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음, 아마도 오늘 해가 지기 전후가 될 것 같습니다.”
알렉이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정령석 하나를 집어 손에 들어 보이며 말했다.
원래의 정령석은 진한 초록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연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알렉의 손에 들린 정령석뿐만 아니라, 벨루카 주변의 정력석들도 색이 상당히 옅어진 상태였다.
아스테리온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까보다 더 환한 빛이 감돌았다.
“아, 드디어!”
연달아 터진 희소식에 아이린이 자신의 두 손을 가슴 앞쪽으로 모아 잡고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친 듯이 꽥 하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기쁨을 표출하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가장 조용히 하며 행동을 조심히 한 에이글이 이를 보다 못해 나섰다.
“자, 다들 그만들 하시오. 그리고 제자리로 다들 돌아가시오. 환자의 안정에 방해가 되니 말이오.”
그가 눈짓으로 침대와 벨루카를 번갈아 눈짓하며 사람들을 몰아냈다.
“나 참, 내가 언제 방해를 했다고.”
트레버가 투덜거렸다.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결국 아스테리온을 포함한 세 사람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방에서 쫓겨나 주었다. 에이글 역시 방을 나왔다.
“그대의 노고가 크네, 알렉. 고맙네.”
“아닙니다, 각하. 제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스테리온의 진심 어린 격려와 감사에 당황한 알렉이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 해도 자네의 공이 결코 적지 않아.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끝까지 함께해 주게.”
“아무렴요, 꼭 그럴 겁니다.”
알렉이 벅차오르는 가슴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스테리온은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 대신 함께해 달라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신뢰를 보여 주었다.
알렉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럼 저는 제 임무를 마저 계속해서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처럼 아스테리온을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감히 그를 꼭 끌어안을 것만 같아서 알렉이 상관의 허락도 없이 감히 등을 돌렸다.
그에게는 이미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만한 배짱이 생겨 버렸다.
전에는 아스테리온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긴장으로 늘 식은땀을 줄줄 흘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깨알만 했던 간이 호두알만큼 단단하게 커지며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아스테리온이 몸을 돌려 휘장이 쳐진 침대에 시선을 두었다.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갔다.
그 안쪽에서 록사나를 살피는 아이린의 움직임이 얼핏 어른거렸다.
현재의 상황을 록사나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는 아이린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아스테리온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이린의 잔뜩 흥분된 감정이 물씬 묻어났다.
딱 한 걸음을 남겨 두고 아스테리온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휘장을 걷기 위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록사나에게 닿고 싶은 그 짧은 순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무척이나 힘들어 그가 이를 악물었다.
‘나까지 너무 들떠서는 곤란해.’
아까부터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때문에 그는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철해질 필요가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바닥에 딱 붙은 듯 잘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두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그렇게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가 임시 집무실에 도착해 막 자리에 앉자, 마커스 경이 들어왔다.
“각하, 황궁에서 전언을 가지고 관리가 왔습니다. 급하다고 합니다.”
마커스 경이 닫고 들어온 문 쪽을 눈으로 가리키며 자신이 직접 온 이유에 대해서 보고를 했다.
문밖에 관리가 와 있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들여보내.”
아스테리온의 허락이 떨어지고, 황제의 명을 대신 전달하는 관리가 그의 앞에 자리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얼마나 급했는지 관리는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서신이나 공문이 없이 구두로만 전해지는 전언이었기에 아스테리온이 일어나서 예를 차릴 필요는 없었다.
“카일라니 공작님, 지금 당장 황궁으로 입궁하시라는 황제 폐하의 전언입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오?”
관리가 아스테리온보다는 직급이 많이 낮았지만 황제의 명을 전하는 사람이었기에 존중하는 의미에서 아스테리온은 평소처럼 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관리는 이것을 말을 해도 되나 고민이 되었다.
“기밀을 요하는 것이라면 말을 해 주지 않아도 괜찮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 하면…….”
말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관리가 황제가 카일라니 공작을 호출한 이유, 즉 황궁에서 있었던 테오도르 호위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전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아스테리온은 아벨리오 남작저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옆에서 아스테리온을 조용히 보좌하던 트레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각하, 어찌 되었든 당사자인 리키 경을 대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는 것이 좋겠군. 말씀을 안 하셨어도 폐하께서 자신의 아들을 구한 기사를 한 번쯤을 보고 싶으실 테니까 말이야.”
트레버의 조언에 아스테리온이 동의했다.
“황제 폐하의 명이 있으니 나는 먼저 출발하겠다. 그러니 리키 경에게는 전언을 보내 바로 내 뒤를 따르라고 해.”
