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60)화 (160/214)

160화 

- 우리가 떨어져 있었던 그 시간 동안에도 나는 늘 너와 함께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거고. 설마, 그동안 날 잊고 있었던 거야?

“아니야! 절대로 널 잊은 건 없어. 단 한 번도!”

록사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샤일리가 낮게 웃었다. 그가 명료하게 말했다.

- 록시,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할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도, 내가 영원히 사라질까 두려워하지도 마. 네가 날 여기서 구해 줄 거잖아. 그렇지?

“응, 꼭 그럴 거야! 반드시!!”

록사나가 결연한 얼굴로 샤일리의 두 손을 꼭 붙들었다. 열의가 담긴 그녀의 두 눈은 한여름의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래야 샤일리와 정령들을 구할 수 있어!’

록사나는 샤일리를 만난 이 모든 일이 꿈이라고 자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결코 꿈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원형 구에 힘을 빼앗기고 샤일리의 기운을 느낀 것이 운명의 수레바퀴가 아닐까 싶었다.

“샤,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을 내게 말해 줘. 내가 모르는 것을 너는 알고 있지?”

- 그렇지 않아도 다 이야기할 생각이었어.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앉아서 이야기하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점점 서 있는 것이 버거워진 샤일리가 그녀의 손을 아래로 잡아끌었다.

그래서 둘은 나란히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잠시 후,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록사나와 그녀의 부모님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먼 옛날부터 그날 어째서 공격을 받게 되었는지까지.

록사나가 최근에 알게 된 사실도 있었지만 전혀 모르고 있던 중요한 이야기도 꽤 되었다.

샤일리가 이야기를 다 마쳤을 때, 록사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큰 사건은 과거에서 현재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록사나의 이야기를 들은 샤일리 역시 굉장히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 예상했던 대로 그들의 악행은 끊이지 않고 여전히 계속 이어지고 있었구나.

살얼음 가득 낀 목소리로 샤일리가 이를 으득 갈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록사나도 그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희망차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샤가 준 정보를 통해 어쩌면 조만간 그들의 꼬리를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거 같아.”

샤일리와 다른 정령들을 구할 수 있는 확실한 단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어.

샤일리가 손을 뻗어 록사나의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를 믿었지만 염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록사나가 미소 지었다.

둘이 긴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푸는 사이, 어둠 때문에 전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던 이 공간에서도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정령계의 시간은 바깥세상인 인간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어느 순간, 이 사실을 다시금 떠올린 샤일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록시, 넌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돼. 어서 가.

“나 조금 더 있다가 가고 싶은데.”

갑작스런 축객령에 록사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만에 만난 샤일리인데.’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샤일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단호하고 엄하게 말했다.

- 더 이상은 안 돼. 여기 오래 머물다가는 너까지 우리처럼 될 수 있어. 그러니까 빨리 어서 여길 떠나!

샤일리의 얼굴이 겁에 질린 것처럼 새하얘지자, 록사나는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도 자연스레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어?”

- 전처럼 오래 걸리지 않고 곧 만날 거야.

그의 두 눈도 촉촉하게 서서히 젖어들어 갔다.

샤일리가 먼저 일어나더니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별의 슬픔을 삼키며 두 팔을 뻗어 록사나를 꼭 끌어안았다.

- 기다릴게.

여전히 기약 없는 이별이었지만 예전처럼 막막하지도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번 이별은 그저 찰나에 불과할 테니까, 그리고 그 이후로는 결코 이별하지 않을 거다.

‘그때쯤이면 아직은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록사나에게도 말해 줄 수 있어.’

샤일리는 록사나의 곁에서 그녀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 곁에서 함께하며 오래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의 소원이었다.

“응! 반드시 꼭 데리러 올게. 아프지 말고 그동안 잘 지내야 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록사나가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샤일리가 그녀를 자신에게서 떼어 냈다.

- 나가는 길은 네가 여기 올 때와 비슷해. 그러니까 너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 길이 보이지 않고 어둡다고 무서워하지 말고.

“응.”

록사나의 몸을 돌려세운 샤일리가 그녀의 등을 어둠 속으로 떠밀었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했다. 내딛는 그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록사나는 당장에라도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샤일리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그를 두고 이곳을 떠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카일라니 공작이 그 여자 집에 일주일 가까이 머물고 있다고?”

수하의 보고에 로웰 후작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아벨리오 남작이 과로로 쓰러져서 간호 중이라고 합니다.”

“허!”

기가 찬 로웰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카일라니 공작이 이혼 후 보여 온 행태를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못내 찝찝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 로웰 후작저에 정체 모를 세력들이 들이닥쳐 갇혀 있던 이종족들을 모두 빼 갔다. 심지어 별채에 있던 것까지도.

