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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66)화 (166/214)

166화 

【 그런다고 일어나겠습니까 】

“어어! 이것 좀 보십시오, 각하! 벨루카 님의 몸이 자라났습니다.”

“정말 그렇군.”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한 꺼풀 벗겨졌다. 알렉의 말처럼 밤사이 벨루카의 몸집이 훌쩍 커진 상태였다.

갓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강아지 같았었는데 지금은 다 자란 성견 정도의 크기였다.

물론 보통 말보다 조금 작았던 마지막 몸집에 비하면 한참 작았지만 청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알렉이 한 번 더 주의 깊게 잠든 벨루카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원래의 크기로 자라나시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속도로 보건대 하루 정도만 지나면 깨어나실 것 같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테리온의 곁에서 트레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래 걸리는 건 아닌지 밤새 걱정했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알렉 님, 정말이죠?! 하루 뒤에는 벨루카 님이 틀림없이 깨어나시는 거죠?”

아이린은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희소식에 대해 확인을 거듭했다.

“에이글과 함께 살펴보고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니 믿어도 될 것 같구나.”

알렉의 답변에 아이린의 시선이 곧장 창가 쪽에 자리하고 있는 에이글에게로 향했다.

에이글은 임무를 마치고 포상 휴가를 받았음에도 하루도 안 되어 남작저에 다시 들렀다.

록사나에 대한 염려뿐만 아니라 정령석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기에 가만히 앉아서 소식을 기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이글이 알렉의 말이 맞다고 짧게 대답해 주었다. 그 뒤에야 긴장으로 얼룩져 있던 아이린의 얼굴이 봄 햇살에 눈이 녹듯 스르르 풀어졌다.

어느덧 조금 전까지 긴장감으로 넘쳤던 방 안의 공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때였다. 내내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알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각하, 잠시 렌시아한테 가 봐도 되겠습니까? 피레아가 계속 붙어서 돌보는 중이긴 합니다만 제가 한 번은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현재 벨루카가 차도를 보이면서 록사나의 상황도 희망적이었다. 그렇기에 알렉은 이제 렌시아가 신경이 쓰이고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이종족들을 로웰 후작저에서 구출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렌시아는 급격한 신체 변화를 겪었다.

밤새도록 뼈가 뒤틀리고 생살이 찢기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더니 하루아침에 어린아이가 성인의 몸을 갖게 된 것이다.

그때 알렉은 내내 록사나 곁을 지키며 한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들로서는 고통스러워하는 렌시아에게 손을 쓸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남작저 별채에서 피레아가 그 아이를 밤낮으로 간호하며 그 곁을 지키고, 정체불명의 약을 분석하는 것밖에는.

오늘 잠시 별채에 들러 살펴본 에이글이 말하기를 오직 정령사인 록사나와 정령만이 렌시아를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강제로 육체적 성장을 이룬 렌시아는 수시로 눈물을 흘리며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은 즉시 아스테리온에게 보고가 이루어졌었기에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약의 분석 상황은 어떻지?”

“렌시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흙색 약을 먼저 분석했으나 진전이 미미해서 지금은 검은 약의 분석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알렉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무래도 정령의 힘과 관련된 약인 것 같은데 저희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 보니…….”

정령사의 도움 없이는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렇군.”

아스테리온이 곧바로 수긍을 했다.

그에 알렉이 송구하다는 듯이 바닥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의료 쪽으로 대륙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지만, 정령 관련해서는 문외한이나 진배없었다.

잠시 후, 알렉과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침대 쪽으로 향했다. 휘장에 가려져 있어서 록사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마음속으로 록사나의 얼굴을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약한 자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늘 지나치지 못하곤 했었다. 반면에 그는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약한 자들에게 항상 무심했었다.

단지 의무감에 사로잡혀 행동했던 것이다.

‘록사나, 그대가 깨어 있었다면 앞뒤 따지지 않고 당장 그 아이에게 달려갔겠지?’

지금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환청처럼 고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스테리온의 심장이 서서히 록사나를 닮아 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이런 자신의 변화를 깨닫지 못했다.

“렌시아에게 가 보도록 해.”

주치의의 복잡한 마음을 눈치챈 아스테리온의 입에서 흔쾌히 승낙의 말이 흘러나왔다.

알렉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럼 저는 이만 잠시 물러나 별채에 들렀다 오겠습니다.”

동시에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곧 돌아오겠다는 의사 표현도 놓치지 않았다.

