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정령이 록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누군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 그들도 이곳에는 못 들어와.
“그들이 누군데?”
이들을 여기에 가둔 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넌 알고 있어. 그리고 곧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혹시 로웰 후작이나 육망성 세력인 건가?’
정령들을 단체로 감금할 정도면 상상도 못 할 커다란 힘을 지닌 세력들이 분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 내가 제약을 깼다는 이야기는 또 뭐야?”
- 우리는 우리가 정령이라는 걸 스스로 밝힐 수 없었어. 그걸 네가 깨 준 거야. 그 증거로 이곳에 빛이 돌아왔어.
이 말은 잘 이해가 되었다. 록사나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까의 상황과는 다르게 정령은 자신이 정령임을 직접 밝힐 수 있었고, 이들의 모습을 가리던 짙은 어둠이 걷혔으니까.
자신이 그들의 존재를 강하게 확신했기에 제약이 풀리게 된 것 같았다.
“여기는 혹시 정령계인 거야?”
- 맞아. 정확히는 정령계의 일부야. 가장 사악한 힘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지.
록사나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정령계는 마냥 순수한 기운만 있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긴, 세상 어느 곳이든 원래의 힘에 반대되는 힘들이 존재하기 마련 아닐까.’
“나를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건 내가 너희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이니?”
- 응!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어린 정령의 얼굴이 급 시무룩해졌다. 이에 록사나가 자신이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을 했다.
“내가 아직 힘을 다 되찾지 못해서 그런 거야?”
-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은 너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어. 제약이 다 안 풀려서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을 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스스로 잘 생각해 봐. 네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를 말이야.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
록사나가 차근차근 최근의 기억을 더듬었다. 로웰 후작저에 갇힌 이종족들의 구출을 펼치던 일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거기서 지하 감옥 5층까지 내려갔다가 까만 돌기둥들을 보게 되었지. 그리고 정중앙에 놓여 있던 원형 구에 손을 대었고 내 힘을 빼앗겼어. 그리고 거기에서……!’
떠올랐다. 원형 구에서 느껴졌던 익숙한 힘.
록사나가 고개를 번쩍 들며 부르짖었다.
“샤일리!!”
그건 분명 12년 전에 그녀의 눈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샤일리의 기운이었다.
- 드디어 기억해 냈구나!
정령이 환하게 웃으며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초조했다. 녹안이 불안하게 흔들거렸다.
“이곳에 샤일리도 갇혀 있는 거야?”
- 그래, 그도 이곳에 갇혀 있어. 우리보다 더 깊숙한 곳에.
정령이 고개를 한 번 짧고 굵게 끄덕이고는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곳이었다.
록사나가 땅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미친 듯이 안쪽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그녀에게 자리를 비키며 곧장 길을 터 주었다. 그들의 표정은 서서히 환희로 물들어 가며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 이제 우리 곧 나갈 수 있어!
- 조금만 참으면 돼.
- 약속의 날이 머지않았어!!
그때 어린 정령이 점점 멀어져 가는 록사나의 등 뒤에다 대고 크게 외쳤다.
- 꼭 성공해야 해!
모든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자, 정령계의 희망, 또한 그녀는 인간 세계의 등불이기도 했다.
【 모두 불탔습니다 】
헉헉. 헉헉. 헉헉.
어둠 속으로 거침없이 달려 들어간 록사나의 거친 숨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샤일리가 저기에 있어! 드디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폭주했다. 단 한시도 잊은 적 없는 애타게 그리운 그녀의 정령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의 끝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록사나가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벽에 기댄 이의 형체가 서서히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도달하기까지 채 다 기다리지 못하고 록사나가 목이 터져라 소리쳐 그를 불렀다.
“샤일리! 샤아~!”
숙여져 있던 상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남자가 당황했는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자는 자신을 향해 힘껏 달려오는 여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여자가 그를 향해 서서히 가까워져 왔다.
남자의 눈이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크게 확 벌어졌다. 이내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익숙한 향기가 파도처럼 밀려오며 그의 온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남자가 두 팔을 들어 올려 비상하기 위해 날개를 펼치듯 활짝 펼쳤다.
스무 걸음, 열 걸음, 다섯 걸음, 세 걸음,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록사나가 남자의 품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와락!
남자의 두 팔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 안았다. 록사나도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샤~, 샤일리. 흑.”
그녀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리더니 기어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토해 냈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되뇌었다.
남자의 가슴이 위아래로 격하게 들썩거리더니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 …안녕, 록시.
남자, 샤일리가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한 손으로는 품에 안은 록사나의 등을 연신 쓸어내렸다.