눈 뜨고 코가 베인 격인 로웰 후작이 그때를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배후가 카일라니 공작일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귀신같이 누군가를 빼내 갈 수 있는 실력은 리온 제국에서 카일라니 공작가를 제외하고는 전무했고, 자신의 정적이기도 했다.

‘시기가 참으로 기묘하단 말이야. 록사나 아벨리오가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지 않기 시작한 것도 그 언저리쯤 되었지.’

어떤 확신이 로웰 후작의 머리를 스쳤다. 그가 손짓해 수하를 가까이 불렀다.

수하가 두어 발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그에게 다가섰다.

“그 여자가 정말 과로로 쓰러진 게 맞아?”

의심이 순식간에 고개를 내밀고 싹을 틔웠다.

“소문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나 두문불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도 그래.”

후작의 물음에 대답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던 수하가 가슴 한쪽을 쓸어내렸다.

후작의 마음에 드는 적절한 대답을 했는지 이번에는 어떤 물건도 날아오지 않았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 와. 카일라니 공작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분명 그 계집도 관련되어 있을 거야.”

어느새 후작의 얼굴과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떠나자, 로웰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면을 꽉 차지하고 있는 마호가니 책장으로 다가섰다.

그가 가지런히 정렬된 책 중에서 몇 개의 책을 순차적으로 건드렸다. 그러자 책장 한쪽이 쓰윽 열리며 시커먼 입을 벌렸다.

로웰 후작이 손에 마력 등을 들고는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면서 생각했다.

‘여기를 발견하지 못해서 참 다행이야. 머저리 같은 카일라니 공작이 앞으로도 이곳을 알아채기에는 무리지, 암.’

* * *

해 질 녘, 마르셀 경이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고 있었다. 마커스 경은 마차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이를 호위했다.

삐이익!

하늘에서는 커다란 독수리가 마차 주위를 선회하며 하늘을 날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독수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집이 무척이나 거대했다.

독수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팔과 다리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지상에서 너무 높이 날고 있어서 육안으로는 이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점점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음에도 마차는 멈추지 않고 작은 마을을 통과하고, 달이 떴을 때도 작은 산길을 내달렸다.

달이 밤하늘 정중앙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마차가 한 도시에 접어들더니 어느 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후, 드디어 멈춰 섰다.

하늘을 날던 에이글이 때에 맞춰 마차 옆으로 착지했다. 워낙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수고했다는 의미를 담아 서로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마르셀 경이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 문을 열고 그 안에 실려 있는 커다란 상자를 끌어냈다.

그러고는 옆에 선 마커스 경과 함께 양쪽을 잡고 들어 올려 저택 안으로 옮겼다. 그 뒤를 에이글이 주변을 살피며 따라 들어갔다.

세 사람이 저택에 들어섰는데도 실내의 등은 꺼진 채로 그대로였고, 마중 나오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괘념치 않는 모습이었다.

한편 덩그러니 남겨진 말들과 마차에 한 사람이 소리 없이 다가섰다. 그가 마부석에 올라 마차를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그때 방에 들어선 마커스 경이 자신들의 마차가 사라지는 모습을 창문으로 엿보았다.

“말과 마차가 이동했습니까?”

“그렇소.”

에이글의 질문에 마커스 경이 때 이르게 두꺼운 천으로 된 커튼을 손에서 놓으며 말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뒤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들어오시오.”

마커스 경의 허락이 떨어지자, 20대로 보이는 남자가 트레이를 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커스 경.”

“제논,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남자를 본 마커스 경이 반갑게 맞이했다.

“저야 늘 잘 지내지요. 그나저나 많이 시장하실 텐데 어서 식사들 하시지요.”

제논이 방 중앙에 놓인 탁자로 다가가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재빠르게 내려놓기 시작했다.

방금 막 준비한 음식인지 수프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아벨리오 기사단의 마르셀 경이고, 이쪽은 독수리 용병대 단장 에이글일세. 그리고 여기는 이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 제논입니다.”

마커스 경이 일행들과 제논을 서로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마르셀 경, 에이글 단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서 이리 오셔서 식사하시지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소. 그리고 음식 준비해 줘서 고맙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세 사람은 음식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맛있게 드십시오.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제논이 물러나고 세 사람이 본격적으로 늦은 저녁을 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점심도 건너뛰다시피 하며 마차를 몰면서, 달리면서, 혹은 하늘을 날면서 마른 육포로 허기만 겨우 채웠기에 사실 점심 겸 저녁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세 사람은 허겁지겁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