방을 나서는 알렉의 뒤를 에이글이 말없이 따랐다. 그 역시 같은 이종족인 렌시아가 몹시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뒤를 이어 트레버도 밀린 일 처리를 위해 남작저에 마련된 공작저 전용 임시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하여 어느새 방 안에는 잠든 록사나와 벨루카를 제외하고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아스테리온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 록사나의 몸이 굳지 않도록 가느다란 손을 시작으로 서서히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행여 힘을 줘 그녀를 아프게 할까 싶어 힘 조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반듯한 그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쓰러지기 전까지 자신에게 보였던 그녀의 최근 태도 변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담백하게 변한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바늘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리고 아려 왔다.

‘그녀의 곁에 영원히 머물 수만 있다면 나를 남자가 아니라 친구로 바라본다고 해도 괜찮아.’

지금 정도의 관계를 회복한 것도 기적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고, 살아간다 해도 아스테리온에게는 그저 짐승들이 숨 쉬는 것처럼 무의미한 활동에 불과했다.

록사나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모습은 시시때때로 그의 마음을 소리 없이 갉아먹어 갔다.

그녀가 쓰러진 후 매 순간 타들어 가던 그의 속은 숯덩이처럼 까맣게 변해 버린 지 한참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간사하기도 하지.

벨루카가 곧 깨어날 거라는 희소식을 들었더니 록사나 역시 머지않아 싱그러운 초록빛 두 눈을 떠 보여 줄 거라는 믿음이 강해졌다.

동시에 바수어 부스러지기 직전이었던 그의 심장에서는 새살이 서서히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욕심이 그의 마음속에서 쑤욱 고개를 쳐들었다.

‘록사나, 조금 더 늦게 일어나도 좋으니까 제발 무사히 건강하게 깨어나 줘.’

미약한 온기를 품은 록사나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는 아스테리온의 손끝이 애달팠다.

그 곁에서 아이린은 조용히 자잘한 수발을 들었다. 전보다 표정이 한층 밝았다.

* * *

늦은 밤 황궁, 7황자가 머무는 허름하고 외진 궁을 향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며 다가갔다.

궁을 지키는 황군들이 단 한 명도 없어 접근하는 데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습격자들 중 한 명이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그러자 이를 신호로 다른 자들도 일제히 7황자 궁 안쪽 땅에 발을 내디뎠다.

궁에는 등불 하나 켜진 곳 없이 어둠 속에 묻혀 있어서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습격자들은 테오도르가 머무는 곳으로 추정되는 방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마치 양몰이를 하는 사나운 사냥개들 같았다.

한편 같은 시각, 이 같은 상황은 5황자 궁에서도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5황자 헨리의 궁은 테오도르가 머무는 궁과 확연하게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은 5황자 궁에는 촘촘하게 배치된 기사들과 병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또한 화려한 궁답게 딸린 정원을 비롯한 건물 내부에서는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습격자들은 까다로운 상황 속에서 어둠을 벗 삼아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했다.

다시 7황자 테오도르의 궁.

구석진 곳의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습격자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곧장 방 중앙에 놓인 침대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작은 체구의 소년이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어느새 습격자들이 침대 주변을 빙 둘러쌌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품속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병 속의 검은 액체가 출렁거리는 것이 달빛에 드러났다.

우두머리가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일행 중 한 명에게 테오도르 황자가 맞느냐는 듯이 눈으로 묻자, 상대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가 소년의 머리맡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일행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남자가 테오도르의 얼굴을 향해 순식간에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와 동시에 우두머리는 유리병의 마개를 열며 약을 먹이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남자가 드디어 테오도르의 얼굴을 막 붙들려는 찰나였다.

자수정의 보석 안이 번쩍 뜨였다. 테오도르가 순식간에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이에 습격자들이 순간적으로 당황을 했으나 프로들답게 하던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순탄치 못했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든 단도 하나가 테오도르를 붙들려던 남자의 손을 번개처럼 관통했다.

“악!!”

다른 단도들도 남자의 몸 여기저기에 꽂히며 붉은 피를 쏟아 내게 만들었다.

더러 단도를 쳐 내며 막아 내기는 했지만 다른 습격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르의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던 카일라니 기사들의 활약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리키 경이 테오도르를 훈련시키었고, 테오도르의 몸은 사전에 약속된 움직임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사이에 완전히 일어나서 습격자들의 빈틈을 이용해 침대 위에서 벗어났다.

리키 경이 아군 쪽으로 테오도르를 이끌며 안전하게 엄호했다.

갑작스러운 공격과 함께 목표물이 자신들의 포위망을 뚫고 단번에 벗어나자, 우두머리가 날카롭게 내질러진 상대의 검을 막으며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습격자는 네놈들이면서 우리한테 누군지를 묻다니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군.”

마커스 경이 우두머리와 검을 맞대는가 싶더니 상대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윽!”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난무하며 살점과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모두 습격자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기사들에게 빠르게 제압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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