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애초에 테오도르가 오랫동안 머물던 침실은 그의 선택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었다.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 이 궁에 왔고, 그 당시 궁을 관리하던 하녀가 제멋대로 정해 준 방이었다.
가장 구석지고 외진 곳에 위치한 그 방은 물론 북향이라 빛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에는 습기로 늘 눅눅했고, 겨울에는 무척 추웠다.
* * *
테오도르와 리키 경이 새로운 방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밖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곧 이어서 황실 제3기사단 단장 그렉이 눈앞에 나타났다.
“7황자 전하, 무사하셨군요.”
그렉이 테오도르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내렸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가 당도하기 전에 카일라니 기사들은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오직 리키 경만이 테오도르 옆에 남아 있었다.
그렉이 리키 경을 보고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뭐라고 하려고 입을 벙긋거리자 테오도르가 먼저 입을 열며 그의 말을 막았다.
“내가 마치 죽기를 바란 모양이야. 황자가 습격을 당했는데도 이제야 나타난 것을 보면 말이야. 그리고 너무 바빠 황족에 대한 예의 따위는 모두 잊어버린 모양이군.”
테오도르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렉을 쏘아보았다. 둘의 체격 차이가 워낙 커서 목이 아플 정도로 한껏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다.
아차 싶었던 그렉이 바로 예를 갖추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까웠다.
“제국의 별이신 테오도르 7황자님을 뵙습니다. 저는 황실 제3기사단 단장 그렉 튀나르입니다.”
테오도르는 마지못해 그의 인사를 받았다.
“감히 7황자 저하께서 죽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순찰을 돌던 중 황자님 궁 쪽에서 강력한 빛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려 바로 달려온 것입니다.”
그렉이 한껏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테오도르는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빛을 보고 바로 달려온 것이라면 시간상 늦어도 방을 정리하는 도중에 당도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달려온 참이라……. 그렇다고 치지. 그래서 나에게 알고 싶은 게 뭐야?”
“생채기 하나 없으십니다. 정말 습격자들이 있었습니까?”
그렉의 목소리는 불퉁했다. 그는 7황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 자작극을 벌인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경은 내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군. 뭐,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이리 멀쩡한 건 여기 있는 리키 경 덕분이야.”
그때 리키 경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카일라니 기사단의 임시 기사 리키입니다.”
“외부인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시비조에 가까운 말투로 따져 묻는 그렉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곧장 테오도르의 몸이 바짝 경직되었다. 그렉이 눈치를 챌 정도는 아니었지만, 숨이 살짝 가빠졌고, 심장은 순식간에 빠르게 뜀박질을 했다.
세 사람 사이에 잠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렉의 표정은 의기양양해졌다.
잠시 후 리키 경이 입을 떼었다. 진중한 목소리가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오늘 5황자님의 검술 대련 상대로 부름을 받고 늦은 밤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황궁은 초행길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습니다.”
믿지 못하겠다는 그렉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리키 경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수상한 빛을 목격하게 되었고, 테오도르 황자님을 구해드렸습니다. 제가 잘못된 일을 한 겁니까?”
그렉 경의 눈을 직시하는 리키 경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기에 밀린 것인지 당황한 그렉이 리키 경 대신 테오도르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내가 언제 잘못된 일이라고 했나.”
“제가 수상해 보여서 정 못 믿으시겠거든 5황자님께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태도와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이 상황은 모두 우연이며 자신은 제국의 기사로서 황족을 보호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제가 테오도르 황자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극악무도한 진상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혹시 또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면서 저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리키 경은 그렉의 집요한 그물망을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갔다.
내내 조용히 있던 테오도르가 옆에서 거들었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기사가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기보다는 그가 나를 구한 사실에 감사해야 할 거야. 만약 내가 죽었다면 3기사단장 역시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야.”
“그, 그건!”
그렉이 식은땀을 흘렸다. 테오도르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7황자가 머무는 궁은 3기사단의 업무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덕꾸러기 황족일지라도 만약 그 황족이 죽으면 관련 담당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어려웠다.
목숨을 보전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직책에서 내쫓기며 귀족 사회에서 매장당할 일이었다. 그 자체로 귀족에게는 죽음에 준하는 처벌이다.
리키 경의 이어진 그다음 말이 쐐기를 박았다.
“테오도르 황자님은 다른 황족들께는 다 있는 호위 기사 한 명이 없더군요. 어찌 이런 일이 다 있는 건지……. 튀나르 경은 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아십니까?”
