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붉은 빛을 깜박깜박 띠는 원형 구에서는 사악하고 짙은 기운이 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록사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뿜어져 나오는 그 기운이 끈적끈적하게 온몸에 달라붙었다. 기분이 나쁘고 다가갈수록 힘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록사나, 이제 그만.”
서너 걸음 정도 남았을 때쯤, 시시각각 변하는 록사나의 컨디션에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단호하게 잡아 세웠다.
“안 돼요, 아스테리온. 저건, 저건…….”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계속해서 간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팔다리를 마치 누군가가 옭아매는 듯 요악하고 지독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록사나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록사나?!”
- 록사나!
아스테리온이 더욱 깜짝 놀라며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벨루카는 그들의 발치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며 낑낑거렸다. 어린 정령은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기운이 두려우면서도 반가워 혼란스러웠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가슴이 찢어질 듯 너무 아프고 슬퍼요.”
눈물샘이 고장이 난 듯 맑은 눈물이 여전히 록사나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가슴을 쥐어뜯던 그녀의 시선이 스르륵 원형 구에 가닿았다.
금이 간 그릇에서 물이 새듯 아까보다 더 빠르게 그녀의 몸에서 힘이 줄줄 새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땅에 발을 딛고 서 있기가 버거웠다. 아스테리온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작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록사나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 기운은?’
어릴 적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사고 당시 그녀는 정령 샤일리와 함께 마차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마법과 무기를 맞부딪치며 싸우는 소음과 고함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록사나는 샤일리에게 나가서 제발 부모님을 도와 달라고 두 손 모아 간절히 부탁했다.
하지만 정령은 이상한 것이 느껴진다며 절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에 강력한 보호를 걸었다.
그때였다. 강력한 어둠의 기운이 쇄도했다.
쾅!
굉음과 함께 록사나가 타고 있던 마차마저 적의 공격에 당했다. 마차가 부서지며 절벽 아래로 기울어져 갔다.
록사나는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마차 벽에 온몸을 부딪치고 바닥을 굴렀다.
공격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이 계속되었다.
샤일리가 적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어두운 힘이 둘을 덮쳤다. 전보다 더 강력했다.
결국 샤일리는 자신의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 여파로 정령의 몸이 서서히 형체를 잃어 갔다.
추락하는 마차 안에서 샤일리의 몸의 일부가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록사나가 화들짝 놀랐다.
샤일리는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한 듯 남은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거의 동시에 들이닥친 또 한 번의 공격.
그것을 막아 내고 샤일리가 눈앞에서 한순간에 완전히 사라졌다.
정신을 잃고 록사나가 눈을 떴을 때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유모, 호위까지 모두 죽어 있었다.
샤일리도 그녀가 지녔던 정령의 힘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만 살아남았다.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픈 그 기억들을 가슴속 깊이 꼭꼭 묻어 두고 있었는데…….
그때 그녀도 어렴풋이 느꼈던 어두운 기운이 원형 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록사나는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앗아 간 힘 속에 그리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샤일리의 기운도 느껴져. 어떻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은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가 록사나는 애가 탔다.
그 가운데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이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던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막 안아 들려는 순간이었다.
그런 힘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록사나가 그를 강하게 뿌리치며 원형 구를 향해 한쪽 팔을 쭉 뻗었다.
파앗!
원형 구에 그녀의 손끝이 닿자마자 붉은 빛이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록사나의 힘을 마구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즉시 붙잡았으나 힘을 빼앗긴 몸이 이내 그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안 돼!!”
혹여 놓칠세라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몸을 다른 한 손으로 단단히 끌어안으며, 원형 구를 향해 손에 든 검을 힘껏 휘둘렀다.
휘익. 챙.
타격을 입은 원형 구에 금이 쩍 가며 붉은 빛이 훅 꺼졌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그 찰나에 아스테리온이 오러를 일으켜 록사나와 벨루카의 몸을 보호했다.
쨍그랑쨍그랑 소리를 내며 파편들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점멸하던 바닥의 문자들도 모두 빛을 잃었다.
그것들은 아스테리온의 관심 밖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절대 여기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는데!’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오며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온몸의 피는 차갑게 식었고, 발밑은 아래로 훅 꺼졌다.
“록사나, 제발 눈을 떠! 제발, 나를 봐.”
갈급하게 그녀를 부르며 떨리는 손을 겨우 들어서 부드러운 뺨을 매만져 보았지만 어떤 미동도 없었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미친 듯이 마구 흔들렸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극단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하며 그를 몰아세웠다.
