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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49)화 (149/214)

149화 

‘게다가 가져올 수 없었던 선물이라니 대체 얼마나 큰 선물이길래 그러는 거지?’

그녀의 호기심까지 강하게 자극했다.

“응.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싫다고 거절하면 어쩌나 해서 초조해졌다.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며 갑작스럽게 생각해 낸 추가적인 선물이었지만 꼭 주고 싶었다.

마침 운이 좋게도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두 방해꾼인 벨루카와 아이린이 그들 곁에 없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한편 록사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기가 민망했다. 그녀의 시선이 어두운 창밖으로 향했다.

“글쎄요. 시간도 늦었고…….”

“오히려 지금 출발해서 가면 딱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아스테리온이 하던 말을 끊고 입을 다물었다.

‘저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록사나는 그의 의도를 가늠하며 잠시 고민했다.

“그 선물이 뭔지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거죠?”

“맞아.”

얼굴이 조금 밝아진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가요.”

“응. 고마워.”

록사나가 픽 웃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인데 주는 사람이 고맙다고 하니 우스웠다.

“가실까요, 레이디.”

아스테리온이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록사나가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번거로운 마차 대신 각자의 말을 타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산들바람이 밤공기를 가르며 말을 타고 달리는 두 사람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대략 한 시간 좀 못 되게 달렸을까.

길잡이 역할을 하느라 조금 앞서 나가던 아스테리온이 말의 속도를 서서히 늦추었다.

이에 록사나도 고삐를 살짝 잡아당겼다.

다그닥 다그닥.

어느새 두 마리의 말이 속도를 맞춰서 나란히 경보로 흙길을 걸었다.

하늘에 밝게 떠 있는 달빛이 시야를 틔워 주어 주변 사물들이 잘 구분되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가가 드물고 완만한 언덕과 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산이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진 수도 외곽 지역이었다.

풀벌레 소리와 별이 밤을 수놓으며 이 모든 고즈넉한 밤 풍경이 한 폭의 은은한 수묵화 같았다.

“아직 멀었어요?”

“거의 다 와 가.”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록사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그녀의 이마에 곱게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에서는 생기가 느껴졌다. 지친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생동감을 더해 주었다.

“승마 실력이 수준급이야. 웬만한 기사보다도 더 잘 타는군.”

“제가 좀 잘 타긴 하죠. 말은 오랜만에 타 보는데 실력이 녹슬지 않았나 봐요.”

아스테리온이 감탄을 연발하자, 록사나가 깍쟁이처럼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아스테리온은 그녀와 함께 말을 함께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승마 실력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록사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와 함께하는 승마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사소한 이야기를 간단히 주고받으며 가다 보니 말이 어느새 언덕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심장이 마구 콩닥대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드디어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언덕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달빛 아래 한눈에 들어온 풍경.

록사나의 두 눈과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와~!”

땅 위에 내려앉은 별무리처럼 무수한 노란 꽃송이들이 솔솔 부는 바람에 물결쳤다.

록사나의 두 눈이 아름답게 펼쳐진 꽃물결에 단단히 홀려 버렸다. 한참 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

록사나는 너무나도 황홀하고 수려한 경관에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릴 적 이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이런 비슷한 경치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가슴을 짓누르던 것들이 훨훨 날아가며 눈이 확 틔었다. 오직 푸르고 따스한 것들만이 몰려와 텅 비어 있던 곳을 산뜻하게 채우는 느낌이었다.

땅 위에 내려앉은 별빛, 노란 꽃들에 취해서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던 록사나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달맞이꽃?”

“맞아, 달맞이꽃이야.”

훈기를 품은 바람을 타고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록사나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언제부터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의 시선이 바로 한 점에서 마주쳤다.

아스테리온의 눈빛은 한없이 감격에 겨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따스했다.

‘나 못지않게 그도 풍경에 취했었구나.’

그녀의 추측과는 다르게 그는 별보다도 달보다도 어떤 보석보다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록사나의 눈빛 속에 빠져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은 록사나가 달맞이꽃 군락지를 처음 눈에 담기 전부터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느끼는 환희의 감정과 기쁨으로 물드는 표정을 그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록사나가 밤 풍경 속에 녹아들 것처럼 흠뻑 빠져 있을 때는 정말로 그녀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비현실적인 걱정을 할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아스테리온 역시 황홀경을 맛봤다.

어떤 걱정이나 근심 없이 순수하게 기뻐하는 록사나의 모습은 그의 심장을 마구 간질이며 터져 버릴 듯한 충만감을 담뿍 안겨 주었다.

자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선물했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오늘의 선물이 최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라, 그녀의 눈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록사나의 눈은 한없이 반짝였고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이거 내 선물 맞죠? 나한테 주는 내 생일 선물이요!”

