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네?”
“록사나 아벨리오.”
“아 왜 자꾸 불러요?! 내 이름 닳겠네!”
록사나가 소리를 꽥 질렀다.
순간 아스테리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
“말해 주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나도 이제 더 이상 주인이 누구인지 듣고 싶지 않아요.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나 원 참.”
록사나가 입술을 삐죽이 내민 채, 그에게서 몸을 팩 돌려 버렸다.
땅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분이 좋았다가 말았다며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경혹한 아스테리온이 허겁지겁 자리를 옮겨 록사나의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양팔로 잡아 붙들었다. 차마 힘을 주지는 못하고 살짝, 아주 살짝.
“여기 주인은 그대야. 거짓말하거나 놀린 거 아니야. 진짜 록사나 아벨리오라고!”
“네?”
아까와는 달리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쭉 빠진 목소리가 록사나에게서 툭 흘러나왔다. 상황을 파악해 가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록사나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러니까 당신 말은 여기 진짜 주인이…….”
“응, 맞아. 그대가 여기 주인이야. 물론 그대가 수락해야 가능한 것이지만.”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기어 들어갔다. 그가 초조한 눈빛으로 록사나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다.
이내 모든 상황을 파악한 록사나가 두 눈을 크게 확 떴다.
“이 땅이 내 생일 선물이라는 거예요?! 여길 보여 주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아스테리온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니!”
행동이나 태도가 늘 차근하고 논리적인 카일라니 공작의 이런 모습을 만약 그의 보좌관들이나 가신들이 보았다면 두고두고 놀렸을 것이다.
비논리적인 그의 대답에 록사나의 눈이 가늘어지며 차갑게 변하려는 찰나, 아스테리온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여길 보여 준 것도 이 땅도 내가 그대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야.”
록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의 입가가 샐룩거렸다.
황당한 오해를 하는 바람에 여전히 약간 어안이 벙벙하기는 했지만 록사나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꺄악, 고마워요.”
너무나도 기쁘고 기분이 좋은 나머지 폴짝 뛰어올라 저도 모르게 아스테리온의 목을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아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아스테리온의 몸이 대번에 굳었다.
그것도 잠시, 록사나의 허리에 두 팔을 둘러 그녀를 마주 안았다.
이내 그녀의 몸이 허공에 붕 들렸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제자리 돌기를 했다.
“으악.”
그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것도 잠시 록사나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기분을 말해 주듯 긴 치맛자락이 허공에서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막 어지러움을 느낄 찰나, 록사나의 두 발이 땅에 안착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몸에 닿은 손을 풀지 않은 채였다.
서로의 입가에 매달았던 웃음기가 옅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스테리온의 눈길이 저도 모르게 록사나의 콧대를 따라 내려가 그녀의 입술에 가닿았다.
록사나의 시선 역시 그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가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눈으로 하나하나 더듬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극심한 갈증으로 타들어 가는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마치 그들을 중심으로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이 점점 길어지며 공기가 어색해지려는 찰나, 아스테리온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가 먼저 입을 열자, 시간이 다시 유유히 흐르기 시작했다.
“내 선물을 받아 주지 않겠어?”
“공작님께서 간곡하게 부탁하시니 받아 줄게요.”
록사나가 그를 공작님이라고 칭할 때마다 아스테리온은 항상 서운한 감정을 느끼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달달했다.
이 순간이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을 일깨우듯 그의 목에 둘러져 있던 록사나의 두 팔이 떨어져 나갔다.
상실감이 덮쳐 오며 그를 막 집어삼키려는 순간, ‘고마워요.’라고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두 귀가 붉게 물들며 순식간에 힘을 잃은 그의 두 팔은 록사나의 허리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아스테리온에게서 풀려난 록사나가 몸을 살짝 돌렸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 위로 두 손을 겹쳐 지그시 내리눌렀다.
‘친구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뿐이야.’
록사나가 익숙한 떨림을 애써 무시하며 달맞이꽃 군락지를 다시 눈에 담았다.
‘문서를 받으면 실감이 좀 나려나.’
이곳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돈 많은 친구의 통 큰 선물에 그녀의 입이 저절로 귀에 걸렸다.
“참, 달맞이꽃은 보통 7월에 피는데.”
지금은 6월 초였다. 어쩌다 때 이르게 피는 경우도 있었지만 군락지로 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여기 언덕에서 자라는 달맞이꽃은 개량된 품종이라서 그래. 이름은 금달맞이꽃이야.”
“그렇군요.”
록사나가 허리를 굽혀 달맞이꽃 한 송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환한 달빛을 등불 삼아 자세히 살펴보니 기존에 봐 왔던 달맞이꽃보다 노란색이 더 진했다. 마치 금색처럼 말이다.