그는 허겁지겁 록사나의 목에 한 손을 뻗어 맥박을 짚어 보고는 이어서 심장에도 귀를 대 보았다.
미약하게나마 맥박과 심장이 뛰었다.
산산조각 났었던 그의 심장이 조금이나마 다시 기워졌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주저 없이 록사나를 안아 들었다.
- 아울.
그의 눈에 벨루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벨루카의 몸이 아기 고양이만큼이나 턱없이 작아져 있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벨루카?”
- 아울, 아울~
아스테리온의 부름에 벨루카는 서럽게 울기만 할 뿐 전처럼 소통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마치 성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가 어떤 고민도 없이 바로 무릎을 굽혀 벨루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그 찰나의 순간 벨루카가 뭔가를 네 발로 꼭 끌어안았다. 이내 아기 늑대의 몸이 록사나의 가슴 언저리 부근에 안착했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와 벨루카를 안은 채로 서둘러 지하 5층과 감옥을 벗어나 로웰 후작저를 빠져나갔다.
* * *
로웰 후작저에 감금되어 있던 이종족들과 렌시아의 구출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약간의 위기도 있었다. 록사나가 쓰러지고 벨루카의 몸이 작아지면서 지하 감옥과 아군에게 걸었던 힘이 한순간에 풀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로웰 후작 측은 침입자를 바로 눈치챘다. 사병과 수하들이 지하 감옥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때는 아스테리온과 록사나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이미 그곳을 빠져나간 후였다.
“지금 로웰 후작가 반응은 어떻습니까?”
“수도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놓고는 못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하고 있습니다.”
트레버의 질문에 마커스 경이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요.”
에이글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 명의 이종족을 몰래 감금한 채 해괴한 실험들을 자행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구출된 이종족들은 안전 가옥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한동안 치료와 회복에 전념하게 될 것이다.
렌시아는 당분간 아벨리오 남작저에 기거하기로 했다. 흙색 약을 복용하며 외모에 변화를 보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 어떻게 렌시아가 폭풍 성장에 다다를지도 몰랐기에 이를 염두에 두고 옆에서 가까이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내 록사나의 상황을 떠올린 세 사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들만큼이나 아벨리오 남작저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우울했다.
록사나가 쓰러진 후 아스테리온이 그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깨어나지 못한 지 오늘로 삼 일째였다. 벨루카 역시 아기 늑대인 상태로 그녀 곁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에 따라 약을 분석 중이었던 알렉은 이를 잠시 중단한 채 록사나가 쓰러진 첫날 새벽부터 다시 주치의 업무에 매진해야 했다.
흙색 약에 대한 분석도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몹시 급했다. 그래서 현재는 이를 알렉의 조수인 피레아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게다가 카일라니 공작의 최측근들마저 남작저로 넘어와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들의 상관은 록사나의 침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갈수록 처리해야 하는 일은 산처럼 쌓여 가니 말이다.
세 사람이 자리한 곳 역시 남작저 응접실로 이곳은 공작가용 임시 집무실이 되었다.
이 중 유일하게 외부에 기거하는 에이글이 침통한 표정을 드러냈다.
새롭게 맞아들인 이종족들과 4구역 사업을 관리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시시때때로 그 역시 남작저를 드나들었다.
“남작님 상태는 어떻습니까?”
“여전합니다.”
아침 진료를 마치고 자신 역시 알렉을 붙들고 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트레버가 대꾸했다.
에이글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그 옆에서는 마커스 경이 침음을 삼켰다.
“자, 우리라도 정신 차리고 맡은 일들 열심히 합시다!”
손뼉을 짝 치며 트레버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넋을 놓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퍼뜩 수런거리는 마음을 추슬렀다.
“맞는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만전을 기해야지요.”
* * *
록사나의 침실 안.
아스테리온이 마른 수건을 대야에 넣고 물을 적신 후 물기를 꼭 짜냈다.
그는 그 수건으로 록사나의 얼굴부터 시작해 옷 밖으로 드러난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물과 수건을 몇 번이나 갈며 적시고 짜는 동안 걷어 올린 아스테리온의 소매 역시 축축하게 젖어 갔다.
록사나의 세안을 다 마무리하자,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다 끝이 나 있었다. 이어서 괜스레 그녀의 이불을 정리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맞잡았다.
평소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는 없고 아주 미약하기만 했다. 쓰러진 후 록사나의 체온은 일반인보다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그녀의 손을 녹여 주듯 꼭 붙든 아스테리온의 물기 어린 낮은 목소리가 침실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록사나, 내가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 힘들고 비참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보다 그대가 더 힘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