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두 사람의 위로와 노력에 아스테리온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런, 내가 위로라는 걸 다 받아 보는군.”
아스테리온은 가슴에 묵직하게 얹어져 있던 돌덩이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자 아이린과 알렉의 마음도 한층 가뿐해졌다.
* * *
록사나는 끝도 없이 어두운 공간을 헤매고 있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거야?’
한참 동안 걸은 것 같은데 출구는 물론 빛 한 줄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걷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시야는 컴컴하기만 한데 어디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낯설고 스산한 소리가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처음에는 하나였다.
몇 걸음 걸으니 다른 소리가, 또 한 발 나아가자 또 다른 소리가 더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의 소음이 되어 웽웽거렸다.
소리들은 제발 들어 달라는 듯 그녀의 귓가를 때리며 머릿속까지 헤집어 댔다.
“윽, 머리 아파.”
이대로 귀를 막고 무시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들어 주지 않으면 계속 그녀를 괴롭힐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어둠 속을 헤매게 된 이유일지도 몰랐다.
록사나는 그것들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 귀를 잔뜩 기울였다.
- 여… 와. 그래, …기야. …를 꼭… 와야…….
- 맞… 이쪽……. 우…는 모두 …에 갇… 있어.
- 제발, 우리… …줘.
여러 소리가 한데 뒤섞여서 소음처럼 들려와 록사나는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못해 록사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제발 한 명만 이야기해 줄래?! 여러 명이 한꺼번에 말하니까 하나도 못 알아듣겠단 말이야!”
그 순간 모든 소리가 한 번에 뚝 끊겼다. 어둠 속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수런거리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공간을 메웠다. 마치 자기네끼리 서로 누가 이야기를 할지 의견을 나누는 것처럼.
잠시 후, 어떤 형체 같은 것 하나가 록사나의 앞에 섰다. 짙은 어둠으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록사나는 그렇다고 느꼈다.
그녀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는지 아주 가까운 앞쪽에서 보다 뚜렷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말소리보다는 록사나의 머릿속에서 직접적으로 울리는 소리였다.
- 있지, 내 목소리가 들리니?
“응, 잘 들려. 그런데 넌 누구야?”
상대방이 말을 놓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 우리는 오랫동안 널 기다려 왔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먼 옛날부터 말이야.
상대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록사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했다.
이에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대체 어떻게 대화를 해 나갈까 싶었기 때문이다.
록사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기 말만 할 것 같던 상대의 목소리가 그녀의 한숨을 기점으로 뚝 멈췄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록사나는 상대방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제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됐니?”
- 응응. 말 잘 들을게.
그녀의 진중한 물음에 작은 형체가 고개를 마구 위아래로 끄덕였다.
록사나가 판단하기에 이들, 그리고 눈앞에 작은 형체는 그녀가 자신들의 말을 들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단서를 붙였다.
“좋아. 내가 묻는 말에 잘 대답해 주면 나도 너희들의 말을 잘 들어 줄게. 어때?”
- 좋아!
내내 다소 음침했던 목소리에 활기가 돌았다. 더군다나 한껏 신이 난 것처럼 들렸다.
- 네가 궁금한 게 뭔데? 뭐든지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록사나가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너랑, 너희들은 누구니?”
- 나는 나고, 우리는 우리야.
발랄한 말소리였지만 그녀는 머리에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벨루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처음 벨루카가 그녀와 소통을 할 때를 떠올리며 록사나가 가슴을 내리쳤다. 정말 답답해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어둠 속만 무한히 헤맬 것 같은 불길함이 엄습했다.
‘자, 우선 진정하자.’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록사나가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그녀가 이어서 아무 말도 없으니까 불안했는지 순식간에 소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목소리가 소리를 빽 지르자 멈췄다.
- 질문은 다 끝났어?
작은 형체의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짜증 나는 마음을 가라앉힌 록사나가 대꾸했다.
“아니. 다시 한번 물을게. 너희는 인간이니, 이종족이니, 아니면 정령이니? 그것도 아니면 다른 존재니?”
- 맞아! 우리는 …야!
작은 형체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록사나에게는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말이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너희가 뭐라고?”
- 우리는 …야!
