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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67)화 (167/214)

167화 

‘이런 낭패가!!’

상황을 파악한 습격자의 우두머리가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그것을 재빠르게 품 안에 갈무리했다.

공격을 막느라 그사이 유리병의 절반 이상이 비어 버렸지만 함부로 넘기거나 버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마커스 경이 상대의 가슴을 향해 검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우두머리가 몸을 비틀었지만 온전히 이를 피하기에는 살짝 늦었다.

파삭!

소중하게 챙긴 것이 무색하게도 옷자락을 뚫고 지나간 검에 유리병이 깨졌다.

유리병 안에 남아 있던 탁하고 검붉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며 옷을 적셨다.

그사이 어느덧 우두머리의 수하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제압을 당하거나 죽어서 쓰러졌다.

“젠장!”

마지막을 직감한 우두머리가 마커스 경의 공격을 겨우 받아쳤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급하게 허리춤을 더듬었다.

천 주머니 안의 돌처럼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망설임 없이 천 주머니를 손에 움켜쥐어 뜯어낸 우두머리가 그것을 자신의 가슴팍 쪽으로 가져가 맞대었다. 유리병이 깨진 부위였다.

찢어진 천 주머니 사이로 얼핏 드러난 거무튀튀한 돌에 검붉은 액체가 금세 닿았다.

파아악!

한순간이었다. 눈이 멀 것 같은 검붉은 빛이 순식간에 돌에서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순간, 마커스 경은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위험을 직감했다.

리키 경은 반사적으로 테오도르의 머리와 몸을 감싸 안으려 몸을 돌렸다.

검붉은 빛이 방 안의 모든 이들을 덮치며 집어삼키려는 위험천만한 순간의 찰나에 또 다른 색의 빛이 터졌다.

테오도르가 목에 걸고 있는 정령 목걸이에서였다. 따스한 황금빛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감싸며 불길한 검붉은 빛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

테오도르와 리키 경, 마커스 경과 카일라니 기사들은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에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더러는 손으로 두 눈을 비비었다.

뜨겁게 살갗을 태우며 끝없이 퍼져 나갈 것 같던 검붉은 빛은 서서히 황금빛에 밀려나며 부피가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열기로 붉게 부풀거나 달아올랐던 사람들의 피부에는 황금빛이 스며들었다.

포근하고 청량한 기운이 몸속에서 퍼져 나가더니 열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그에 따라 피부는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다.

심지어 모두의 몸에 난 자상까지도 차츰 아물어 갔다. 단 한 사람, 습격자인 우두머리를 제외하고.

“아!”

눈이 휘둥그레진 기사들이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더러는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신의 몸을 살펴보기도 했다.

테오도르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사들과 달리 습격자들에 의해 다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지만 몸에 남아 있던 흉터들이 단숨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보다 몸에 활기가 넘치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얼마 후, 거무튀튀한 돌에서는 검붉은 빛이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지닌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던 황금색 빛도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안 돼!!”

다 함께 몰살을 꿈꾸던 우두머리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절망의 괴성을 내질렀다.

그로 인해 우두머리의 손에 들려 있던 갓난아기 주먹만 한 작은 돌멩이가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부딪친 돌이 그 반동으로 몇 번 대굴대굴 굴러가다가 한 기사의 발에 툭 걸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서걱!

마커스 경이 우두머리의 목을 무자비하게 베어 냈다. 순식간에 목에서 분리가 된 머리가 떨어져 내려 돌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테오도르 황자님, 보지 마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리키 경이 자신의 커다란 손을 들어 테오도르의 두 눈을 급하게 가렸다. 그러나 섬뜩한 소리까지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배려에 테오도르는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사의 길을 택하고 검술 훈련을 받으면서 리키 경은 검사로서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에 대해서도 교육을 해 주곤 했었다.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처음 피를 봤을 때 정신적 타격을 최소화하면서 피에 굶주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괜찮아, 리키 경. 검을 든 이상 언젠가는 목격하게 될 광경인걸.”

“그래도 지금은 아닙니다. 더 늦게 겪으셔도 되는 일입니다. 이미 실패한 것 같지만요.”

어리기 때문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은 채 리키 경은 우직하게 손을 내리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그의 배려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사이 마커스 경과 카일라니 기사단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라 테오도르의 다른 감각 기관들이 예민해졌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옮기는 소음이 들리고,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 냄새가 서서히 옅어져 갔지만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우울해졌다.

역시 자신은 아직 많이 어리다는 분한 생각을 하며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먹이려고 한 게 렌시아라는 그 아이에게 먹인 약과 같은 것이었을까?”

“아마도 그럴 거라고 추측이 됩니다. 약병이 깨져 버리는 바람에 샘플을 챙기지 못해 무척 아쉽습니다. 그걸 잘 챙겼더라면 뭔지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상황이었는걸.”

