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이러한 이유로 제게는 리키 경에 대한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아스테리온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직접적인 거절을 기대했던 황제는 대놓고 김이 팍 셌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럼 그 권한은 누구한테 있다는 건가? 설마 리키 경이라는 그자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부름을 받고 하명이 있을까 싶어서 마침 리키 경과 함께 황궁에 들었습니다. 지금 대회의실 밖에 있으니 그를 직접 불러서 의중을 확인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아스테리온이 시선을 테오도르에게 두고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리키 경이 직접 답변을 한다면 테오도르 황자님께서도 충분히 납득하실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군. 그자를 들라 하라.”
황제는 뭔가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리키 경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내내 망부석처럼 앞만 바라보고 있던 테오도르와 아스테리온이 몸을 옆으로 틀었다.
리키 경이 황제와 황태자에게 예를 갖추자, 황제는 테오도르를 구한 공로에 대한 어떤 인사치레도 없이 질문부터 던졌다.
그에 리키 경이 난감한 표정으로 아스테리온과 테오도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엄한 황제 앞에서 마음 놓고 고민하거나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이내 마음을 정한 듯 리키 경이 엄숙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자신의 결정을 고했다.
“지금까지 저를 거둬 주신 카일라니 공작님께는 죄송하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정식 기사가 되기에 실력이 한참 부족한 저를 허락해 주신다면 테오도르 황자님의 호위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리키 경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기사의 예를 올리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들었다.
그렇게 결정권은 돌고 돌아서 결국 황제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렇다는군. 카일라니 공작은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가?”
“촉망되는 인재를 잃게 되어 아쉽기는 하지만 리키 경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카일라니 공작은 역시 대범하군.”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띤 황제는 테오도르가 호위 기사를 요청했던 처음과는 다르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정식 기사가 되기에는 저자의 실력이 좀 모자란 모양이군.’
정식 기사가 되지 못하느니 좋은 기회가 온 이때, 황자의 호위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리키 경의 마음(?)을 읽어 낸 황제가 속으로 흡족해했다.
황제가 몸을 더 깊숙이 황좌에 기대면서 중앙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연신 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실력은 황실 제4기사단 기사들 중 중·상급 정도 되려나?’
황실에는 총 다섯 개의 기사단이 있었다. 제1기사단은 황제 직속이었고, 2기사단은 황후와 황태자를, 3기사단은 황비와 황족들의 호위와 궁의 경비를 주로 담당한다.
4기사단은 외궁의 경비를 주로 담당했는데 황실의 기사니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실력은 대부분 1~3기사단의 기사들에 미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5기사단은 황궁의 모든 성문과 성벽을 담당한다.
‘그래, 나쁘지는 않겠어. 짐의 체면도 살리면서 오히려 여러모로 딱이군. 일석삼조야.’
습격을 당한 어린 아들을 위로하고, 원하는 호위 기사를 허락함으로써 인자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또한 리키 경에게는 황족을 호위한다는 영광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제국민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어버이로서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절호라고 할 수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대회의실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쏠려 있었다.
장고 끝에 마침내 결정을 내린 황제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드디어 열었다.
“리키 경은 들으라. 그대를 오늘부로 7황자의 호위 기사로 임명하겠다. 습격으로부터 황족을 구한 공을 인정하여 황실 보고에 있는 명검 한 자루와 100골드를 하사하겠노라.”
100골드는 황족의 목숨값치고는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일반 기사에게는 족히 10년 가까이 벌어야만 모을 수 있는 액수였지만 말이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바닥에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또한 하해와 같은 폐하의 베푸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리키 경의 뒤를 이어 테오도르가 큰 소리로 말하면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황제 폐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은 천진난만한 아이 그 자체였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호위 기사가 생겼으니 내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날 걱정은 덜었구나.”
그러면서 아들에 대한 그동안의 무심함을 보상이라도 하듯 황제가 선심을 썼다.
“앞으로 황자로서 항상 몸가짐과 태도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7황자에게도 금화 한 상자를 하사하마.”
귀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금화 한 상자면 2,000골드였다. 그 돈이면 수도 2구역에 크고 번듯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도노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또 일이 틀어졌잖아!’
7황자의 호위 기사 선임을 반대할 명분이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깟 2,000골드는 그에게 푼돈이었다.
‘장인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도노반의 모든 원망과 분노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로웰 후작에게로 향했다.
로웰 후작은 그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며 도노반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도노반이 속으로 이를 으득 갈았다.
