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탁자 위에 수북하던 음식은 어느 순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져 빈 그릇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꺼억. 잘 먹었다. 아, 미안하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하던 에이글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두 사람에게 사과를 건넸다.
기사라서 그런지 두 사람은 용병인 그와는 행동거지가 달랐다. 그보다 더 조심스럽다고나 할까.
“잘 드셨으면 됐습니다.”
“저도 잘 먹었더니 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가 민망하지 않게 두 사람이 배려의 말을 해 주자, 에이글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빈 그릇들을 트레이 위로 옮겼다. 마커스 경이 트레이를 끌어 문밖으로 내놓았다.
“자, 밥도 다 먹었으니 내일을 위해서 어서 잡시다.”
에이글이 몸을 일으켰다. 씻지도 않은 상태로 나란히 놓인 세 개의 침대 중 가장 왼쪽에 놓여 있는 침대 위로 가장 먼저 폴짝 뛰어들었다.
“오늘 하루도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들 중 가장 막내인 마르셀 경의 인사에 에이글은 벌써 눈을 감은 상태로 고개를 까닥였고, 마르셀 경은 말로써 받아 주었다.
“경도 정말 수고 많았소. 마차 모느라 우리보다 더 피곤할 텐데 어서 편히 쉬시오.”
이내 두 사람도 에이글처럼 침대를 하나씩 차지했다. 가운데에 마르셀 경, 그의 오른쪽에는 마커스 경이 몸을 뉘었다.
사실 그들은 일주일 넘게 이어지는 강행군에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씻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중요한 임무 중에는 잘 씻지 못하는 것이 밥 먹는 것처럼 기사들에게도 일상이었다.
마르셀 경이 눈을 감기 전 침대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와 마커스 경 침대 사이에 아까 들고 올라온 커다란 상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카일라니 공작가의 전서구를 이용한 정보 전달력과 수도에서 캠든으로 이어지는 도시와 마을마다 준비된 숙소와 설비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세 사람을 위해 모든 숙식과 지치지 않게 이동할 수 있는 말들과 마차가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덕분에 빠른 시간 안에 이동하며 캠든 영지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에이글의 활약도 한몫 단단히 했다.
캠든 영지 도착 3일 전쯤이었다. 에이글이 카일라니 공작의 서신을 가지고 하늘을 날아서 먼저 캠든 성으로 향했다.
서신은 곧바로 캠든 성 집사인 프레드릭에게로 전해졌다. 예정보다 귀환이 늦어지는 록사나를 대신하여 그가 캠든 성과 영지를 총괄하고 있었다.
즉각 서신 내용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에이글에게 정령석들을 직접 보여 주었다.
정령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에이글은 그것이 정령석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후 프레드릭과 에이글의 주도하에 정령석은 쿠엔틴 백작령으로 넘어가는 캠든 영지 경계 부근으로 곧바로 옮겨졌다.
그와 거의 비슷하게 마르셀 경과 마커스 경 역시 그곳에 도착했다.
프레드릭은 마르셀 경을 붙들고 혼수상태에 빠진 록사나의 상태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정령석 운반은 일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프레드릭은 록사나의 회복과 무사 귀환을 빌며 주름진 눈가를 누르며 눈물만 삼켰더랬다.
발 빠른 도움과 움직임 덕분에 정령석 운반에 따른 이동 기간을 상당히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카우 슬립 후작 령에 들어선다. 지금 속도대로라면 거기에서 3일 정도만 더 가면 수도에 당도하게 된다.
‘영주님은 괜찮으실까?’
마르셀 경은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은 듯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멀쩡했던 록사나가 쓰러진 이후로부터 9일이나 지났다. 아니, 이제 자정이 지났으니 10일째였다.
거의 다 와 가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르셀 경이 잠에 빠져들었다.
방 안에는 어느덧 에이글의 코 고는 소리와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한편 제논은 마커스 경 일행이 있는 방을 나와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의 등장에 마구간지기들이 알은척을 해 왔다.
“저희가 어련히 알아서 잘 관리하고 준비할 텐데 믿지 못해서 오셨습니까?”
마커스 일행의 말과 마차를 마구간으로 옮긴 해리가 지친 말들에게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더 부어 주면서 투덜거렸다.
그의 투정에 제논이 씩 웃으면서 해리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클었다.
“해리,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
“아, 쫌. 그만하십시오. 스타일 망가집니다.”
“이 밤중에 어디 가려고 스타일 타령이야.”
두 사람이 사이좋게 서로의 말꼬리를 잡았다.
그때 나이 지긋한 노인이 다가와서는 해리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악!”
엄습하는 고통에 해리가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두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흰소리 말고 건초 더 가져와서 말들 잠자리 좀 살펴 주거라.”
“할아범은 맨날 나만 때려! 아주 그냥 내가 동네북이지.”
“인석아, 안 가냐?”
“갑니다, 가요. 간다고요.”
