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 *
다음 날, 어두컴컴한 새벽하늘을 뚫고 여섯 명의 조인족이 하늘을 날아 담장을 넘었다.
남작저 후원에 조용히 착지하며 단단하고 날카로운 발로 억세게 움켜쥐고 있던 것을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먼 길 운반해 오느라 다들 정말 수고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스테리온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공작님.”
“저희에게 이런 일은 식은 수프 마시기입니다.”
“별말씀을요.”
다른 용병들은 공작의 경어에 깜짝 놀랐다.
그와 달리 가장 피곤에 찌들어 있는 에이글의 표정은 한없이 차분하고 태평했다.
‘공작한테 경어를 다 듣다니 기분이 좋군.’
물론 속으로는 기분이 엄청 째졌다.
“우리는 너~무~ 피곤해서 이만 좀 쉬어야겠습니다. 날갯죽지도 좀 아파서 말이오.”
에이글이 몹시 피곤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어깨에 손을 올려 셀프 안마를 시전했다.
트레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요, 다들 몸보신들 하시면서 푹 좀 쉬셔야지요. 일주일간 수도 최고급 호텔에 쉴 곳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여기 이 시종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추후 보상도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최고급 호텔과 추후 보상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에이글과 용병대원들이 시종을 따라 이내 남작저를 벗어났다.
그사이 남작저 사용인들이 땅바닥에 놓인 정령석 상자들을 조심스럽게 챙겨서 하나도 빠짐없이 저택 안으로 옮겼다.
아스테리온도 그들을 따라 록사나의 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뒤, 록사나의 침실에는 한 무더기의 정령석 상자와 여러 사람들로 들어찼다.
“정령석을 모두 침대 위에 둘 수는 없으니 정령석과 벨루카 님을 이쪽으로 옮기도록 하지요.”
알렉이 록사나의 침대 왼쪽 빈 공간을 가리켰다. 그의 지시에 정령석 상자들이 다시 옮겨졌다.
정령석을 모두 꺼내 놓자, 수북하게 쌓이며 작은 녹색 동산을 이루었다. 잠든 벨루카가 담긴 바구니를 그 위에 통째로 올려놓았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기 늑대와 정령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으로는 정령석에서 어떤 변화도 찾아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알렉이 시선을 돌렸다.
“에이글, 뭔가 변화가 좀 느껴집니까?”
“음.”
힘의 흐름을 살피기 위해 에이글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주변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에이글이 눈을 번쩍 떴다.
“정령석에 담긴 힘이 벨루카 님 쪽으로 희미하게나마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휴, 다행이군.”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와 미소가 감돌았다. 딱딱하던 아스테리온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각하, 벨루카 님의 성장이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스테리온이 알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 * *
황태자 궁에 든 로웰 후작이 도노반을 마주했다.
도노반이 로웰 후작의 보고에 분노하며 탁자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쾅!
찻잔의 물이 넘치면서 이리저리 튀었다.
“이종족들이 연기처럼 다 사라졌다니 그게 말이 돼? 틀림없이 카일라니 공작의 소행이겠군!”
“저 또한 그자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매번 우리 앞을 가로막다니!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연구는 거의 최종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제는 이종족들이 없어도 그다지 상관없습니다.”
애초부터 이종족들을 수도로 이송한 것은 황태자에게 성공적인 연구의 결과물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로웰 후작이 주도적으로 행해 온 이종족 실험은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대륙의 이종족들을 싹쓸이하다시피 잡아들여 시설에 몰래 감금한 것도 대체적으로 인간보다 이종족들의 신체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을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최강 무력 집단으로 만듦으로써 대륙 최고의 병력을 가질 수 있고, 그 성공은 거의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어린 개체의 신체적 성장을 급속하게 이뤄 내면서 외형적 특징을 변형시키는 방법도 뜻하지 않게 얻은 결과였다.
즉 이종족 아이가 단기간에 어른으로 거듭나게 하면서 눈과 머리색을 바꾸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그와 손을 잡은 도노반은 특히 이 외형적 특징 변형에 큰 관심을 보여 왔었다.
깨끗한 은발과 자수정 안은 피를 짙게 물려받은 황족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징인데 그걸 타고나지 못한 도노반은 이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이종족을 통해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으니 성인이 된 자신도 외형적 변화를 통해 은발과 자수정 안을 갖고 싶어 했으며 가능하리라 믿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로웰 후작이 속으로 생각했다.
도노반은 이종족 병력을 등에 업고, 훗날 황족의 외형적 특징까지 완벽하게 가진 리온 제국의 절대적인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해.’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같되 로웰 후작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달랐다. 그의 뜻은 더 큰 곳에 있었다.
