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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62)화 (162/214)

162화 

아스테리온이 테오도르를 남자로서 경계한다고 보기에는 7황자는 무척 어렸다. 그러니까 어린 소년 황자를 연적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음, 테오도르 황자님께서 아무리 아벨리오 남작님을 보고 싶어 하셔도 지금 상황이 좀 무리이긴 하지요.”

차마 테오도로의 편을 들 수가 없어서 프란시스가 아스테리온의 편을 들었다.

대외적으로 록사나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너무 무리를 한 나머지 건강이 나빠졌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당분간 외출을 삼가고 손님도 받지 않으며 자택에서 요양한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예의를 차리며 방문을 자제하는 어른들과는 다르게 어린 황자는 걱정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테오도르를 보좌하는 리키 경에게로 곧장 불똥이 튀었다.

“리키 경은 대체 안 말리고 뭐 했는지……. 어쨌든 방문은 거절해.”

아스테리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거절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프란시스가 설득을 포기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황궁 밖에 한 번도 나와 보지 못한 황자님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프란시스는 테오도르만 보면 아스테리온과 잘 어울려 다녔던 전 황태자 네이든이 떠올라서 어린 황자에게 마음이 늘 약해지곤 했었다.

7황자가 네이든을 많이 닮아서 더 그랬다. 물론 둘 다 황제를 많이 빼닮아서 그런 것이지만.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 속에서 아스테리온이 마음속 초조함을 달랬다.

‘앞으로 3~4일 정도만 더 기다리면 돼.’

그의 시선이 남작저 정문 너머로 향했다.

거기서 하루 정도는 더 늦어져도 상관없으니 제발 온전한 형태로 무사히 정령석을 가져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 * *

늦은 밤, 오늘도 아스테리온은 록사나 옆에 놓여 있는 의자, 그의 전용 고정석에 앉아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비단 같은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쥐고는 만지작거렸다.

“아까보다 더 예뻐진 거 아니야?”

한 시간 전에 봤을 때보다 정말 더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손바닥보다 작은 얼굴에는 앙증맞은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자리하고 있었고 피부는 어찌나 뽀얀지 눈이 부셨다.

만약 허연 입술에 핏기가 돌았다면 단지 깊은 잠에 든 것뿐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고왔다.

아스테리온이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조그맣고 둥그런 통 하나를 꺼내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 뒤, 품에서 꺼낸 손수건에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물병을 들어서 기울여서 적셨다. 그것으로 손을, 특히 오른손 검지를 정성들여 닦았다.

아스테리온이 다시 통을 집어 들어 집고는 그것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하얀 반투명 연고 같은 것이 드러났다. 그것을 검지에 듬뿍 묻혔다.

그의 손가락이 록사나의 입술에 슬며시 가 닿았다. 말캉한 부드러움이 느껴져 손가락 끝과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저 입술을 마음껏 탐하던 적이 있었는데…….’

탐할수록 갈증이 일었고, 아무리 그녀의 입술을 탐해도 질리지가 않았었다.

‘이 무슨!! 쓰러진 사람을 두고 불경한 생각을 하다니!’

자신의 행태에 화들짝 놀란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며 불경한 생각들을 털어 내려 애를 썼다.

그렇지 않아도 입술 보호제를 가져다주면서 아이린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았었다. 거기에 더해 의심의 눈초리를 가득 보냈었다.

간신히 원래의 목적을 상기한 그가 록사나의 입술에 보호제를 꼼꼼하게 발라 주었다. 그녀의 입술이 부르트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자 허옇던 록사나의 입술이 잘 익어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과일처럼 반짝반짝해졌다. 무척이나 탐스러웠다.

꼴깍.

아스테리온의 목울대가 심하게 출렁였다.

‘하, 정말 구제 불능이야.’

그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좌절했다.

커다란 두 손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깊이 파고들었다. 고운 금빛 실타래가 그의 거친 손길에 삐죽삐죽 솟아오르며 이리저리 쥐어뜯겼다.

아스테리온이 한참 동안 자책의 늪에 빠져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프란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무슨 손님?!”

아스테리온이 성질이 잔뜩 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의 두 눈은 시퍼렇게 빛났다.

“우선 제가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마지못해 허락하며 아스테리온이 침대 기둥에 묶여 있는 끈을 풀어내 휘장을 쳤다. 그러자 누워 있는 록사나의 모습이 휘장에 가려졌다.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는 주군 곁으로 걸어간 프란시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테오도르 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고?!”

아스테리온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사고를 한창 칠 나이라지만, 기어이 어린 황자가 제 고집을 꺾지 않고 온 모양이었다.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온……. 아니지,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지. 이리로 모셔 와.”

한숨을 내쉰 아스테리온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방 중앙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갔던 프란시스가 두 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록사나!”

