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당연하게도 주로 힘 있고 세력 있는 황족들을 중심으로 실력 있는 황실 기사들이 배치되었다.
단 두 곳만 이 소란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경비를 강화하는 시늉만 하는 황태자 궁과 두어 명의 기사만이 배치된 7황자의 궁이었다.
* * *
테오도르와 헨리 황자가 각자의 궁에서 습격을 받기 바로 몇 시간 전의 아벨리오 남작저.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 후, 허락을 받은 마커스 경이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각하, 리키 경으로부터 온 급보입니다.”
아스테리온이 바로 서신을 건네받았다. 종이를 펼쳐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소식입니까?”
트레버가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서신 내용에 대해서 대뜸 물었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이 그에게 서신을 곧장 넘겼다.
“마커스 경, 당장 오늘부터 7황자에게 최정예 정보부 대원들과 기사들을 붙여라. 황태자와 로웰 후작가에 붙인 우리 쪽 사람들에게는 눈을 한시도 떼지 말라고 단단히 전하고.”
“명을 받듭니다.”
방 안에 있던 일행들은 아스테리온의 발언을 통해 황태자와 로웰 후작이 테오도르 황자를 두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음을 짐작했다.
“저, 그런데 5황자는 어떻게 합니까?”
아스테리온에게 서신을 전하기 전 미리 내용을 확인했었던 마커스 경이 바로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레버도 종이에서 시선을 떼며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리키 경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5황자도 적들의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신에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도노반이 시종까지 물리고서 로웰 후작을 단둘이 만난 직후에 5황자 헨리와 7황자 테오도르의 이름을 화제에 올렸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잠시 후 결정을 내린 아스테리온이 말했다.
“5황자에게도 우리 사람을 붙이고 2황비 쪽에도 이 사실을 전해.”
“알겠습니다.”
마커스 경이 자리를 뜨자, 트레버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이번에 2황비에게 빚을 지워 두는 것이 여러모로 우리에게 유리하죠.”
솔직히 그들의 입장에서 5황자가 어찌 되든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적들에게 빌미를 주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이처럼 아스테리온의 빠른 상황 판단과 조치로 습격자들을 무사히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스테리온은 사전에 2황비, 그리고 5황자와 비밀 거래를 했다. 아니, 일방적인 요구를 했다.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움직일 것.
둘째, 리키 경이 황궁에 가게 된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이유가 되어 줄 것.
셋째, 향후 카일라니 공작의 이름으로 요청을 할 때 그에게 힘을 실어 줄 것.
이 중 마지막 세 번째는 강제가 아닌 선택 사항이었다. 즉 2황비와 5황자 측은 요청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사항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리적인 조건이었기고, 5황자의 목숨과 관련된 중대하고 심각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아스테리온의 요구를 어떤 불평불만 없이 모두 받아들였다.
뛰어난 정보력을 가진 카일라니 공작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었고, 이를 무시한다면 피해를 보는 것은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카일라니 공작의 지원을 받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득이었다.
이리하여 리키 경은 황궁에서 밤낮으로 몸을 숨기면서 생활하던 평소와 달리 자신을 과감하게 드러내며 테오도르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모두 원활하게 합의가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 황족 습격 사건, 특히 호위 기사 하나 없었던 테오도르가 당한 일을 일부러 한층 수면 위로 부각시켰다.
그럼으로써 리키 경을 테오도르의 호위 기사로 당당하게 세울 정당성과 적절한 명분을 마련했다.
테오도르가 이를 직접 황제에게 요구했다. 물론 당당함 대신 어린아이가 자신의 안위를 두려워하는 순진무구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카일라니 기사단 소속 기사를 7황자에게 붙여 주는 것이 몹시도 껄끄러웠다.
황제는 황태자인 도노반과 적대적인 카일라니 공작이 행여나 테오도르에게 힘을 실어 줄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인자한 아버지를 흉내 내며 황실 기사들 중에서 호위 기사를 삼을 것을 테오도르에게 역으로 제안했다.
테오도르와 같은 나이대의 어린 소년들은 으레 그렇듯 화려하면서도 빼어난 실력을 갖춘 황실 기사들을 동경하기 마련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황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기사를 영웅시하며 숭배했고, 리키 경이 아니면 호위 기사는 필요 없다고 테오도르가 선언을 한 것이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언짢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네 말처럼 호위 기사 없이 지내라고 당장 호통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대전에는 지켜보는 눈들이 많았다.
‘하필 대전 회의 중에 들이닥쳐서는.’
