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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54)화 (154/214)

154화 

“우선 앉지.”

“네, 공작님.”

흙색 알약이 있는 종이를 알렉의 앞으로 쓱 밀었다.

알렉이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로웰 후작 측에서 만든 약일세. 최대한 빨리 이 약을 분석해 주게.”

아스테리온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 뒤를 이어서 마커스 경이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 특히 약에 관한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약의 출처와 정보를 알게 된 알렉과 피레아는 기절초풍했다.

알렉이 품에 손을 넣었다가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손수건을 챙기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대신 소맷자락을 이용해 알약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살펴보았다.

옆에 있던 피레아가 품에 안고 있던 왕진 가방에서 마른 솜 조각 하나를 꺼냈으나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허허허, 어찌 이 조그만 것이…….”

해탈한 듯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알렉의 두 눈에는 의학자로서의 강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피레아 역시 눈빛을 반짝이며 알렉의 손에 들린 알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제가 아는 성분이 배합된 것이라면 하루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는 어떤 것이 섞여 있다면 최소 3~5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

아스테리온이 렌시아가 이 약을 복용한 지 9일째가 되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이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몸의 성장이나 변화를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지 어떻게든 해 봐야 했다.

“3일을 넘기지 말아 주게.”

“네?! 알겠습니다. 잠을 안 자고서라도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약의 효과를 없애는 해독 방법도 같이 연구해야 할 거야.”

“해 보겠습니다. 그럼 한시가 급하니 저희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스테리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알렉과 피레아가 부리나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났어도 집무실에 남은 사람들의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아스테리온은 남은 사람들과 같이 작전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록사나와 에이글이 도착하면 변경되는 것도 있겠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하는 데까지 해 놓아야 했다.

* * *

‘어두웠으면 좋았을 텐데, 달이 너무 밝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밤하늘을 올려다본 록사나가 낮게 탄식을 했다.

그렇다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뒤에서 작은 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록사나의 옆에 와 섰다. 아스테리온이었다.

“모두 준비 다 끝났어요?”

“응, 그대는?”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검은 천으로 온몸을 꽁꽁 가린 채였다.

“저도 준비됐어요.”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은 단호하고 결연했다.

“같이 움직이지.”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리온이 주변에 수신호를 보냈다.

그에 맞춰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돌산 주변의 공기 흐름이 미약하게 달라졌다.

가파른 돌산은 로웰 후작저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멀리서나마 은밀한 후작저의 전경이 윤곽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선두에서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이끌었다.

다른 일행은 각자 맡은 위치와 임무에 따라 소리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벨루카의 도움을 받아 기척을 지운 상태였다.

록사나의 역할은 감옥 주변과 탈출 이동 경로를 정령의 힘으로 감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와 차단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로웰 후작저에서 가장 경비가 허술하고 후미진 구역 근처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족히 5미터는 넘는 담을 넘어가야 했다.

록사나가 자신의 사지에 힘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등과 무릎 뒤를 받치며 안아 들었다.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록사나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앞으로 더 큰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런 일에는 힘을 최대한 아끼는 게 좋잖아.”

아스테리온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귀를 간질이자, 저도 모르게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떨어질 줄 모르는 그의 진득한 시선에 록사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록사나를 안은 채로 아스테리온이 가볍게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착지도 소리 없이 이루어졌다.

아스테리온은 그녀를 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록사나를 안은 상태 그대로 목적지까지 이동했다.

그사이 록사나는 기운을 풀어 내 힘을 서서히 주변으로 일정 부분 퍼뜨리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 감옥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 다다를 때까지 그 일은 계속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 적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굵고 가장 큰 쇠창살 문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아스테리온이 마지못해 그녀를 내려 주었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록사나가 바람을 풀어 감옥의 크기를 가늠했다.

그사이 아스테리온은 그녀의 호위를 서며 주변을 경계했고, 카일라니 기사단원들이 벨루카와 함께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지하 1층, 2층 3층……. 어마어마하게 크군.’

지하 5층까지 내려갔다. 황실 감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무척 넓고 거대했다. 그러나 갇혀 있는 이들이 수용된 공간은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지하 감옥 전체를 힘으로 감싸야 해서 온 힘을 쥐어짜 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그 크기의 4분의 1 정도만 기운을 덧씌우면 되었다. 물론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힘을 쏟아야만 했지만.

‘자, 시작해 볼까.’