테오도르가 아스테리온을 쌩하니 지나쳐 곧장 침대로 달려갔다.

기습적인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급하게 황자를 잡으려고 손을 쭉 내뻗은 그 상태 그대로 아스테리온이 벙찐 얼굴을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휘장을 확 열어젖혀 록사나를 보려던 테오도르의 시도는 프레드릭의 재빠른 제지에 미수에 그쳤다.

“황자 전하, 허락도 없이 레이디께서 주무시는 모습을 함부로 엿봐서는 안 됩니다.”

짐짓 엄한 꾸지람이 더해지며, 프레드릭이 테오도르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고는 아스테리온이 있는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그럼 어찌하여 카일라니 공작은 레이디의 방에 허락도 없이 있는 것인가? 분명 두 사람은 이혼을 했으니 이제 완전 남남일 텐데 말이야.”

테오도르가 볼을 한껏 부풀리고는 볼멘소리를 했다.

그에 아스테리온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프란시스와 리키 경은 빵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 때문에 뱃가죽이 너무 당겼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아벨리오 남작님은 가족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 각하께서 보호자로 계시는 겁니다. 두 분은 중요한 사업 파트너이시니까요.”

프란시스의 적절한 옹호에 아스테리온의 날카롭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대신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테오도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테오도르가 씩씩대며 맞은편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황자의 뒤로 리키 경이 자리를 잡았다.

뾰족한 눈을 한 테오도르가 아스테리온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7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동안 무탈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아스테리온이 다리를 꼬며 방만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저는 잘 지냈습니다, 카일라니 공작.”

“리키 경이 전하를 잘 보좌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번보다 신수가 훨씬 더 훤해지셨습니다.”

리키 경이 카일라니 공작가 소속이니 내 덕분에 잘 지낸 거라는 말을 돌려 하는 것이었다.

“뭐, 그래요. 안 그랬다면 공작의 안목을 의심할 뻔했습니다.”

어린 황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맞받아치는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새끼 사자도 역시 사자라는 것인가.’

간만에 그의 입가에 밝고 기운찬 미소가 감돌았다. 7황자의 성장이 기꺼웠다.

테오도르가 잠시 침대 쪽에 애타는 눈길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려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공작, 많이 바쁘실 텐데 이만 공작저로 건너가 보세요. 저도 충분히 록사나의 보호자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황궁 출입도 자유롭지 않은 황자께서 어떻게 말입니까? 게다가 황실에서의 입지 또한 불안정하시지 않습니까.”

아스테리온의 허를 찌르는 지적에 몹시 당황한 테오도르가 입술을 짓씹었다. 분했지만 사실이었고, 자신이 처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긴 해도…….”

어떻게든 반박하려는 황자의 입을 아스테리온이 단단히 틀어막았다.

“수많은 시선들이 록사나에게 쏠려 있습니다. 뭔가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는 떼로 몰려들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지금 그들이 아벨리오 남작저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테오도르는 한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한 마리의 맹수의 왕이 저를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며 보며 그에게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교로 단단히 붙어 있는 것 같던 테오도르의 입이 서서히 떨어졌다.

“…카일라니 공작인 그대가, 이곳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까요.”

테오도르는 자신의 부족함과 아스테리온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자신과 공작의 격차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앞날이 창창하십니다. 그러니 저를 뛰어넘는 힘을 기르십시오. 전하께서는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처참한 마음으로 공작을 마주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당황하고 놀라 두 눈을 껌벅거렸다. 종국에는 두 볼을 빨갛게 붉혔다.

아스테리온이 그를 향해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득의양양해하거나 오만한 표정이 결코 아니었다.

자신에게 호의 가득한 남자 어른의 존재에 그늘져 어둡고 응달져 추웠던 테오도르의 마음 한구석에 빛이 따사롭게 내리쬐었다.

그곳은 이내 양지바른 곳으로 변모했다.

테오도르는 오지 말라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방금 전에 저질렀던 무례한 행동들을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렇더라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공작.”

아스테리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테오도르의 은빛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앗!”

불시의 공격에 당황한 테오도르가 쩔쩔맸다. 공작의 접촉이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그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서 떨어질 때까지 이를 묵묵히 감내하였다. 심장 쪽이 자꾸 간질거려서 긁고 싶었지만 두 주먹 불끈 쥐고 꾹 참았다.

한바탕 두 사람의 유치 찬란(?)한 기 싸움이 막을 내리고 테오도르에게 잠시나마 록사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다.

물론 단둘만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소년의 옆에는 카일라니 공작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록사나가 로웰 후작저에서 이종족들을 구출하는 과정 중에 지하 감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리키 경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때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자신이 록사나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면 리키 경은 결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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