- 드디어 우리 다시 만났네. 보고 싶었어.
“흑. 나, 나……. 엉엉.”
록사나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더욱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 우리 록시, 나 모르는 사이에 다 큰 성인이 된 것 같은데 아직 덜 자랐나 봐. 쿡쿡.
샤일리의 짓궂은 놀림에도 그녀의 울음은 전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할 따름이었다.
-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 안 보여 줄 거야? 그러면 나 너무 서운할 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샤일리는 록사나를 강제로 제게서 떼어 낼 전혀 생각이 없었다.
품에 안은 따뜻한 체온이 이것이 절대 꿈이 아닌 현실임을 명백하게 일깨워 주었다.
“샤~ 샤, 일리.”
울음이 조금은 잦아든 록사나가 샤일리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마구 비비었다.
- 쿡쿡. 어리광쟁이.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록사나가 서서히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샤일리,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샤일리가 록사나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샤일리는 나만큼은 아닐 거야. 너무 그리워서 내가 얼마나 매일 밤마다 울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더 보고 싶어 했다고.”
록사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경쟁하듯 말했다. 이제는 다 자라서 어린아이도 아닌데 자꾸 자신도 모르게 투정을 부리게 된다.
- 키득키득. 그렇다고 해 두지, 나의 계약자님.
“피~ 그런 게 아니라 진짜야!”
- 알아.
그제야 록사나가 배시시 웃었다.
‘어릴 때랑 여전히 똑같네.’
샤일리는 몸만 자랐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소녀 시절의 미소를 그대로 간직한 어른이 된 록사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상상한 그대로 자랐다고 생각했다.
록사나가 목이 꺾어져라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 샤일리를 올려다보았다.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다!”
12년 전에는 분명 자신과 키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령은 인간보다도 성장이 훨씬 더딘 편이었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샤일리는 마치 그녀와 똑같이 나이를 먹은 것처럼 키가 훌쩍 자라서 성인 남성의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테리온과 나란히 서도 절대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그래. 넌 별로 안 자랐고.
“뭐라고?! 봐 봐, 나 얼마나 컸다고.”
록사나가 샤일리의 품에서 빠져나와 제자리에서 핑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이 보라고.
- 음, 조금?
마지못해 샤일리가 인정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는 꼬마 계약자였다.
그녀가 자신의 품을 벗어날 때부터 허전함을 느낀 샤일리가 그녀를 자신의 곁으로 잡아당겼다.
절그럭.
땅에 부딪치는 쇠사슬 소리에 록사나의 몸이 바짝 굳었고, 얼굴은 너무나 처연해졌다.
록사나가 샤일리와 간격을 벌려 마주 보고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을 살폈다.
사지에 묵직한 쇠사슬들이 매달려 있었다. 다른 정령들이 하고 있던 것보다 더 굵직했다.
새싹 같은 두 눈이 세차게 흔들리며 눈물이 차오르자, 샤일리가 그녀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 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네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대체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네게 이런 거야. 대체 무엇 때문에, 왜?!”
급기야 록사나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독기를 품었다. 적들이 지금 눈앞에 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찢어발길 듯한 기세였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이것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 줄 거야. 평생토록 영원히!”
표독스럽게 말했지만 샤일리에게는 그저 아기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는 것처럼 한없이 귀여웠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 응. 꼭 그렇게 해 줘야 해.
“당연하지! 샤, 나만 믿어.”
록사나가 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러다가 어느덧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고통이 그림자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나를 보호하느라 많은 힘을 써서 이렇게 된 거지?”
- 내가 많은 힘을 썼던 건 맞지만 결코 너 때문이 아니야, 록시.
샤일리가 록사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도 샤일리와 정령들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는 것과 마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록사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샤일리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때 느꼈던 절망감이 목 끝까지 다시 차올랐다.
“알아, 그런데도 그 생각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어.”
혼자 깨어난 순간부터 그랬다.
결코 평범한 습격이 아니었다. 대체 부모님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시게 된 걸까?
게다가 샤일리는? 그녀의 가족과 함께한 사람들 역시도 한꺼번에 자신의 곁을 떠났다. 그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어쩌면 나 때문일까? 그런 걸까? 어느 순간부터는,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지난 세월 애써 잊고 살았지만 그 죄책감이 옅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차마 다 드러내지 못한 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샤일리가 싱그러운 초록 숲을 닮은 록사나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 스카일라와 세스, 그리고 다른 소중한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났지만 난 여전히 네 곁에 있어.
그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에게도 누군가의 죽음은 무겁고 아픈 것이었다. 마음을 추스르고는 자신의 진심을 록사나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