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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56)화 (156/214)

156화 

울컥하여 아스테리온이 가슴을 들썩였다. 그러다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제대로 지켜 내지 못한 주제에.’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그에게는 감히 누릴 수 없는 사치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람 감정이 마음먹는다고 그대로 되는 일이던가.

“내가 투정 부린다고 놀리고 욕해도 좋으니까 제발 눈을 떠 줘. 나를 바라봐 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아스테리온의 파란 두 눈에서 빙하에서 흘러내리는 것보다 더 시리고, 용암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그는 눈물을 닦아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록사나의 가느다란 손만을 구명줄처럼 단단히 붙들고만 있었다.

이대로 그녀가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싱그러운 봄과 여름을 닮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까 봐 애가 끓었다.

록사나 없는 세상은 그에게 암흑과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라는 태양이, 달이 없으면 그는 숨을 쉬며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순간 믿지 않았던 신께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그녀가 눈을 떠 이 세상에 두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감히 그녀의 옆자리를 탐하지 않을 테니 그녀를 데려가는 것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한참 동안 방 안에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잠시 록사나의 상태를 살펴보러 왔던 아이린과 알렉이 열었던 문을 조용히 닫고 물러났다.

다시 돌아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쇠로 된 추를 매단 것처럼 한없이 무거웠다.

영주의 침실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알렉 님, 정말로 록시 님을 깨울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소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강제로 깨우려고 했다가는 목숨이 더 위험할 수 있어. 나로서는… 그건 내 능력 밖이구나.”

알렉이 콧잔등에 걸린 안경을 조금 더 위로 추켜올렸다. 그의 표정 역시 어둡고 침울했다.

최고의 의원이라 자부했었는데 알렉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깨닫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벨루카 님이라도 깨어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현재로서는 그것마저 어려울 듯하네.”

“벨루카 님요?”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두 눈에 언뜻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그래. 아무래도 정령이시니 남작님께서 깨어나지 못하시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일리 있는 그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알렉의 임시 진료실 앞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소파에 마주 앉았다.

“하다못해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네가 말했지 않았니. 전에도 벨루카 님을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으셨다고.”

전에 엘프 절맥증에 걸렸었던 록사나의 치료법을 찾았을 때도 천운이었다.

그래서 알렉은 어쩌면 자신의 소망이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단 한 톨의 희망도 결코 버릴 수가 없었다.

“맞아요. 벨루카 님을 어떻게든 깨울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벨루카가 캠든 공작 성에 처음 왔던 상황들을 떠올리며 아이린이 이를 곱씹었다.

“록시 님이 예전에 그러셨어요. 정령과 정령사가 계약을 맺으면 서로 연결되어서 상대방의 상태를 잘 알 수 있다고요.”

“그렇구나. 그런데 계약을 한 상태에서 둘 다 쓰러진 상황이라면 알 수 있는 가망이 없겠구나.”

“아니에요. 두 분은 계약을 맺지 않으셨어요.”

아이린의 눈썹과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요, 알렉 님. 그렇게 되면 서로의 상태를 더 모르는 거 아닌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혹시 또 모르지.”

현재로서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록사나를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러하리라.

알렉이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계약을 맺지 않으셨다니 오히려 더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내 생각에는 벨루카 님을 깨울 때 서로 영향을 덜 받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참 다행이에요. 그리고 록시 님을 깨우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물론 그 전에 먼저 벨루카 님을 깨워야 하겠지만요.”

반쯤 안도를 한 아이린이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알렉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깨우죠? 아무리 별짓을 다 해도 깨지 않으시는데요.”

지난 이틀 동안 옆에서 소리를 크게 지르며 시끄럽게 굴기도 하고 벨루카의 몸도 이리저리 건드려 보았었다.

“음, 깨어나실 때 몸이 조금 자란 상태라고 했으니까 벨루카 님의 몸을 성장시키면 깨어나시지 않을까?”

알렉의 말에 아이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뭘 먹일 수가 없는걸요. 벨루카 님은 동면하듯 주무실 땐 아무것도 안 드시기도 하고…….”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보통 인간보다 많은 음식을 즐기며 탐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벨루카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몸이 자라시는 걸 보면 다른 기운이 도움이 되는 것이 틀림없구나. 예를 들면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정령의 기운 같은 거 말이다.”