리키 경이 자책을 하자, 테오도르가 다독였다.

그에 리키 경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눈이 가려진 상태라 테오도르는 볼 수 없었지만 말이다.

테오도르는 리키 경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오감이 무뎌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씩씩하게 괜찮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리키 경이 아니었다면 꼴사납게 토했을지도 모른다.

이내 리키 경은 불과 몇 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상기했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여전히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코 환상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황자님께서 가지고 계신 목걸이가 저희 모두를 살렸군요.”

“맞아. 나는 아직도 정말 믿기지가 않아.”

“저도 그렇습니다.”

테오도르가 제 목 근처를 더듬어 펜던트를 손안에 조심스럽게 꼭 그러쥐었다.

황금빛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왔던 사실을 일깨워 주듯 피부에 닿는 펜던트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록사나에게 또 커다란 도움을 받았어. 난 언제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록사나가 준 정령의 목걸이가 없었다면 자신들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렇게 이번에도 록사나는 자신을 도왔다.

반면에 자신은 쓰러진 록사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고작 병문안을 간 것밖에는. 테오도르의 작은 두 어깨가 축 처졌다.

리키 경이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테오도르의 몸을 자신을 향해 돌려세웠다.

테오도르가 초점을 잡기 위해 눈을 잠시 몇 번 깜박거렸다. 그리고 리키 경은 살짝 무릎을 굽혔다. 두 사람의 눈이 또렷이 마주쳤다.

“황자님께서 무탈하신 것이야말로 아벨리오 남작님을 돕는 일입니다. 만약 황자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남작님은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실 테니까요.”

리키 경이 테오도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 한참 어린데도 불구하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이 안타까웠다.

“분명 언젠가는 힘이 되어 주실 날이 올 테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위로가 가닿았는지 테오도르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다.

“리키 경의 말이 맞아. 나 반드시 멋진 어른으로 자라날 거야. 그래서 록사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될 거야!”

“네, 꼭 그렇게 되실 겁니다.”

테오도르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내 생각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에 대한 염려로 표정이 대번에 경직되었다.

“만약 헨리 형님께도 우리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어떻게 하지? 나와 같은 목걸이가 없을 텐데……. 혹시라도.”

“뭔가 저희와 같은 이변이 있었다면 보초병 임무를 맡은 기사가 신호를 했을 겁니다.”

보초병을 맡은 기사는 현장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 신호가 없었으니 5황자님 궁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게 확실합니다.”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리키 경이 말했다.

“게다가 황실 1기사단 속에는 저희 기사들이 섞여 있으니 5황자님께서도 무탈하실 겁니다.”

2황비 측에 정보를 주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카일라니 기사들을 황실 기사단으로 위장시켜 사전에 5황자 궁에 파견한 상태였다.

그러니 황실 1기사단이 뚫린다고 해도 적들은 결코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으리라.

“리키 경의 말을 믿어. 물론 카일라니 기사단의 실력도.”

테오도르가 수긍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5황자 헨리 역시 자신을 괴롭히던 형제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바랄 정도로 테오도르의 성정은 매몰차지 못했다.

어느덧, 방 안이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벽에 튄 자잘한 핏자국들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벽지를 모조리 다 뜯어내지 않는 한 말이다.

예산이랄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7황자 궁의 개보수는 언감생심 꿈꿀 수 없었다.

물론 테오도르가 남들 눈에 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궁을 방치하면서 예산을 늘려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게다가 리키 경은 테오도르의 비밀 호위 기사였기에 직접 나설 수가 없었다.

이내 리키 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황자님, 오늘은 물론 앞으로도 여기에서 주무시기는 곤란하실 것 같습니다.”

계속 머무르던 이 방에 테오도르가 혹시나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더욱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이참에 볕이 잘 드는 방으로 옮겨야겠어.”

걱정이 무색하게도 테오도르는 흔쾌히 방을 바꾸는 것을 수락했다.

기사들이 하나둘 방을 빠져나가자 테오도르도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리키 경이 그 뒤를 따랐다.

드디어 그 방을 벗어나는 테오도르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여기저기 부서진 창문 너머에서는 어둠이 한층 옅어지며 은은한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화음을 넣는 것처럼 복도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 방으로 하시겠습니까?”

“뒷산과 제일 가까운 방에 머물까 해.”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쪽 방들이 해도 잘 들고 위치도 좋습니다. 전에 방보다는 지내시기에 여러모로 훨씬 편하실 겁니다.”

앞으로는 궁의 정문이, 뒤로는 뒷산이 보이니 궁을 아우르는 위치였다.

또한 풍경 또한 빼어났다. 낡고 구석진 궁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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