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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48)화 (148/214)

148화 

“각하, 식사하시고 잠시 눈도 좀 붙이시죠.”

“그렇게 하시죠.”

마커스 경이 꼿꼿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스테리온에게 휴식을 권하자, 트레버가 그 옆에서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둘 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한쪽은 튼튼한 기사요, 다른 한쪽은 야근을 밥 먹듯 해 봐서 하루 날 새우는 것쯤이야 이골이 났다지만 피곤이 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쉴 때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정리는 어디까지 됐지?”

“1차 조사는 거의 다 마무리되어 갑니다.”

서류와 종이 더미에 파묻혀 있는 트레버가 흘러내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러고는 일부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해 아스테리온에게 건넸다.

아스테리온이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훑어 내려가더니 마지막 장에 다다르자 봉투에 이를 잘 갈무리했다.

“자네들도 좀 쉬지.”

아스테리온이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남작저. 따라올 필요 없으니 마커스 경도 알아서 쉬게.”

그 말을 남기고 아스테리온이 바람처럼 취조실을 빠져나갔다.

“아이고, 나 죽겠다.”

무서운 상관이 사라지자, 트레버가 해초처럼 책상 위로 널브러졌다. 그의 시선이 우두커니 서 있는 마커스 경에게 닿았다.

“마커스 경, 쉬어요. 쉬어.”

“그래도 제가 호위인데…….”

마커스 경이 주군 앞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은근슬쩍 꺼냈다.

주군의 뛰어난 실력과는 상관없이 언제든 주군을 호위해야 한다는 마커스 경의 고지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보고 싶은 임 보러 가는데 자꾸 혹을 달고 가고 싶지 않으셨겠죠.”

“아, 그런 겁니까?!”

마커스 경이 그제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도 트레버처럼 편한 자세를 취하고 기다란 몸을 의자 위로 늘어뜨렸다.

트레버는 마커스 경이 은근히 눈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밥보다는 잠이 더 고팠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오늘이 남작님 생신이었지, 아마.’

* * *

아스테리온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록사나가 응접실로 향했다. 그녀는 그 전까지 집무실이 아니라 이른 시간부터 침실에 있던 참이었다.

생일인 오늘은 쉬어야 한다며 아이린과 다른 이들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다.

“아이린, 주방에 말해서 한 사람분 식사 준비해서 응접실로 보내 달라고 전해 줘. 내 것은 간단한 다과 정도면 충분해.”

“네, 그럴게요.”

아이린이 주방으로 향했다.

혼자서 응접실 앞에 다다른 록사나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요.”

아스테리온이 일어서서 맞이하다가 그녀의 귓가에 시선을 주었다.

“아, 예쁘죠? 선물 받은 거예요.”

록사나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귓가의 꽃을 만지작거렸다.

‘내 생일이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 없으니까.’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보니 그의 눈에 잘 띄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맞이꽃은 벨루카의 힘이 깃들었는지 늦은 저녁까지도 전혀 시들지 않고 처음 그대로 무척 싱싱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잘 어울려.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아스테리온이 황홀한 눈빛으로 록사나의 얼굴과 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왜 나보다 더 좋아하지? 게다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인데?’

록사나는 소소한 의문이 들었고,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차마 그의 두 눈을 직접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비껴 내며 그의 턱 언저리 즈음에 눈길을 주었다.

“벨루카가 준 거예요.”

“벨루카?”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빛에는 의아함과 뜻 모를 불만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록사나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록사나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록사나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자신의 귓가에 뜨겁게 머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오늘 한 달맞이꽃이 특별하게 예쁘긴 하지.’

지치고 피곤할 때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면 심신의 안정을 느끼고는 그녀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고는 했었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아스테리온이 푸른 눈을 부릅뜨고는 말없이 달맞이꽃을 노려보았다.

꽃의 전체적인 빛깔 하며 꽃잎 한 장 한 장, 그보다 더 작은 꽃술까지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모든 것이 그가 그녀의 머리맡에 두고 간 달맞이꽃과 꼭 같았다.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그런데 벨루카가 준 선물이라니.

‘얄미운 정령 같으니라고!’

그는 어찌 된 연유인지 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록사나의 하얗고 가녀린 목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그가 물었다.

“다른 선물은 더 없었고?”

“네? 꽃만 받았는데요? 전 이 꽃 선물만으로도 충분해요. 너무 예쁘잖아요.”

록사나가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은 듯 위로 향했다가 기분이 나쁜 듯 곧바로 살짝 비틀렸다.

록사나는 지금의 그는 참 요상하다고 생각했다. 벨루카가 자신에게 뭐를 더 선물했는지의 여부가 그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아스테리온은 목걸이의 행방도 물을 겸 날을 잡아 늑대 정령을 추궁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며 속으로 분을 삭였다.