“맞아. 내가 그대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야.”

순간 아스테리온은 목이 절로 메어 왔다.

록사나의 보석같이 예쁜 두 눈이 사르르 접혔다. 입가에서는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지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고마워요. 너무 멋진 선물을 줘서요. 내 평생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선물이에요. 게다가 당신이 지금까지 준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들어요.”

가장 마음에 든다는 말이 아스테리온의 귀에 콕 와서 박혔다. 그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런데 살짝 걸리는 말이 있었다. 그는 다른 두 개의 멋진 선물은 그럼 뭐냐고 바로 물어보고 싶었다.

어찌 됐든 자신의 선물이 그 셋 중에서 1등이지 않을까? 그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록사나가 갑자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물어볼 타이밍을 놓쳤다.

록사나가 말고삐를 놓고는 달맞이꽃 들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유로워진 말이 배가 고팠는지 몇 걸음 움직여서는 주변의 풀을 뜯기 시작했다.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록사나가 꽃밭을 누비었다. 그 뒤를 아스테리온이 말없이 따랐다.

언덕 위 들판 전체는 달맞이꽃으로 가득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달맞이꽃 꽃송이들이 록사나의 손가락을 스치며 간질거렸다.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쫓던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따라 서투르게 손을 뻗어 보았다.

짧게 손끝을 스치는 자연의 감촉이 다소 생경했지만 묘하게 기분을 들뜨게 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달맞이꽃 꽃밭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록사나가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며 달맞이꽃을 눈에 담았다. 아스테리온은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록사나가 아는 한 늘 바쁜 공작인 아스테리온에게 한가롭게 꽃놀이를 즐기거나 하는 여유로운 취향 같은 것은 없었다.

이런 장소를 알게 된 데에는 필시 어떤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 어린 록사나의 올곧은 시선을 받아 내며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궁금증을 갖게 된 것이 무척 기꺼웠다.

“화훼 농장을 후원하고 있거든.”

“후원을요?”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득 그가 수도에 올라온 이후로 자주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선물로 보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쩐지……. 보내온 꽃들마다 엄청 예뻤었어. 그런데 화훼 농장을 후원하고 있었다는 것도 나름 의외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요즘 사교 시즌이라 황실이며 귀족가에서는 연회나 티 파티 모임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가만 보니 평소 때보다도 그 횟수가 많은 편이었다.

이에 대한 수요를 예측하고 미리 화훼 사업에 투자한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사업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야. 나도 더 열심히 분발해야겠어.’

록사나가 선의의 경쟁심을 느끼며 투지를 불태웠다. 게다가 평생에 남을 풍경도 그녀의 가슴과 기억 속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여긴 후원과 투자의 대가로 받은 땅이야.”

“이런 아름다운 곳을 얻다니 완전 부러운데요. 나한테 팔지 않을래요?”

록사나의 진심을 느낀 아스테리온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매혹적인 웃음소리에 록사나는 순간 홀릴 것만 같았다.

“이미 주인이 정해져 있어서 곤란한데.”

“받은 땅이라면서요, 당신 거 아니에요?”

“오늘 주인이 바뀌었거든.”

“주인이 오늘 바뀌다니 거참 묘하네요.”

잔뜩 실망을 한 록사나가 툴툴거렸다.

“주인이 누구냐고 안 물어봐?”

“물어봐서 뭐 하게요. 그 사람이 이 꽃밭을 내게 판다고 하면 모를까.”

“혹시 모르잖아. 한 번만 물어봐 줘.”

아스테리온인 잔뜩 들뜬 아이 같은 얼굴로 그녀를 졸랐다.

옜다, 받아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록사나가 마지못해 질문을 했다.

“주인이 누구예요?”

“록사나 아벨리오.”

록사나가 대번에 도끼눈을 했다.

‘지금 장난하나?!’

꽃밭 주인을 물었는데 왜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그것도 풀 네임으로.

한눈에 반한 달맞이꽃 언덕이 욕심이 났던 록사나는 그의 놀림에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구라고요?”

“록사나 아벨리오.”

록사나가 고개를 한껏 치켜들었다. 어이없어한다는 것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끝까지 해 보자 이거지?’

아스테리온을 바라보는 록사나의 눈길이 노기를 띠며 이글거렸다. 반면에 아스테리온의 눈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짓궂어졌다.

‘아, 내가 장난치는 거라고 오해를 하고 했군.’

그는 분명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상황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스테리온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도 유쾌해서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면 삐지고 화를 내려나?’

악마처럼 마음속 그의 자아가 한번 해 보라고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이 어떻게 할까 고민에 빠지려는 순간, 록사나가 다시 반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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