간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며 올리버 할아범이 해리의 뒤통수에 대고는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제논을 바라보았다.
“집사님, 사용한 말들은 제일 튼튼하고 빠른 놈들로다가 세 마리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차는 좋은 것보다는 적당한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새벽이 되면 말들은 장시간 장거리를 달려야 했고, 말을 보는 눈이나 관리에 있어서는 이 도시에서 올리버 할아범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마차는 그의 제안처럼 가급적 남들 눈에 잘 띄지 않고 무난한 것이 좋았다.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올리버 할아범.”
제논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말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최상의 상태로 아주 잘 관리되고 있었다.
“오늘 도착한 말들은 많이 고생을 한 아이들이니 조금 더 신경 써 주시기를 잘 부탁합니다.”
굳이 당부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남겼다. 말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올리버 할아범이라면 귀여운 손자들 돌보듯 말들을 살뜰히 보살필 터였다.
“여부가 있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할아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제논이 올리버 할아범과 인사를 주고받고는 그를 뒤로하고 마구간을 나섰다.
그때였다.
삐익.
고요한 밤, 새소리가 제논의 귀에 닿았다.
“이런!”
제논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우아한 집사의 몸가짐을 단숨에 벗어던졌다. 그러고는 저택을 향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집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콕콕. 콕콕. 콕콕.
제논이 창문으로 다가가고 있었음에도 바깥 창문턱에 걸터앉은 새는 연신 창문을 쪼아 댔다.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보채지 말고 아주 조금만 기다려라. 곧 열어 줄 테니 말이야.”
걸쇠를 풀고 창문을 열자, 곧바로 전서구가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어디 보자, 오늘은 무슨 소식을 들고 왔니?”
제논이 익숙하게 책상 위 촛대 위에 턱 하니 내려앉은 새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마력 손전등 하나를 손에 들고 새의 발을 비추었다. 그러자 빨간 표식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런!”
방금까지도 풀어졌던 그의 표정이 싹 변하며 진지해졌다. 그는 곧바로 새의 발에 매달린 것을 풀어내 펼쳐 보았다.
순식간에 내용을 확인한 그가 허둥지둥대면서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단잠에 빠져 있던 마커스 경 일행이 요란스러운 소음을 감지하고는 눈을 번쩍 뜨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순식간에 각자의 손에 검을 들고는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우당탕탕. 벌컥!
제논이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뭡…….”
“빨간 급보입니다.”
마커스 경이 질문을 채 끝맺기 전에 제논이 먼저 소리쳤다. 그의 팔을 든 쪽 손가락 사이로 작은 전서구 쪽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마커스 경이 곧장 칼을 거두고 제논에게서 전서구 종이를 건네받았다. 그가 오른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의 알 부분을 돌려 쪽지 위에 비추었다.
그 내용을 살핀 마커스 경의 눈이 단숨에 와락 구겨졌다.
“무슨 일입니까, 마커스 경.”
“대체 뭔 내용이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마르셀 경과 에이글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더 이상 정령석 운송이 어렵게 됐습니다.”
마커스 경이 침음을 삼키며 말했다.
세 사람, 아니, 제논까지 네 사람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들에게 이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 * *
아벨리오 남작저.
“정령석은 차질 없이 운송되고 있겠지?”
“네, 각하. 오늘 새벽 전서구를 받았습니다. 카우 슬립 후작 령에 들어서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카일라니 기사단 일부를 위장해서 카우 슬립 후작 령으로 보낸다.”
공작가 기사단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가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바로 그리하겠습니다.”
트레버가 밖으로 나가고 아스테리온이 창가로 걸어갔다. 그가 미풍이 솔솔 불어오는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어느덧 정원은 록사나의 눈을 꼭 닮은 빛깔로 옷을 갈아입고는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생일인 6월 봄의 끝자락, 바깥의 날씨 역시 점점 더워지며 열기를 품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고, 한낮에는 따갑지만 록사나를 만나고 난 이후로 아스테리온은 이 시기를 가장 좋아했다.
문득 이맘때쯤 피크닉을 즐기던 록사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혼 초 그녀는 피크닉을 함께 하자고 그에게 자주 권유를 하곤 했었다. 그는 늘 차갑게 거절했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은 입 안이 썼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가 자취를 감췄다.
‘한 번쯤 같이했으면 좋았을걸.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랬다면 혼자 보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덜 외롭고 쓸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똑.
잠시 후, 프란시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스테리온이 남작저에 눌러앉은 관계로 요즘 그는 공작저와 남작저를 오가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각하, 리키 경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아스테리온이 그가 건넨 봉투를 받아 들어 펼쳤다. 금빛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렸다.
“오지 말라고 그래.”
프란시스가 아스테리온이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신을 집어 들고는 읽어 보았다.
공작에게 올리기 전 이미 확인한 내용이었지만 아스테리온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요소가 있었는지 다시 꼼꼼히 정독하며 훑어보았다.
병문안을 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보기에 딱히 거슬리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