황제의 명이 지엄하니 자신은 지금 바로 남작저에서 관리와 함께 황궁으로 가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실은 리키 경이 공작저에 있는 것처럼 짜고 하는 연기였다.
또한 이미 황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리키 경에게 이 소식을 속히 전해서 대회의실로 보내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서 서둘러 다녀오시지요.”
관리를 남작저로 데려온 마커스 경이 서둘러 카일라니 공작저로 떠났다.
아니, 그러는 척만 했다. 길을 돌아 남몰래 아벨리오 남작저로 곧장 돌아와서는 전서조를 이용해 리키 경에게 소식을 발 빠르게 전했다.
그 후에는 남작저의 경비에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아스테리온이 어쩔 수 없이 남작저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트레버의 배웅을 받으며 관리와 함께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관리를 싣고 왔던 빈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 * *
황궁에 도착한 아스테리온이 지체 없이 대회의실로 들어섰다. 황제와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중에는 아까까지도 이 자리에 없었던 도노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벌레를 씹은 듯이 못마땅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아스테리온이 황제를 마주 바라보면서 그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걸음이 테오도르의 작은 등 뒤에서 몇 걸음 떨어져 멈추었다.
“제국의 태양이자 아버지이신 황제 폐하와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신, 폐하의 명을 받들어 입궁하였습니다.”
진지하게 인사를 받는 황제와 달리 도노반은 성의 없이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군, 카일라니 공작. 내 명을 내리지 않았다면 계속 황궁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나?”
“아닙니다, 폐하.”
“그래, 난 공작이 정치에 잔뜩 신물이 나서 황궁을 멀리하는 건가 했네. 그런데 어디 꿀단지를 숨겨 놔서 그런 거였군.”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자, 괘씸한 신하에게 건네는 일종의 짓궂은 도발이었다.
“폐하의 치세하에 제국은 평안하니 제국민의 복입니다. 다만 제 마음은 그렇지 못함을 폐하의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 주십시오.”
전 부인에게 목매고 있는 상황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국은 평안하니 자신은 계속해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금의 상황에 매진하겠다는 말이었다.
“직설적인 것은 여전하군.”
황제가 잠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가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공작을 이리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잘 전해 들었겠지?”
“테오도르 황자님의 호위를 정하는 일로 부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네. 내 7황자에게 뛰어난 황실 기사를 호위로 정해 주겠다고 했었네. 그런데도 카일라니 공작가의 그 기사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군.”
황제가 아스테리온의 앞에 서 있는 테오도르에게 잠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공작이 올 때까지 오랜 시간 서 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황제는 테오드르의 그런 태도가 곰처럼 미련하고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심 밖이었던 어린 아들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조금 올라간 상태였다.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일세. 내가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내 마음대로 귀족가의 기사를 황자의 호위로 내놔라 마라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건 희대의 폭군들이나 벌이는 짓이지.”
하나하나 꿰뚫고 분해하듯이 카일라니 공작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황제의 눈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처음의 표정과 다를 바가 없어 그 속을 도통 읽어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귀족가의 명예와 위신을 좌지우지할 생각이 전혀 없네. 그건 7황자도 그리해야 마땅하고 말일세.”
“하면 폐하께서는 제가 어찌하길 원하십니까?”
빙빙 말을 자꾸 돌리는 황제를 향해 아스테리온이 말로 쿡 찔렀다.
“공작의 의견을 듣고자 하네. 아, 누누이 말했듯이 강요하는 것이 아닐세. 7황자도 마냥 어리지 않으니 안 된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고 짐은 생각하네. 그리고 공작가의 귀한 인재인 기사를 어찌 사사로이 호위로 삼는다는 말인가.”
황제가 내심 기대를 담아 잔뜩 말을 늘어놓았다.
‘알아서 거절하라는 소리군.’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황제의 뜻대로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폐하의 말씀처럼 리키 경이 귀한 인재인 것은 맞으나 임시 기사일 뿐입니다.”
“임시 기사?”
“네, 폐하. 리키 경은 정식 기사가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카일라니 기사단의 체계에 대해서 얼추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스테리온이 좌중을 쓱 둘러보았다. 많은 귀족들이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시다시피 본 기사단에서 임시 기사라는 신분은 어느 한쪽이 원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위세 등등한 공작가라고 해도 임시 기사가 떠난다고 하면 붙잡을 수 없었다.
반대로 기사가 계속 남고자 원해도 일정 기간 동안 공작가에서 원하는 실력에 도달하지 못해 정식 기사가 되지 못하면 계속 임시 기사 신분으로 머물러야 했다. 즉 언제든 방출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