로웰 후작이 번들거리는 자신의 눈을 내리깔며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다만…….”
“뭔가? 말해 보게.”
답지 않게 로웰 후작이 뜸을 들이며 망설이자, 도노반의 눈썹이 저절로 삐뚜름해졌다. 마음에 안 든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의 실험체가 꼭 필요합니다. 그것도 전하와 같은 피를 가진 황족으로요.”
“나랑 같은 피라고 하면 설마 내 아들 막시말리언을 말하는 것인가? 후작에겐 외손자이기도 하지.”
“아닙니다. 황제 페하의 피를 이은 전하의 형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기 서린 도노반의 목소리에 로웰 후작이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하긴, 두 명이라고 했으니. 내게 자식이라곤 막시밀리언 하나뿐이지.”
표정이 풀린 도노반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라도 황족을 손대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야. 후작이 생각한 인물이라도 있나?”
도노반은 머릿속에 은발에 자수정 안을 가진 인물이 한 명 번뜩 떠올랐지만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책임을 로웰 후작에게로 떠넘겼다.
“5황자와 7황자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에 손톱 밑 가시 같은 테오도르가 물망에 올랐다.
또한 5황자 헨리는 2황비 소생으로 그와 마찬가지로 황족의 외형적 특징을 제대로 타고나지 못했다. 2황비를 닮아 금발에 회색빛 눈이었다.
‘게다가 헨리는 살아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든든한 외가를 등에 업고 있으나 훗날 내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하지.’
도노반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뜻하지 않게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버릴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기도 했다.
“황족들을 잡아 가둬 놓고 실험을 진행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그들을 가두는 감옥이 황궁이 될 테니 그런 염려는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로웰 후작의 답변에 도노반이 무슨 말이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에 로웰 후작이 자신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도노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걱정들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 * *
로웰 후작은 그렇게 도노반과의 협상을 무사히 마치고 후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이번에 이종족들을 다수 잃은 것이 뼈아프긴 하지만 시설에서 다시 끌어오면 그만이야.’
게다가 황족 둘을 실험체로 얻게 되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전 황태자를 죽이고 겨우 앞만 볼 줄 아는 멍청한 도노반을 황태자로 밀어주기를 잘했어.’
도노반은 자신이 황위에 무사히 오를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로웰 후작 역시 바라는 바였다.
‘반드시 도노반이 황제의 자리에 앉아야만 해. 그래야 우리의 대업을 이루기 수월해져.’
도노반이 황제에 오른 뒤의 계획을 떠올리며 로웰 후작이 콧수염을 매만졌다.
잠시 후, 마차가 로웰 후작저에 도착했다. 로웰 후작이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새로운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하가 며칠 전 살수 길드를 파견해 카일라니 기사단을 습격했던 일에 대해서 보고를 올렸다.
“카일라니 공작가가 비밀리에 운반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차를 불태워 없앴습니다. 정말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공작가 기사들이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뭔지 알아내지 못한 게 아쉽지는 하지만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짓는 로웰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수하가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런데 저희 쪽 피해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때마침 공작가에서 기사들을 추가로 파견하여 살수 길드가 전멸했습니다.”
탕! 로웰 후작이 손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뭐라고?! 단 한 명도 산 자가 없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카일라니 기사단이 워낙 뛰어난 실력자들이다 보니…….”
수하가 고개를 한껏 수그렸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겨우 결과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따로 꼬리를 붙인 덕분이었다.
‘만약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수하는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쯧쯧. 제법 쓸 만한 사냥개들을 잃었군.”
로웰 후작이 고용한 살수 길드는 어둠의 세계에서 업계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카일라니 기사단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 안이 껄끄러웠다.
“조만간 실험을 다시 진행할 것이다. 그러니 뒷일을 해 줄 다른 자들을 찾아보도록 해. 황궁에 드나들기 용이한 자들로 말이야.”
귀찮기는 하지만 살수 길드를 대신할 자들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귀중한 패를 하나 잃었다는 로웰 후작의 아쉬움은 금세 휘발되었다.
“알겠습니다.”
집무실을 나서는 수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로웰 후작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뭔가 좀 찜찜하단 말이지. 설마 배신을 한 건 아니겠지?’
요즘 들어 계속 실패 소식만 듣다 보니 내부에서 정보가 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의심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수족에게도 향했다.
로웰 후작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수 길들이고 키운 수하였다. 그렇기에 그 성정이나 속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능력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배신할 자는 절대 아니었다.
그의 생각이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카일라니 기사단이 운반하던 것은 도대체 뭐였을까? 빼돌린 이종족들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그들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군.’
로웰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장으로 다가가 비밀 통로를 열고는 마력 등을 챙겨 들고 그 아래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