황제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테오도르를 내려다보았다. 7황자를 제대로 보는 것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말고는 거의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삐쩍 말라서 볼품 하나 없던 아이가 제법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자라서 반듯하고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결국 리온 제국의 최고 권력자임에도 차마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한껏 자애로운 아버지를 연기했는데 손바닥 뒤집듯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황제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대귀족가의 기사를 일개 황자의 기사로 들이는 것은 해당 가문의 명예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임과 동시에 황실 법도에 어긋난다는 얼토당토아니한 변명을 대면서 말이다.
이에 누군가 의견을 내놓았다.
“황제 폐하, 그럼 카일라니 공작을 불러서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작이 안 된다고 하면 어린 황자님께서도 수긍을 하실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다른 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귀족들의 시선이 자동으로 황제에게로 향했다.
“좋은 생각이군.”
황제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대전에 아스테리온은 참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날뿐만 아니라 2주째 불참 중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가문의 일로 몹시 바빠 당분간 참석이 어렵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이유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여자에 빠지더니 국정은 나 몰라라 내팽개치다니, 카일라니 공작도 별 볼 일 없는 자야.’
‘그러게 있을 때 잘할 것이지. 가만히 있지 않고 하필 이혼을 왜 해서는. 쯧쯧.’
‘참으로 늦바람이 무섭긴 무서워.’
그들은 아스테리온이 단순히 록사나의 뒤꽁무니만을 열심히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나랏일을 내팽개친 것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사이 어떻게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황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카일라니 공작에게 전언을 보내 당장 황궁에 들라 하라.”
관리들 중 한 명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지엄한 명을 받들었다. 그러고는 급하게 황궁의 대회의실 문턱을 넘어섰다.
그때 관리의 등 뒤에 대고 어떤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체통을 잊고 크게 소리쳤다.
“공작가 말고 아벨리오 남작가로 먼저 가 보게.”
카일라니 공작이 틀림없이 분명 남작저에 진을 치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조언이었다.
관리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설마’ 하면서 황궁을 벗어났다.
두 저택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타날 때까지 내내 고민을 거듭하던 관리에게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관리의 발걸음은 카일라니 공작가로 먼저 향했다.
한편 황제와 귀족들은 카일라니 공작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면서 쉬지 않고 다른 안건을 논의하며 회의를 계속 이어 갔다.
반면 테오도르는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상태로 제자리를 지켰다.
오랫동안 서 있었던 터라 다리가 아파 올 텐데도 자리를 뜰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귀족들은 그런 7황자를 호기심에 몇 번 힐끔거리다가는 얼마 안 가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렇게 테오도르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거나 챙겨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 *
한편 관리가 황궁에서 공작가를 향해 출발한 그 시각, 아스테리온은 아벨리오 남작저의 임시 집무실에 잠시 급한 일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알렉이 보낸 시종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집무실을 벗어난 후 있는 힘껏 달려 록사나의 침실로 향했다.
“각하! 여기 벨루카 님을 보십시오!”
막 방 안에 들어선 아스테리온을 발견한 알렉이 인사도 잊은 채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옆으로 비켜서며 벨루카를 가리켰다.
아스테리온이 동공이 단숨에 확장되었다.
“자랐군!”
전날의 추측과 예상대로 벨루카의 몸집이 원래의 거대한 크기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스테리온의 입가에 태양보다 밝은 미소가 진하게 자리를 잡았다.
“네, 드디어 원래의 몸 크기가 되셨습니다.”
알렉이 주름진 입가에 함박웃음을 품었다. 한쪽에 자리한 에이글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벌컥, 꽝!
기쁜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마르셀 경의 힘에 의해 문이 벽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내었다.
그의 거친 행동에 아주 잠시 아스테리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매섭게 눈총을 주었다.
그런데 벨루카를 발견하고는 그 독기가 눈 녹듯이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다.
“대박! 진짜 커졌어.”
트레버가 감탄을 하는 사이, 그와 마르셀 경의 덩치에 가려 뒤에서 겨우 얼굴만 내밀고 있던 아이린이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좀 비켜 보세요. 다들 문을 막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아, 미안.”
범인인 두 남자 마르셀 경과 트레버가 냉큼 문에서 몸을 멀찍이 물렸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아이린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벨루카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커다란 늑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두 눈에는 물기가 금세 차올랐다.
“정말 다행이에요. 잘됐어요. 우리 벨루카 님, 진짜 장하세요.”
주절주절 기쁨과 칭찬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알렉이 한차례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이어서 그가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와 에이글이 감히 예상하건대 벨루카 님은 오늘 안으로 깨어나실 겁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쯤이지?”
조바심이 난 아스테리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타박을 하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한 시각 예측은 어렵더라도 다들 대강은 궁금했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이 알렉의 입으로 향했다. 잠시간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