“아마도 그렇겠죠.”

아이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때 알렉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기운을 어떻게든 모아서 전해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순간 번개를 맞은 것처럼 아이린의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반짝 번뜩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맞아요! 그거예요, 정령석!”

아이린이 알렉의 두 손을 붙잡고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돌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어?!”

얼떨결에 강제로 몸이 일으켜 세워진 알렉이 당황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그냥 양손이 붙잡힌 채로 따라 돌아야만 했다.

“아, 아이린. 어지럽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꾸나.”

눈과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걸 느끼며 알렉이 다급하게 하소연을 했다. 그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기에 한창 체력이 달릴 시기였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우선 여기 다시 앉으세요.”

아이린이 곧장 알렉의 손을 놓았다가 그가 비틀거리자 몸을 부축했다. 그러고 나서는 조심스럽게 그를 소파로 인도했다.

알렉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자, 알렉 님. 여기 물 한 잔 드세요.”

아이린이 건넨 잔을 받아 알렉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혼몽했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졌다. 그가 컵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이린, 정령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혹시 그게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냐?”

방금 전의 상황을 더듬으며 알렉이 다급하게 물었다.

정령석은 말 그대로 정령의 기운을 품을 수 있는 굉장한 돌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주로 정령사의 힘을 보조하는 도구나 보호용 장신구의 일부로 활용되곤 했었다.

고대에도 무척 희귀했으며 지금은 더더욱 찾기 힘들어 이제는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광석이었다.

조금 전까지 한껏 기뻐하던 아이린이 조금 혼란스럽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한 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요. 캠든 영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는데요. 록시 님이 거기에 정령의 기운을 불어 넣으신 적이 있어요. 알렉 님도 이야기 들으셨을 거예요.”

“이종족 실험 시설과 연결되었다는 동굴, 그러니까 다이아몬드 광산 말이냐?”

“네, 맞아요. 그런데 록시 님은 그게 정령석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게 꼭 정령석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록시 님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테니까요.”

“일리가 있구나!”

순식간에 알렉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아이린의 손등을 마구 토닥토닥하면서 쓰다듬었다.

“잘했다, 잘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 내가 생각해도 그건 틀림없이 정령석일 게다!”

“정말이죠?!”

아이린의 표정이 대번에 확 밝아졌고, 소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달음박질했다.

“그래! 아참, 이럴 게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정령석을 수도로 가져오려면 어서 이 희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한다!”

“네, 가요!”

두 사람이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는 밖으로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 * *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난생처음 태양 빛을 마주한 이처럼 몹시 떨리는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정령석이 있으면 록사나를 깨울 수 있다고?!”

실상은 벨루카를 깨우기 위해서는 정령석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벨루카를 깨우면 록사나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네, 분명히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알렉이 확신에 차 말했다. 아이린은 그 옆에서 목이 떨어져 나갈 듯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희열이 파도처럼 아스테리온의 전신을 덮쳤다.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곤 쓰러지듯이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막혀 있던 둑이 일시에 팍 터진 것처럼 그의 피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질주했다.

‘그녀를 깨울 수 있어!’

아스테리온의 가슴이 한 차례 크게 들썩였다. 그는 그제야 숨이 다시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정말입니까, 알렉 님?!”

“거짓말 아니시죠?”

이 희소식을 직접 들은 마르셀 경과 트레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간절한 열망을 품은 마커스 경과 에이글의 시선도 알렉에게로 향했다.

“사실 직접 본 게 아니라서 아이린이 말한 그 돌이 정말 정령석인지는 아직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분명 정령석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알렉이 아스테리온을 마주 바라보았다. 록사나가 다이아몬드에 힘을 불어 넣는 것을 공작이 직접 목격했다고 들었다.

“분명 정령석일 거야. 내가 이 두 눈으로 직접 거기에 힘이 담기는 걸 봤으니까.”

설명 그 돌이 정령석이 아니라고 한다면 중요한 실마리를 찾았으니 온 대륙을 뒤져서라도 정령석을 구하면 그만이었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가 투명한 돌에 힘을 불어 넣던 순간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물들며 빛나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급정색을 하며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정령석이 아니다!”

공작의 강한 부정에 조금씩 밝아지던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스테리온이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한 바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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