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다이아몬드는 그저 원석일 뿐이다. 록사나의 힘이 담긴 다이아몬드야말로 진짜 정령석이다!”
아스테리온이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의 파란 눈에 강한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알렉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한 말이 알 듯 모를 듯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다. 다이아몬드는 그저 원석 그 자체로는 하나의 돌에 불과해. 거기에 정령의 힘이 담겨야만 진짜 정령석이 되는 거지.”
아스테리온이 가슴을 들썩이고는 한 명씩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을 이었다.
“록사나가 다이아몬드에 힘을 불어 넣었을 때 그것이 초록색으로 물들며 빛이 났다. 그때 비로소 진짜 정령석이 된 거지! 그래서 이종족 실험 시설과 연결될 수 있었던 거고 말이야.”
“아!”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얻으며 아이린과 알렉, 다른 사람들이 놀람과 함께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약 다이아몬드 원석을 정령석으로 오해한 채 그대로 가져왔었더라면…….
“저희가 잘못 짚어 정말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각하께서 늦지 않게 바로잡아 주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알렉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배어 있는 땀방울을 훔쳐 냈다.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정말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어.’
아이린은 자책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록사나가 정령석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가 정령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 정령석이 있다면 벨루카 님을 하루라도 빨리 깨울 수 있을 겁니다.”
알렉의 뒤를 이어 방금 전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 아이린이 잔뜩 들뜨고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벨루카 님의 도움을 받아 결국에는 남작님도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시게 될 거고요.”
얼음처럼 꽁꽁 얼었던 땅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단단하게 다져졌던 흙을 뚫고 올라온 희망이 연둣빛 싹을 활짝 틔웠다.
이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우중충하게 굳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잔뜩 감돌았다.
아스테리온이 마커스 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의 기사에게 지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마커스 경, 단 한 개도 빠짐없이 모든 정령석을 이곳으로 다 가져오도록 해.”
록사나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지는 지금 같은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인 건지 하늘이 도운 건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종족 실험 시설을 탐색하고 추후 구조를 진행하기 위해서 거기에 사용할 정령석들을 미리 잔뜩 만들어서 비축해 두었었다.
그 정령석들이 캠든 성 창고에 아직 꽤나 많이 남아 있을 터였다.
‘넉넉하게 많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조바심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정령석 하나하나가 무척 아쉬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종족 실험 시설에 대한 탐색은 당분간 잠정 중단한다.”
정령석이 없으면 그곳에 드나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록사나를 깨우는 일이었다.
“네, 명을 받듭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무사히 수도로 가져오겠습니다.”
마커스 경이 오른손을 자신의 심장 쪽에 올리며 기사의 경례를 했다.
아스테리온이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마르셀 경과 에이글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르셀 경과 에이글도 함께 가도록 해.”
사람들이 모두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수도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보다 정령석을 가져오는 임무가 훨씬 낫다고 이를 반기는 에이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르셀 경은 아벨리오 남작가 소속에다가 캠든 영지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남작가의 외부 인물인 마커스 경 혼자 가는 것보다는 마르셀 경과 함께 가는 것이 정령석을 받아 가져오는 데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글의 동행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완벽한 외부인인지라 오히려 의심을 사지는 않을까 심히 우려되었다.
“에이글은 정령의 기운을 잘 느낄 수 있어. 게다가 하늘을 날 수 있으니까 운송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여차하면 큰 도움이 될 거야.”
“맞는 말씀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납득한 사람들이 단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준비되는 대로 바로 캠든으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서둘러서 돌아오겠습니다.”
“잘 부탁하지.”
간곡한 표정으로 부탁을 한 아스테리온에게 인사를 한 후, 마커스 경을 필두로 한 마르셀 경과 에이글이 서둘러 응접실을 떠났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응접실에 남은 사람들은 각자 마음속으로 그들의 무사 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셋 다 무력이 뛰어나니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마는 정령석이 무사히 남작저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이 쉽게 놓이지 않았다.
* * *
트레버가 초췌한 모습인 자신의 주군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살이 내린 얼굴선이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지. 너무 늦지 않게 방법을 찾게 되어서 말이야.’
안 그랬다면 그의 주군은 애가 닳고 닳아 록사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아스테리온이 맞은편에 앉은 소녀를 건너다보았다. 소녀는 록사나처럼 체구가 무척이나 작았다.
그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봄 햇살처럼 따스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고맙다, 아이린. 정말 기특하구나.”