아! 록사나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시 물어본다고 해도 명확하게 들릴 것 같지도 않았다.
참, 이상했다. 저들은 분명 제대로 말하는 것 같은데 중요한 단어를 말할 때마다 누군가 방해를 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뭔가 다를 수를 써야만 했다. 즉, 똑바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를 수를 써야만 했다.
잠시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린 록사나가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여러 번 물어봐서 미안한데 다시 물을게. 네, 아니오로만 대답해 줘. 만약 그것도 어렵다면 ‘맞아’나 ‘틀려’로 해도 좋고. 이것도 안 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그때 가서 내가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말이야.”
- 알았어. 네, 아니오. 맞아, 틀려. 말 안 하기.
록사나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작은 형체가 그녀가 했던 말을 간략하게 반복했다.
“자, 그럼 너희는 인간이니? 혹시 전에는 인간이었는데 죽어서 지금은 영혼이 되었다거나?”
- 아니오. 둘 다 아니야.
“알았어. 아니면 이종족이니?”
- 틀려.
“그래, 이종족은 아니구나. 너희들 정령이니?”
- …….
지금 침묵을 한 것이 맞나 싶어서 록사나가 대놓고 물었다.
“지금 대답 안 한 거 맞지?”
- 맞아, 맞아.
- 네, 네, 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록사나는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들이 정령이라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너희들이 정말 정령이라고?”
- …….
“아!”
정령들의 침묵 뒤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기운과 그들의 기운과 공명했다. 이로써 명확해졌다. 이들은 정말로 정령이었다.
록사나는 아까부터 들었던 기시감과 의문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런데 어째서 제대로 대답하지를 못할까?’
흡사 그들은 단체로 어떤 제약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록사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면 된다.
“너희들이 누군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 너희들은 정령이야!”
파앗!
록사나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눈부신 빛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파삭.
뭔가 깨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순식간에 어둠이 싹 걷히는 것이 눈꺼풀 너머에서 느껴졌다. 그에 록사나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맙소사!!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온몸이 단단한 쇠사슬과 쇠밧줄에 꽁꽁 결박되어 있는 정령들이었다.
동굴 같은 공간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채로 말이다.
록사나는 기겁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커다란 충격에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반짝이고 청량한 정령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노역형에 처한 죄수들처럼 그들은 초췌하고 피골이 상접했다.
더러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눈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법 눈이 맑고 또랑또랑한 정령들도 있었다.
“너, 너희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니?”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록사나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정령들에게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한 정령의 발목에 감긴 굵은 쇠사슬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당연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에 들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그것은 묵직했고 무척이나 단단했다.
급한 마음에 그녀가 맨손으로 이를 끊어 내 보려고 잡아당기거나 쇠사슬을 마구 내리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정령의 기운까지 끌어올렸지만 그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힘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쇠사슬은 무슨 짓을 해도 그녀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었다.
철커덩철커덩.
쇠사슬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는 처절했다.
“왜 안 되는 거야?! 대체 왜?”
록사나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깃들었다. 격렬한 움직임에 금세 지친 그녀가 숨을 헉헉대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다리에 힘마저 풀린 록사나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칠었던 숨이 어느 정도 편해지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주변의 정령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처지보다도 더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령들은 순수한 존재들이었다.
록사나의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처럼 몹시 아려 왔다.
그때 뾰족한 귀에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작은 정령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기다란 쇠사슬에 양손이 결박당한 채였다.
“아까 나와 직접 대화했던 정령이구나?!”
확신이 담긴 그녀의 물음에 정령이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 맞아, 록사나.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 우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널 기다려 왔으니까.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말이야.
“뭐라고?”
록사나는 어린 정령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정령의 말은 마치 그녀가 태어날 것을 예상했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기로 정령에게는 예언의 힘 같은 건 없는데 말이다.
- 이곳에 와 줘서 고마워, 록사나. 그리고 제약을 깨 준 것도 말이야.
“나는 내 의지로 이곳에 오지 않았어. 어쩌다 보니 이곳에 있더라고.”
-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의 의지가 없었다면 이곳에 결코 들어오지 못했을 거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
정령이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가 들어올 수 있는데?”
- 정령하고 너.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