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밤이긴 하지만 눈동자 색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달빛은 충분했다.
자신이 처음 본 아이의 눈은 분명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색이 변해 있었다. 흑색이 섞인 진녹색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물론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간혹가다 마도 공학자들이 만든 아주 얇은 색유리를 눈에 끼워 눈동자 색을 바꿀 수는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코가 맞닿을 만큼 아주 가까이서 보면 색유리를 낀 게 티가 났다.
렌시아의 경우에는 색유리를 낀 게 아니었다.
“렌시아, 네 눈동자 색이 언제부터 진녹색이 되었는지 아니?”
“아니요, 몰라요. 방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어서 제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렌시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에 마커스 경이 방을 쓰윽 훑어보았다.
정말 거울 같은 건 작은 것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 외에도 무기가 될 만한 물건들 자체가 아예 없었다.
아이가 혹시라도 거울을 깨서 흉기로 사용할까 봐 치운 것 같았다.
“하지만 왜 변한 건지는 알아요.”
이어지는 말에 마커스 경이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얇은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다행스럽게도 힘 조절을 한 상태였다.
“이유를 안다고?”
“오늘 저기 본관에 있는 어떤 방에 끌려갔는데요. 거기에 남자 두 명이 있었어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렌시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렌시아는 마커스를 만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흙색 알약을 한 알씩 강제로 먹어야만 했다.
무슨 약인지는 당연히 알려 주지 않았기에 왜 먹는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오늘 낮에 본관에 있는 어느 호화로운 방으로 끌려갔었고 거기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야 비로소 약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마커스 경이 경악했다.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렌시아가 놀라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렌시아, 네가 먹은 흙색 약이 몸을 자라게 하면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변하게 한다고?”
“맞아요. 잠시만요.”
렌시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도도도 방을 가로질러 갔다. 한쪽 벽에 세워진 커다란 서랍장 앞에 다다르자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는 그 밑으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어른 손은 절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낮은 그 틈으로 서랍장 밑바닥을 더듬거렸다.
이내 원하는 걸 찾아냈는지 렌시아가 침대로 돌아왔다. 뭔가를 쥔 한 손을 내밀었다.
“이거요. 삼키는 척하고 몰래 빼돌렸어요.”
마커스 경이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펴자 성인 여자의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동그란 알약 두 개가 드러났다. 녹은 흔적이 있는 것이었다.
매번 혀 밑까지 검사를 철저히 했지만 하녀가 떠난 후 렌시아가 몰래 바로 토해 낸 것들이었다.
- 그거 진짜 기분 나쁘다!
벨루카가 그 약을 보고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커스 경은 벨루카의 반응에 정령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로웰 후작이 하고 있는 실험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고맙다, 렌시아.”
그가 기특해하며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자, 렌시아가 방긋 웃었다.
“도움이 될까요?”
“그럼. 우리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야. 아, 이걸 주는 걸 깜박했구나.”
약을 가슴 안쪽 깊숙이 챙겨 넣던 마커스 경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렌시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든 렌시아가 뭐냐고 눈으로 묻자, 그는 어서 풀어 보라고 눈짓을 했다.
그의 손에서는 한없이 조그맣던 주머니가 아이의 손에서는 제법 커다랬다.
렌시아의 마른 손이 꼬물거리며 주머니 입구를 풀어 헤쳤다. 그 안을 확인한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머니 안에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쿠키와 알록달록한 사탕이 들어 있었다.
“정말 저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야. 너 주려고 가져왔는걸. 어서 먹어 보렴. 무척 맛있는 쿠키란다.”
마커스 경의 재촉에 입으로 과자 하나를 막 가져가던 렌시아가 멈칫하더니 과자를 두어 개 더 꺼내 들어 내밀었다.
“마커스도 드세요. 여기 정령님도요.”
“난 괜찮으니 너 먹으렴.”
잠시 눈빛이 심하게 요동치던 벨루카도 렌시아의 손을 밀어냈다. 자신도 사양한다는 의미였다.
“잘 먹겠습니다. 오도독오도독.”
렌시아의 눈빛이 대번에 동그래졌다. 제법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맛있게 쿠키를 먹는 아이를 바라보는 마커스 경의 눈빛은 착잡해졌다.
며칠 내로 몸이 성장할 거라고 말하던 렌시아의 말이 목에 가시처럼 마음에 걸렸다.
‘시간이 얼마 없어.’
* * *
렌시아를 만난 후 로웰 후작저 지하 감옥까지 들렀다 온 마커스 경이 벨루카와 함께 카일라니 공작저로 서둘러 귀환했다.
그들은 자정을 넘은 시간임에도 불빛이 환하게 새어 나오고 있는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커스 경이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스테리온과 트레버, 안드레아스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마커스 경,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수확이 좀 있습니까?”
