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떠올릴 사람들의 얼굴이 더 이상 없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어디 하늘에서 길이 뚝 안 떨어지려나?”
그때였다.
화악.
갑자기 밝은 빛이 나타나 록사나의 발치에 와 닿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어두운 정령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이정표임을 깨달았다.
록사나는 그 빛을 따라갔다. 이내 문처럼 생긴 공간에 다다랐고, 그녀가 그 문을 넘어섰다.
그리하여 록사나는 드디어 정령계를 벗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게 되었다.
* * *
카우 슬립 후작 령.
사방이 어두컴컴한 와중에 숲을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고요한 정적을 깨면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 마차가 확실해?”
“선발대가 말한 그 마차가 분명 틀림없습니다.”
“좋아. 모두 준비하도록.”
우두머리의 명령과 수신호에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자들이 자세를 더욱 낮추며 전방을 주시했다.
자신들을 향해 열심히 달려오는 마차에 그들의 신경이 온통 쏠려 있었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그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수적으로 그들이 한참 우세했지만 상대는 기사 한 명이 일당백이라는 카일라니 기사단의 기사였기에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어느덧, 마차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금이다!!”
까마귀 떼처럼 검은 복면의 괴한들이 일시에 마차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부석에서 말을 몰던 마르셀이 살기를 감지하고는 말고삐를 확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말들이 놀라며 날뛰었다.
쿵!
그 바람에 마차가 옆으로 쓰러지며 넘어갔다.
“이런, 젠장!”
마차를 호위하던 이들의 얼굴이 단숨에 파랗게 질리며 사색이 되었다.
마커스 경과 호위들은 난데없이 비처럼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조건 마차를 사수하라!”
그 와중에도 마커스 경의 명령에 따라 물건을 지키기 위해 마차를 중심으로 대형을 이루며 적들의 공격을 쉴 새 없이 받아쳤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곳곳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땅 위와 주변 나무, 풀잎에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야!”
마르셀 경이 이를 악물고는 자신에게 짓쳐들어오는 상대의 가슴에 칼을 깊숙이 쑤셔 박았다.
서걱.
그의 칼에 심장을 꿰뚫린 순간에도 적은 독하게도 검을 휘둘렀다. 이를 마르셀 경이 간발의 차이로 피해 냈다.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까마귀 떼처럼 몰려든 적들은 아무리 베어 내고 베어 내도 끝없이 달려들었다.
상대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머릿수에는 당할 수 없는 것인지 마커스 경 일행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쭉 뻗어진 칼날이 마차에 닿을 만큼 그들은 포위된 상태였다.
“죽어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마커스 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적의 허벅지와 팔을 쉴 틈 없이 베어 넘기며 마차를 사수하려 안간힘을 썼다.
곁눈질로 보니 사망자는 없는 듯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호위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행 모두 몰살당하고 마차를 그대로 빼앗길 처지였다.
“오냐,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마커스 경이 이를 악물고는 적들을 차곡차곡 베어 넘겼다. 그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죽은 자들이 수두룩했다.
“괴물 같은 놈.”
그의 모습을 본 괴한이 혀를 내둘렀다.
“네놈이 이 까마귀들 대장이냐?”
마커스 경의 고개가 대번에 돌아가며 상대에게 칼을 겨누며 곧바로 달려들었다.
괴한이 압도적인 힘 차이에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검을 겨우 막아 내었다.
이에 마커스 경은 괴한을 더욱 몰아치며 그의 온몸에 칼자국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괴한의 수하들이 마커스 경에게 동시에 달려들어 공격했다.
“조금만 더 버팁시다! 저기 지원군이 오고 있어요.”
저 멀리 하얀 깃발을 든 검은 형체를 발견한 호위 한 명이 소리 높여 외쳤다.
삐이익.
그 말을 증명하듯 그들의 머리 위 하늘에서는 새 한 마리가 빙글빙글 돌면서 반가운 울음소리를 연신 토해 냈다.
카일라니 기사단의 지원군 신호였다.
‘망할!!’
고개를 돌려 숲이 끝나는 쪽을 바라본 괴한이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괴한이 재빠르게 수하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남은 수가 처음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이들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하나뿐이지.’
괴한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퇴각을 명했다. 검은 복장의 적들이 일시에 뒤로 물러났다.
“어딜 감히!”
마르셀 경뿐만 아니라 모든 호위들이 달아나는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 한 놈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자비 없이 적들을 쓰러 넘어뜨렸다. 그러다 보니 마차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쨍그랑. 쐐액!
던진 유리병에 담겨 있던 기름 냄새가 숲이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수십 개의 불화살이 날아가 마차에 박혔다.
“안 돼! 다들 마차로!”
“당장 불을 꺼라!”
마르셀 경과 마커스 경이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호위들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어떻게든 최대한 막아라!”
그러자 때를 노린 적들이 그들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이 마차에 다가가 불을 끄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괴한과 그의 수하들은 사실 마차에 무엇이 들었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확보할 수 없다면 파괴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다.