역으로 이번에는 리키 경이 물고 늘어졌다. 그의 말은 그렉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가 알기로 이 궁은 황실 제3기사단 담당이니 호위 기사 배정도 단장님 소관이 아닙니까? 혹시 직무 유기를 하신 건…….”
불시에 공격을 받은 그렉이 갑작스럽게 헛기침을 해 대며 리키 경의 말을 잽싸게 끊어 냈다.
“흠흠, 그건……!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네.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우리가 얼마나 바쁜지 아는가?! 그래, 어쨌든 경의 말은 잘 들었네.”
제대로 반박할 말이 없어지자,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은근슬쩍 노련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습격자들은 어떻게 됐지? 습격자들의 신분을 파악했는지도 궁금하군. 현장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하고 말이야.”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자네 말처럼 또 습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습격자들은 갑자기 물러났습니다. 아무래도 3기사단이 이리로 오는 것을 보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아, 모두 다섯 명이었습니다. 오시다가 혹시 못 보셨습니까?”
“코빼기도 못 봤네.”
다섯 명이나 상대하고도 멀끔한 리키 경을 쓱 훑어 내리며 그렉이 내심 속으로 놀랐다.
‘실력이 매우 뛰어난 것이 틀림없어. 역시 카일라니 기사라 이건가.’
더군다나 리키 경의 옷은 군데군데 칼에 스친 듯 찢어져 있고, 핏물이 조금 배어 있기는 했지만 본인의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렉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지 리키 경은 제 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습격자들의 배후나 그들이 누군지는 저도 모릅니다. 특징이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검은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테오도르 황자님을 공격한 건지는 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뒷배 없고, 가진 것도 없는 한미한 황자이니 공격받을 마땅한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반면에 그렉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경력에 해가 될 수 있는 이 사건에서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속으로 열심히 궁리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대답을 건성으로 했다.
“그래, 조사해 보면 알겠지. 그런데 그 검붉은 빛이 대체 뭐였는지 아는가?”
“고대 마도구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망칠 때 제 눈을 멀게 하려고요.”
정령석과 비슷하다는 말은 결코 꺼낼 수 없었기에 리키 경이 요령껏 둘러댔다.
테오도르를 보호하기 위해 계획을 짤 때, 검붉은 빛은 어느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순간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던 테오도르가 리키 경의 적절한 대답에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군.”
그렉이 쉽게 수긍했다. 그는 이러한 모든 흐름이 테오도르와 리키 경 측에서 사전에 의도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였다.
갑자기 테오도르가 손을 들어 그들이 지나온 반대편 어두운 복도를 가리켰다.
“아! 습격자들의 흔적을 보려거든 내 예전 방이 있는 저쪽으로 가 봐. 나는 너무 피곤해서 이제 좀 쉬어야겠어.”
그러고는 크게 하품을 했다. 변명이 아니라 정말 피곤해서 빨리 침대에 몸을 누이고 싶었다.
“정말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어서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그래야 키가 큽니다.”
리키 경이 테오도르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내가 잠들 때까지 경이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데……. 안 되나?”
무서운 일을 막 겪은 어린아이가 보일 법한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겁먹은 표정과 함께 자수정빛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연기임을 한 번에 눈치챈 리키 경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는 수사를 돕기 위해서 튀나르 경과 함께 그 방에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테오도르가 멀뚱히 서 있는 튀나르 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튀나르 경, 정말 리키 경이 필요해?”
간절한 눈빛에 튀나르 경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기회주의자이기는 했지만, 바닥까지 썩어 빠진 인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잃은 점수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튀나르 경은 선심을 쓰듯이 대답했다.
“중요한 사실들은 얼추 알게 되었으니 당장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추가적인 조사가 더 필요하면 나중에 따로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호출하시면 성심껏 응하겠습니다.”
리키 경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테오도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얼른 들어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테오도르와 리키 경이 먼저 움직이며 새 침실로 들어갔다.
그렉 역시 바로 등을 돌리며 사고 현장인 방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처음부터 주렁주렁 달고 온 부하 기사들이 따랐다.
한편 5황자인 헨리의 궁을 습격했던 습격자들은 제압당하자마자 모두 자살을 했다.
그곳에서는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황실 기사들은 한때 적들의 힘에 밀렸다.
그리하여 헨리의 몸에 상처가 날 뻔했던 것을 카일라니 기사들이 나서서 막아 냈다.
이렇게 황자가 둘씩이나 습격을 받는 일이 벌어지자, 세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궁 분위기는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살벌해졌다. 경비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