그녀가 금달맞이꽃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스테리온이 근처에서 가장 곱게 활짝 핀 달맞이꽃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금달맞이꽃,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록사나가 허리를 펴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때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록사나의 귓가에 닿는가 싶더니 귓바퀴를 살짝 스치며 금방 거두어졌다.
“아!”
록사나가 손을 뻗어 자신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귀에 꽂힌 꽃 한 송이가 어루만져졌다.
벨루카가 선물했던 꽃은 분실을 우려해 이곳에 오면서 어쩔 수 없이 저택에 빼놓고 나왔었다. 그때의 아쉬웠던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잘 어울려.”
“피~, 밤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잖아요.”
달빛이 워낙 환해서 주변이 대낮처럼 밝았다. 하지만 록사나는 괜스레 밤을 핑계 삼아 쑥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설마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잊은 거야?”
아스테리온은 환한 달빛 대신 뛰어난 자신의 신체 능력을 언급했다.
“방금까지 정말로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기억이 났네요.”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군.”
둘은 그 이후에도 괜히 티격태격해 댔다.
그리고 잠시 더 언덕을 둘러보았을 뿐인데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두 사람은 그곳에 더 머물지 못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풀어 놓았던 말에 다시 올랐다.
자정을 한참 넘겨서야 아벨리오 남작저에 다다랐다. 그마저도 아스테리온에게는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록사나가 후문을 통과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침실에 불이 들어오고 한참 후 그 불이 꺼질 때까지 아스테리온은 저택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돌아서는 아스테리온은 록사나와 보낸 지난 몇 시간을 곱씹으며 밤길을 헤쳐 나갔다.
행복하면서도 쓸쓸하고 아쉬웠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두 어깨가 축 처지지는 않았다.
아스테리온은 그녀와 더 이상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록사나와 다시 한집에 살 수 있을까?’
그녀와 다시 결혼해서 한집 살림을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온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었기에 당장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웠다.
아스테리온은 그들의 첫 결혼 때처럼 록사나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그녀의 의사에 반하고 싶지 않았다.
재결합만은 온전히 그녀의 뜻에 따르고 싶었다. 설령 그녀가 영원히 재결합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둘의 재결합이 어렵다 하더라도 한집에서 얼굴 보며 살 수 있는 방법들은 다양했다.
저택에 근무하는 고용인들이나 손님 자격으로 머무는 사람들이 그러했다.
‘어떻게든 내가 정당하게 그녀 집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나 대책을 강구해 봐야겠군. 혼자서 열심히 고민을 해 봐도 좀처럼 뾰족한 수가 없으니 주변에 조언을 구해 봐야겠어.’
그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에서는 트레버와 안드레아스, 프랜시스, 마커스 경 등 많은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그의 생각이 아이린과 벨루카에게도 미쳤다. 그 둘을 포섭하지 못한다면 어떤 계획도 실현하기 어려웠다.
‘아이린한테는 내가 가장 록사나에게 어울리는 배필이라는 상대라는 것을 열심히 어필해야겠어. 그런데 정령은…….’
벨루카에 대한 대책으로는 딱히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자신의 달맞이꽃 탈취와 목걸이 은폐 사건으로 인해 나빠졌던 벨루카에 대한 인상이 한 단계 격상된 상태였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벨루카 덕분(?)에 금달맞이꽃 언덕에서 록사나와 오붓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은 다시 선물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금달맞이꽃 언덕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 땅을 록사나에게 선물로 줄 수 있었다.
모든 게 급작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어차피 금달맞이꽃 언덕은 그녀에게 줄 것 중 하나였다. 계획보다 조금 더 이르게 선물하게 된 것뿐이었다.
‘그녀는 무려 자신이 받은 모든 선물 중에서 내 선물이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지. 다음에 기회를 봐서 나머지 두 가지는 뭔지 꼭 물어봐야겠군.’
결과적으로 벨루카는 아스테리온의 마음속에서 은인 또는 일등 공신 비스무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원래 선물의 행방 확인은 어쩐다?’
아스테리온은 그리하여 벨루카를 추궁해야 할지 말지 며칠간 소소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공작저로 돌아온 아스테리온은 바로 눈을 붙이지 않고 빠르게 선물을 위한 준비를 매듭지었다.
그리하여 록사나의 생일 다음 날 정오쯤, 트레버가 고이 동봉된 땅문서 하나와 달맞이꽃을 한 아름 들고 아벨리오 남작저에 방문했다.
* * *
록사나가 아이린, 마르셀 경과 함께 수도 치안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매캐하고 탁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록사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시에 뿌연 연기를 마시게 된 아이린은 연신 마른기침을 해 댔다.
“콜록콜록.”
록사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서류와 그 사이에서 시가를 뻑뻑 피워 대며 바쁘게 일하는 치안대원들. 실내 공기가 확연히 나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