록사나가 무릎을 굽혀 앉아 땅에 두 손바닥을 대었다. 두 눈을 감고 힘껏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고요하게 퍼져 나간 기운이 빠르게 주변을 감싸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검은 복면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됐다!’

끝없이 뻗어 나가던 기운이 어느 순간 뚝 끊기며 록사나가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스테리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접혔다.

그가 입가를 끌어 올리며 마주 웃었다. 검은 천에 가려져 있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스테리온의 눈가가 그녀의 것처럼 곱게 접혔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록사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아스테리온이 재빠르게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몸을 받쳐 주면서 자신의 품으로 곧장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한쪽 소맷부리를 붙잡고 천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 부분을 정성을 다해 톡톡 닦아 주었다.

“수고했어.”

록사나가 복면 아래에서 싱긋 웃었다.

그때 검은 인영이 열린 쇠창살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로 그쪽으로 향하며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마커스 경이었다. 그는 끈을 이용해 등에 한 사람을 업은 상태에서 양손에도 각각 다른 이들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록사나의 두 눈이 절로 어두워졌다.

낡은 옷 밖으로 드러난 그들의 팔다리는 깡말랐고 온갖 이물질과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마커스 경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지나쳐 갔다. 지상을 향해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가 약속된 구역에 다다르면 조인족들이 하늘을 날며 담 밖으로 구출자들을 옮길 것이다.

본격적으로 구출 행렬이 간간이 이어지는 가운데 록사나가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아스테리온이 따랐다.

처음부터 말리고 싶었지만 정령의 힘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있을지 몰라 말릴 수 없었다. 사전에 논의된 사항이기도 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탁해지고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했다.

여름에 들어선 바깥 날씨와는 확인하게 달랐다. 온도는 서늘하다 못해 냉기가 돌았고, 오싹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중간에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을 마주친 벨루카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옥의 마지막 층인 5층에 다다랐다.

벨루카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리며 이를 드러내 으르렁거렸다.

- 록사나, 여기 뭔가 이상해.

“나도, 벨루카.”

몸에 힘이 서서히 빠지며 축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뚜렷해졌다. 게다가 다리까지 후들거리며 무릎이 자꾸만 꺾이려고 했다.

‘힘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정말 이상해.’

점점 나빠지는 록사나의 몸 상태를 곧바로 눈치챈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부축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안 돼요! 계속 가요.”

아스테리온이 뜯어말리려고 했지만 록사나가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혹여나 자신을 들고 돌아갈까 봐 그의 한쪽 팔을 양손으로 꽉 부여잡고 말을 덧붙였다.

“아스테리온, 여길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여기에 분명 놓쳐선 안 되는 중요한 열쇠가 있어요!”

“그래, 알았어.”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녀가 자신의 이름까지 불러 줬을까 싶었다.

두 사람과 벨루카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지나온 곳을 빼고는 삼면이 벽으로 막혀 있었다.

록사나가 팔을 덜덜 떨며 정면의 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 벽 너머에 있어요. 어떻게든 부수고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내가 하지.”

아스테리온이 허리춤에 맨 검을 한 손으로 뽑아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은 순식간이었다. 검이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실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그 벽을 발로 가볍게 걷어차고는 아스테리온이 곧바로 몸을 돌려 록사나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이 아스테리온의 거대한 몸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벽이 반대편으로 단숨에 넘어갔다.

쿵.

벨루카가 떨어지는 잔해와 먼지를 바람의 힘으로 밀어냈다.

록사나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조급한 발걸음으로 돌무더기를 넘어서며 안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이 그런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따라 들어갔다.

벽에 고정된 마력 등 불빛 아래 안의 윤곽이 뚜렷하게 그들 눈앞에 드러났다.

“저건!”

“비슷하군.”

- 그거다!

그들이 이종족 실험 시설에서 봤던 것과 같은 검은 돌기둥이 있었다.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주변을 관찰했다.

“맙소사!”

아스테리온과 맞잡은 록사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에서는 경악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전에 봤던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개가 아닌 무려 열세 개의 검은 돌기둥이 정확하게 원형을 이루며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기다란 돌기둥 안에는 당연하다는 듯 인간의 형체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더러는 눈이 감긴 채, 또 더러는 눈을 부릅뜬 채.

원형의 바닥에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검붉은 빛을 은은하게 내뿜었다.

그 정중앙에는 사람 머리만 한 원형 구가 낮은 기둥 위에 반쯤 박혀 있었다. 그 높이는 록사나의 허리와 가슴 중간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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