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록사나가 깨어나면 그녀 앞에서는 무조건 몸을 최대한 움츠리고 다녀야겠다고.
만족스럽게 씨익 웃던 벨루카가 록사나의 얼굴을 향해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코끝으로 그녀의 마른 볼을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렸다.
지금쯤 간지럽다며 까르르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와야 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벨루카의 두 귀가 아래로 힘없이 축 처졌다.
벨루카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때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은빛 털에 뒤덮여 있는 그의 두 귀가 갑자기 쫑긋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벨루카가 록사나의 몸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죽 훑어 내렸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내가 아까는 왜 이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벨루카가 지그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신체의 거의 모든 감각이 따끔거렸다. 아주 희미하지만 예전에 록사나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조금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내 눈을 뜬 은빛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 남자 인간.
청력이 좋은 아스테리온이 즉각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재빠르게 록사나와 벨루카를 번갈아 살폈다.
“무슨 일이지?”
그의 묻는 말에는 긴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 록사나가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거지?”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 몸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가 앵무새처럼 벨루카의 말을 따라 했다.
푸른 눈동자 또한 폭풍우를 만난 조각배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아스테리온이 지금 몹시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벨루카의 시선이 절로 아스테리온의 손으로 향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그가 손까지 떨고 있었던 것이다.
- 우선 진정 좀 하도록 해. 그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가 힘들 거 같아.
“하지만……!”
벨루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말렸다.
- 지금 당장 문제 될 건 없어 보여.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던 아스테리온의 두 어깨에서 힘이 한 움큼 빠졌다. 그렇다고 그의 표정까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아스테리온이 벨루카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바라보았다.
벨루카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 이질적인 기운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내 힘을 불어 넣어서 확인을 해 볼 거야. 남자 인간도 짐작 가는 것이 있지?
아스테리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나의 몸에 깃든 이질적인 기운은 분명 로웰 후작저 지하 감옥에서 마주한 검은 돌에서 흘러나온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벨루카가 그의 추측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 그 검은 돌과 관련된 기운이 틀림없어.
“알렉은 록사나의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었다.”
아스테리온은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유능한 자였기에 그의 말을 믿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이어진 벨루카의 말에 의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