적을 떨쳐 내며 마커스 경 일행이 마차에 다다랐지만 붉은 화마는 어느새 마차를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적의 공격을 떨쳐 낸 이들이 너도나도 바닥의 흙을 퍼서 마차에 뿌려 댔다. 어떤 이들은 겉옷을 벗어 불길을 덮었다.
하지만 이미 거세진 불길을 단숨에 끄기에는 무리였다.
‘됐다!’
그 광경을 본 괴한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퇴각 신호를 알렸다. 아니, 알리려 했다.
어느 순간 지척까지 다가온 지원군 한 명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괴한의 목을 서걱 베어 내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이내 괴한의 몸뚱이가 기울면서 목이 떨어져 내렸고, 흙바닥을 뒹굴었다.
남은 수하들의 운명도 그와 같았다. 차례대로 쓰러지며 숲길에 붉은 융단을 깔았다.
어느덧, 숲에는 적막이 찾아들었다.
그 사이에서 마차가 온몸을 불사르며 타닥타닥 불타오르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메웠다.
마커스 경 일행은 바닥에 주저앉아 서서히 뼈대를 드러내는 마차를 얼빠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모두 다 하나같이 넋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이틀만 가면 수도였는데, 이젠 다 죽었다.”
호위 중 가장 막내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자보다 더 무서운 주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일의 책임자인 마커스 경과 마르셀 경은 허허롭게 웃을 따름이었다. 개고생 끝에 허무만 남았다.
* * *
쾅!
어스름한 새벽녘, 트레버가 문을 세게 박차고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이곳은 록사나의 침실이 아닌 공작의 임시 집무실이었다. 그래도 아스테리온의 두 눈이 대번에 찌푸려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급보입니다!”
트레버의 그 한마디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단숨에 초조한 낯으로 변했다.
“무슨 일이야?”
“정령석을 운반하던 마차가 급습당했습니다!”
아스테리온이 책상을 짚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뭐라고?! 정령석은 무사한 거지?”
“그것이……. 모두 불탔습니다.”
트레버가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콰직!
멀쩡하던 책상 귀퉁이가 맥없이 부서져 내렸다. 분노 어린 눈빛으로 활활 불타오르는 아스테리온의 손에 의해서.
얼굴이 사색이 된 트레버가 허겁지겁 두 손을 들어 올려 내저었다.
“각하, 제발 일단 너무 흥분하시지 마시고 제 말을 제발 끝까지 들어 주십시오.”
“듣고 있어, 제대로 말해!”
“예상대로 마커스 경이 운반하던 마차가 급습을 당했습니다. 적들을 모두 척살했으나 그 전에 적들이 마차에 기름을 뿌려 불을 질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마차에 실린 가짜 정령석이 모두 불탔다는 말이지?”
“네, 맞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 아스테리온이 난생처음으로 트레버를 향해 있는 힘껏 물건을 집어 던졌다.
“으악, 왜 그러십니까? 소식은 언제나 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하는 것 아닙니까!”
와장창!
벽에 부딪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났다.
‘그동안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 운명은…….’
공격을 간신히 피한 트레버의 눈길이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한 잔해로 향했다. 그는 간담이 절로 서늘해졌다. 서둘러 제 살길을 모색했다.
아스테리온이 이번에는 어떤 걸 던질까 고민하는 찰나였다. 트레버가 외쳤다.
“진짜 정령석은 잘 오고 있습니다!”
그사이 잘 벼려진 단검을 찾아 들고 막 던지려고 하던 아스테리온이 손을 즉각 내렸다.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그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디쯤 도착했지?”
“마커스 경보다 앞서 출발해서 지금은 카우 슬립 후작 령을 거의 벗어난 상태입니다. 하루 안으로 수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트레버가 눈치를 보며 아스테리온의 앞에 슬그머니 다가가 전서구 쪽지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펼쳐 든 아스테리온의 미간이 단숨에 쫙 펴지면서 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하루만 버티면 정령석이 도착해.’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심장이 기쁨으로 요동쳤다.
지난 며칠간 긴박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로웰 후작 측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들은 역으로 함정을 팠다.
마커스 경과 마르셀 경은 지점에 배치되어 있던 호위를 보충해 마차에 평범한 돌덩이인 가짜 정령석을 싣고 예정대로 움직였다.
그들을 지원할 카일라니 기사단이 수도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에이글은 진짜 정령석을 가지고 다른 경로로 따로 움직였다.
물론 아무리 힘이 센 그라도 네다섯 사람 무게 정도 되는 정령석을 통째로 들고서 하늘을 장거리 비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속도도 육상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정 거리인 4분의 1 지점까지는 적들의 눈을 피하면서 길이 없는 단거리 루트를 따라 에이글이 혼자서 정령석을 운반하는 것으로 했다.
이쪽에서는 독수리 용병대 중 가장 힘이 세고 잘 나는 조인족 다섯 명을 선별해서 서둘러 급파했다.
그들은 4분의 1 지점에서 에이글을 만나 정령석을 나눠서 들고 하늘을 날아서 수도까지 운반해 오기로 한 것이다.
결국 적의 시선을 피하며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