이번 일의 실패로 인해 다른 황족들로 대상을 바꾼다고 해도 또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모든 황족들은 너도나도 몸을 사리며 경계와 경비를 한껏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썬 완벽한 황제를 꿈꾸던 도노반의 꿈이 점점 더 멀어져 갔다.
* * *
그렇게 아스테리온의 계획대로 리키 경은 공작가의 임시 기사 신분에서 테오도르 황자의 정식 호위 기사가 되는 데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테오도르에게 검술을 지도하거나 호위를 할 때 남몰래 숨어서 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껑충 기울어 있었다.
7황자의 호위 기사 선임 여부 안건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회의가 막을 내렸다.
황제가 먼저 퇴청하자, 귀족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우르르 대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중에는 아스테리온도 있었다. 거의 달리듯이 귀가를 서두르는 그의 발걸음은 몹시 초조했다.
노을 지는 서쪽 하늘을 발견한 그의 속은 노을보다 더 붉고 뜨겁게 활활 타들어 가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마차에 몸을 실은 아스테리온은 마부를 재촉하며 서둘러 귀가했다. 카일라니 공작저가 아닌 남작저로.
* * *
계단을 여러 개씩 뛰어넘고 현관을 지나서 긴 복도를 가로지른 아스테리온이 순식간에 록사나의 침실에 당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벨루카를 빙 둘러싼 사람들이 그의 등장에 고개를 돌렸다. 몇은 서 있고, 다른 몇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알렉이 반색하며 대표로 나서서 그를 맞이했다.
“각하, 마침 딱 시간 맞춰 잘 오셨습니다.”
아스테리온이 황궁으로 떠날 때만 해도 초록빛이 살짝 감돌았던 벨루카 주변의 정령석들이 모두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이를 설명하듯 에이글이 말했다.
“정령석에 있던 힘이 벨루카 님께 모두 흡수되었습니다.”
아스테리온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금세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빈자리가 뚝딱 만들어졌다.
그 빈자리를 아스테리온이 채우며 벨루카를 보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아까보다 더 커졌군.”
“네, 그사이에 성장을 이루셨습니다.”
다 자란 말 정도의 크기로 자란 벨루카를 아스테리온과 알렉이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벨루카가 깨어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스테리온이 손을 뻗어 벨루카의 콧잔등에 얹었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털을 쓸어내렸다.
“충분히 많이 잤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라, 벨루카. 계속 자다간 뼈가 굳어 화석이 될 거다.”
아스테리온이 처음으로 벨루카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는 순간이었다.
“그런다고 일어나겠습니까.”
“저희도 몇 번 몸을 쓰다듬어드려 봤는데 우리 정령님 눈 하나 깜짝도 안 하시던데요.”
트레버와 마커스 경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실패담을 고백했다.
그때였다.
“어?!”
벨루카의 정면에 자리한 아이린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이린, 또 잘못 본 거 아니야? 아까 에이글의 콧바람에 벨루카 님 눈썹이 움직이는 걸 보고 깨어나시는 걸로 착각했었잖아.”
아까처럼 크게 실망할까 봐 마르셀 경이 아이린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였다.
“아니에요! 이번엔 진짜예요. 분명 눈을 움찔거리며 움직이셨어요!”
“여기 소드 마스터이신 각하께서도 별말씀이 없으신 걸 보면 이번에도 아닌 것 같구나.”
마커스 경이 미동도 없이 벨루카를 노려보는 아스테리온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눈에 힘 좀 푸십시오, 각하. 벨루카가 무서워서 어디 눈 뜨겠습니까.”
다른 이들과 다르게 트레버는 아스테리온과 같이 벨루카를 높여 부르지 않았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 정도의 크기 때부터 봐 왔더니 신성한 정령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마리의 늑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트레버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아스테리온은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짙은 금빛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일그러지며 잘생긴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어느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릴 새도 없이 아스테리온이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벨루카의 이마에 딱밤을 강하게 먹였다.
따악!
돌이 쪼개지는 굉음과 함께 벨루카의 거대한 몸이 공중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눈을 뜬 벨루카가 우렁찬 비명을 내질렀다.
- 으아아악!!
늑대의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방 안을 울리자, 사람들이 벙찐 얼굴로 벨루카를 쳐다보았다.
“지, 진짜로 깨어나셨어.”
“제 말이 맞았잖아요!!”
말을 더듬는 마르셀 경의 등을 팍팍 내리치며 아이린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벨루카 님~!”
“잘 주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