마커스 경과 벨루카가 건너편 자리에 착석하자, 트레버가 입을 떼었다.
“네. 이것을 보십시오.”
가슴 안쪽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펼친 마커스 경이 가운데에 자리한 아스테리온 쪽으로 그것을 내려놓았다.
아스테리온이 종이 위 알약과 마커스 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것이 뭐지?”
“로웰 후작 쪽에서 개발한 약인 것 같습니다. 이 약의 효능은…….”
마커스 경이 알약과 오늘 알아낸 사실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듣도 보도 못 한 약의 기능을 들은 그들은 기함을 토했다.
“이 약을 처음 봤을 때 벨루카 님께서도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느끼신 듯합니다.”
마커스 경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벨루카를 힐끗 바라본 후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제 추측으로는 이 약을 만드는 데 정령의 힘과 이종족이 깊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맞아. 이 약에는 정령의 힘이랑 이종족의 기운이 담겨 있어. 그런데 진짜 기분이 나빠.
벨루카가 분노의 꼬리질을 하며 소파 위를 탁탁 내리쳤다.
“정령도 같은 말을 하니 경의 추측이 맞는 것 같군. 마침 알렉이 영지에서 올라와 있으니 이 약에 대한 분석을 맡기면 되겠어.”
“제가 모셔 오겠습니다.”
안드레아스가 공작가 주치의를 데리러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검은 약과 이 흙색 약, 참으로 놀랍습니다.”
트레버의 말에 아스테리온과 마커스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비윤리적인 약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로웰 후작이 이룬 성과물은 의학의 발전과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륙을 뒤흔들 정도로 경이로웠다.
“검은 알약은 아쉽게도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 약을 구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야.”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이에 트레버가 동의하며 가슴속에 품었던 의문을 밖으로 꺼내 들었다.
“맞습니다. 저희가 짐작하는 것처럼 검은 것은 체력 증강이나 생체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다 죽어 가던 렌시아가 그 약을 먹고 살아났으니까요.”
마커스 경이 자신이 목격했던 끔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던 광경을 떠올렸다.
아스테리온은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약이 또 있을 수 있어.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캠든 영지와 연결된 이종족 실험 시설이 단순한 생체 실험 시설인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집무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각자가 알고 있는 정보와 생각들을 정리했다.
트레버가 한 팔을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턱을 괴었다.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퍼뜩 자세를 바로 했다.
“약도 그렇고 실험 시설도 그렇고. 혹시 말입니다. 생체 무기 같은 걸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신체 능력을 강화하여 성장시키고 외모를 변형시키는 약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로웰 후작은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짓을 벌이는 걸까? 황위? 아니면 더 강한 권력? 재물? 어쩌면 셋 다일 수도 있고…….”
어쨌든 딸인 빅토리아가 황세손을 낳으면서 황위에 한발 더 가까워진 상태였다. 게다가 권력과 재물은 지금도 로웰 후작가에 넘쳤다.
이 자리에 있는 그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예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의사가 오고 갔다.
“어쨌든 렌시아를 하루라도 빨리 구출해 내야 합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들도 함께요. 그들의 상태가 나날이 나빠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르셀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의 의견에 다른 이들도 동조했다.
“하루 이틀 내로 실행하지.”
“지하 감옥에서의 구조가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아스테리온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트레버가 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안전하고 신속하게 로웰 후작 측 눈을 속이며 작전을 수행하려면 록사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록사나의 의견도 중요했지만 과연 공작이 이를 수락할지가 미지수였다.
아스테리온이 이내 결심을 굳혔다. 한시가 급한 문제였기에 지체할수록 위험했다.
“남작저에 지금 바로 연락하도록 해. 독수리 용병대에도.”
“네! 지금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 내가 직접 갈게, 인간.
마커스 경과 고개를 번쩍 든 벨루카가 동시에 대답했다.
“벨루카를 보내도록 하지.”
- 그럼 나 간다.
벨루카가 록사나에게로 돌아갈 생각에 신이 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깐, 벨루카. 서신을 써 줄 테니까 독수리 용병대에 먼저 들렀다가 남작저로 가. 그게 거리상 훨씬 가깝고 효율적이니까.”
아스테리온이 곧장 떠나려는 벨루카를 붙들고는 서신을 급하게 작성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 그럼 나 진짜 간다.
서신을 받은 입에 문 벨루카 문으로 향하지 않고 창문을 바로 열어젖혔다. 밖으로 훌쩍 뛰어내리더니 이내 모두의 시야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느 누구도 정령의 행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사이 안드레아스가 알렉과 그의 조수 피레아를 데리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다가 급하게 불려 온 알렉은 머리는 까치집에 채 정리 안 된 차림새였다.
아스테리온이 손짓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