‘하! 나 참, 정말 어이가 없군.’

남의 선물을 제가 준비한 것처럼 둔갑시켜서 그녀에게 주다니, 기가 몹시 찼다.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록사나가 정신을 차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조사 내용이야, 여기.”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서류 뭉치를 건넸다.

두 사람은 그제야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록사나가 차근차근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대충 서류를 모두 살펴봤을 때쯤, 하녀 대신 아이린이 트레이에 음식을 가득 실어 가져왔다.

아스테리온이 의아한 낯빛으로 물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 저녁 안 먹었어?”

“먹었어요.”

“그럼 이건……?”

“공작님은 안 드셨을 거 같아서 준비하라고 했어요. 아, 이미 드신 건가요?”

“아니, 아직이야.”

아스테리온의 두 눈이 사르르 접혔다. 우려한 입꼬리는 하늘로 승천했다.

이에 록사나가 피식 웃으면서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고는 음식 세팅을 거들었다.

아이린이 록사나의 앞에는 차와 간단한 다과를 놓아 주었다.

“수고했어, 아이린. 너도 이제 그만 가서 쉬어.”

“네. 그럼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아스테리온이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록사나가 아이린을 물리며 단둘이 남게 되자, 그의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평소에는 자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며 늘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아이린이 얌전히 물러가다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스테리온은 오늘 생일을 맞은 사람은 록사나인데 자신의 생일인 것만 같았다.

그녀가 포크까지 직접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주 잠깐 스쳐 가는 온기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아스테리온은 그제야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응, 고마워. 잘 먹을게.”

그가 식사를 할 동안 록사나는 조용히 차와 다과를 즐겼다. 그러면서 간간이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힐끔거렸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그 많던 음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빈 접시가 되어 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 가면서 해야지.’

록사나의 찻잔이 거의 비워질 때쯤, 아스테리온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시간 맞춰 우린 은은한 향의 차를 록사나가 새 잔에 따라서 그의 앞에 놓아 주었다.

아스테리온이 따스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치 오늘 내 생일 같아.”

“네?”

괜스레 찔린 록사나가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설마……. 아니겠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애써 달랬다.

아스테리온이 잔을 들어 향긋한 차를 마음껏 음미했다. 몇 모금 더 마신 후, 이내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치 그것이 하나의 신호가 된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살짝 당황한 록사나와 달리 아스테리온의 눈은 평온한 바다처럼 잔잔했다.

아스테리온의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생일 축하해, 록사나.”

아스테리온이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했다.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하고 매끄러웠다.

쿵.

그의 말이 록사나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심장 한쪽을 허물어뜨렸다. 고장이 난 듯 록사나의 심장이 어딘가로 질주했다.

그에게 한 번도 직접 들어 본 적 없던 말이었다.

결혼 생활 중 의무감에 선물과 함께 딸려 오던 작은 카드에 적혀 있었을 뿐.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두 손에 의해 치맛자락이 와락 구겨졌다.

록사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아스테리온의 긴장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그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이를 숨겼다.

그는 자신의 축하가 그녀에게 달갑지 않은 상처가 될까 봐 가슴 한구석이 미친 듯이 아려 왔다.

‘전 남편의 축하 따위 받고 싶지 않겠지.’

그녀의 생일에 단 한 번도 살갑게 혹은 무심하게라도 제 입으로 직접 축하를 건넨 적이 없었다.

록사나가 입술을 여러 번 달싹였다.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그런 축하 인사일 뿐인데……. 아무렇지 않게 호응해야 하는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록사나가 숨을 토해 냈다.

“고마워요. 생일을 기억해 준 것도요.”

그녀의 심장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아 갔다.

“그런데 선물은 없어요? 돈도 많으신 공작님께서 빈손이시라니 좀 실망이네요. 맨입으로 때우려고 하시다니요.”

“아, 그, 그게…….”

넓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배처럼 아스테리온의 푸른 두 눈이 미친 듯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사실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미 줬다고. 아마 자신이 생일 선물을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줬을 거라고. 그런데 그 선물을 강탈당했다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저 남자가 당황하는 때도 다 있네.’

난생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록사나가 설핏 웃었다. 자신을 당황하게 한 벌로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고뇌를 거듭하며 등에 식은땀을 흘리던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물이 있긴 해. 그런데 들고 올 수 없는 선물이라서……. 직접 전해 주고 싶은데 괜찮다면 나랑 같이 가 주지 않겠어?”

“같이 가야만 줄 수 있는 거라고요?”

록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냥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을 단번에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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