아이린은 뜻밖에 전해진 감사 인사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공작인 그가 자신에게 무려 고개까지 숙였다. 그러자 소녀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공작님. 이러지 마세요.”
고개를 들지 않는 공작의 몸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허둥지둥거리는 아이린의 모습에 트레버가 피식 웃었다. 알렉 역시 입꼬리를 실룩였다.
“각하, 최고의 공을 세운 이를 너무 고문하시는 것 아닙니까?”
트레버의 핀잔에 아스테리온이 즉각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그와 아이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감사 인사가 어째서 고문인 거지?”
“상대를 곤란하게 하시는데 고문이 아니고 대체 뭡니까?”
“그런가?”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보좌관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뭐…….”
자신만 곤란해진 아이린이 우물쭈물 망설였다.
“거보십시오.”
트레버가 씩 웃었다. 그러자 아스테리온의 잘생긴 이마에 주름이 지며 대번에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때 아이린이 냉큼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얼마나 걸릴까요?”
캠든에서 수도까지는 대략 15일 정도 걸린다. 하지만 왕복으로 따지면 한 달이나 되었다. 너무 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간을 기다리며 피가 다 마를 것 같았다.
아이린의 조바심 가득한 얼굴을 보며 알렉이 소요 기간을 가늠해 보았다.
마르셀 경과 에이글은 모르겠으나 카일라니 기사단인 마커스 경의 승마 실력은 출중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정령석을 챙겨 와야 해서 갈 때보다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마물 토벌을 나갈 때를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기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빨라도 3주는 걸리지 않을까?”
“그보다 더 단축도 가능할 겁니다.”
알렉의 말에 트레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온이 왼쪽 검지로 소파 팔걸이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시간을 계산하는 것이리라.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아스테리온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며 선고를 내리듯 말했다.
“12일에서 14일.”
“네에?! 그게 가능하다고요?”
아이린의 눈이 당장에라도 툭 튀어나올 것처럼 왕방울만 해졌다. 알렉 역시 입을 떡 벌렸다. 셋 중 트레버만이 더없이 침착했다.
“카일라니 공작가는 중요 지역마다 말을 갈아타고 쉴 수 있도록 구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전서구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돌아올 때 짐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트레버의 친절한 설명에 아이린과 알렉이 이해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4일 안에 도착할 수 있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요.”
“그렇군요. 역시 카일라니 공작가입니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말했을 때는 믿지 못하더니 트레버의 말에는 냉큼 수긍하는 행태가 자못 거슬려서 기분이 떨떠름했다.
자신의 말이 무척 불친절했기에 그랬던 것이지만 그는 애석하게도 이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 길목마다 전서구를 보내.”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명에 트레버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서고 아이린은 자신은 록사나를 보러 가겠다며 영주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럼 저도 남작님과 벨루카 님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이 아이린을 따라 일어났다. 아스테리온 역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인 그녀의 곁으로 향했다.
알렉은 록사나와 정령을 진찰하기 시작했다. 아이린은 록사나의 몸이 굳지 않도록 그녀의 손발을 열심히 주물렀다.
그동안 아스테리온은 시름에 잠겨 어느 순간 마음속에 생겨난 땅굴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록사나가 정령석을 만들 때 가장 가까이서 봤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깨울 방법이라는 걸 한순간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록사나의 곁에서 그녀의 손만을 붙든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내가 너무 내 아픔에만 매몰되어 있었어.’
아스테리온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때 마사지를 마친 아이린이 록사나의 손을 이불 밑으로 놓으며 그에게 말했다.
“공작님 덕분에 록시 님께서 빨리 깨어나시게 됐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소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그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요! 제가 아무리 해결책을 떠올렸다고 해도 공작님처럼 빠르게 일 처리를 하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맞습니다, 각하. 정령석을 가져오는 시기가 길어질수록 록사나 님이 깨어나시는 시기도 당연히 더 늦춰졌을 겁니다.”
알렉까지 나서서 아이린을 거들었다. 그는 전보다는 얼굴색이 나아졌지만 아까부터 다시 어두워진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젊은 공작의 앞에만 서면 압도적인 위압감에 알렉은 사자 앞에 놓인 토끼처럼 늘 움츠러들고는 했었다.
그런데 요 며칠 동안 공작을 보면서 불경하게도 풀이 죽은 조카를 보는 듯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그 덕분에 알렉은 저도 모르게 카일라니 공작 앞에서 푸근한 미소를 지을 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