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아참. 남자 인간이 록사나를 언젠가 보쌈해 갈지도 몰라. 조심해.
아스테리온을 말하는 건지 다른 남자를 말하는 건지 애매모호했다.
록사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는 욕실 문을 닫고 서둘러 샤워를 했다.
- 응? 이건 뭐지?
록사나가 단장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 지루해 방을 뱅뱅 돌던 벨루카가 침대 위로 올라가 엎드리려는데 낯선 물건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달맞이꽃 한 송이와 꽃 모양이 세공된 아름다운 목걸이 하나가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목걸이가 왠지 벨루카의 눈에 익었다.
- 흠.
벨루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것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 응?!
스륵.
목걸이가 의도치 않게 침대 틈새로 쏙 빠져 버렸다. 순간 당황한 벨루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린이 드레스 룸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못 본 것 같았다.
잠시 침대 틈새와 아이린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본 벨루카의 고민이 끝났다.
은빛 늑대가 멀쩡히 남아 있는 달맞이꽃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입에 물었다.
마침 그때 록사나가 욕실에서 나왔다.
“어머, 벨루카! 나 주려는 거야?”
- 응! 물론이야.
벨루카가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록사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바닥 위에 달맞이꽃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인간들은 선물을 준비했다. 그럼 자신도…….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인 거지.
- 자, 선물.
“벨루카, 고마워!”
달맞이꽃을 화병에 꽂아 장식하는 대신 록사나가 자신의 귓가에 꽂았다. 그러고는 곧장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너무 예쁘다!”
록사나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자 벨루카도 가슴을 쭉 펴고는 헤벌쭉 웃었다.
드레스 룸에서 옷을 들고 나온 아이린이 이를 보고는 찬사를 보냈다.
“록시 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고마워.”
록사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 옆을 벨루카와 아이린이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이로써 아름다운 목걸이 하나가 침대 구석에 처박힌 채, 벨루카로 인해 벌어졌던 아침 소동이 은밀하게 막을 내렸다.
그들이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다채로운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평소보다 많네요?”
빈 공간 하나 없이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휘 둘러본 록사나가 주방장을 바라보았다.
오늘 자신도 모르는 무슨 잔칫날인가 싶었다.
“정말 모르십니까?”
“네? 오늘 누구 생일인가요?”
록사나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최측근들의 생일을 하나씩 되짚어 갈 때쯤.
촛불이 켜진 커다란 케이크를 든 고용인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남작님~ 생일 축하합니다~”
록사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갔다.
“오늘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주방장이 나섰다.
“네. 오늘은 남작님 생일이십니다!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드려요!”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어느새 식당은 저택 내 고용인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이번에 새 식구로 들어온 소피아 남매와 바네사 모자도 함께였다.
록사나가 눈가에 어린 물기를 닦아 내며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모두들 정말 고마워요. 난 오늘이 내 생일인지 몰랐어요.”
요즘 너무도 바쁘게 지내왔던 터라 정말 깜빡 잊고 있었다.
록사나의 시선이 아이린에게로 향했다. 고개를 살짝 까닥여 고마움을 드러냈다. 아마도 아이린이 이들에게 자신의 생일을 알려 줬을 것이다.
“자, 남작님. 어서 소원을 빌고 촛불 끄세요.”
“네, 어서요.”
아이린의 재촉에 다른 사람들도 동조했다. 다들 눈이 어찌나 반짝이는지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눈빛은 마치 그녀의 얼굴을 단번에 뚫을 것 같은 기세였다. 그 모습이 록사나의 가슴에 콕 와 박혔다.
록사나가 갓 성년이 된 소피아와 어린아이들을 한 명씩 쳐다보며 호명했다.
“소피아, 더스틴, 소니아, 제롬, 그리고 아이린. 나랑 같이 촛불을 불자.”
“정말 그래도 돼요?”
가장 어린 소니아가 케이크와 촛불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록사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오늘은 록사나 님 생일인데, 저희가 촛불을 끄는 건…….”
소피아는 실례가 될까 싶어 망설였다. 더군다나 자신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어른이었다.
가장 먼저 더스틴과 제롬이 살금살금 록사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아니야. 내가 너희들이랑 같이 촛불을 불고 싶어서 그래. 여기 봐, 초도 엄청 많이 꽂혔어. 그러니까 소원을 빌고 다 같이 촛불을 끄자.”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되며, 무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초가 케이크 위에 장식되어 있었다.
“네!”
“좋아요!”
아이들이 신이 나서 록사나를 빙 둘러쌌다.
록사나가 혼자 남은 소피아에게 어서 오라는 눈짓을 했다. 그제야 수줍게 웃으면서 다가와 소피아도 그 속에 끼었다.
그리하여 어쩌다 보니 일행 중 바네사만 혼자 남게 되었다. 록사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바네사도 이리로 오세요. 오늘은 내 생일 겸 새 식구 환영식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다정한 배려와 호의에 바네사는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바네사까지 촛불 끄기 일행에 동참하고서야 다음 순서가 진행될 수 있었다.
록사나가 먼저 눈을 감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다른 어른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록사나가 눈을 떴다. 아이들 역시 눈을 떠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를 벨루카가 비집고 들어갔다.
“자, 셋 하면 동시에 같이 부는 거야. 하나, 둘, 셋! 후우~”
“후우~”
숫자 하나를 말하기 전부터 볼에 잔뜩 바람을 머금고 있던 아이들과 벨루카가 있는 힘껏 바람을 불었다. 그러자 일곱 개의 초가 단숨에 훅 꺼졌다.
짝짝짝짝짝.
식당 안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각자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들이 록사나에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다들 배가 한창 고플 아침 시간대라 선물 풀어 보기는 뒤로 미루고 식사를 시작했다.
의자가 부족해 서서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기분 좋게 맛있는 아침 식사를 즐겼다.
커다란 생일 케이크는 잘게 나누어 적어도 한 사람당 한 조각씩은 맛볼 수 있었다.
케이크에 먼저 손을 뻗는 아이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록사나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너무 맛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응! 입에서 살살 녹아.”
아이들이 너도나도 감탄을 쏟아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중 입가에는 하얀 크림을 잔뜩 묻히고 혀를 날름거리며 입 주변을 열심히 핥는 소니아의 모습은 마치 아기 고양이 같았다.
어른들 역시 따스한 음식을 서로 나누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람 사는 냄새 나서 참 좋다.’
록사나는 지금 이 순간의 소소한 행복을 욕심껏 만끽했다.
1년 전, 아니, 얼추 반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날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런 날이 왔다.
호된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며 그녀의 인생에 신록이 우거졌다.
록사나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 이만하면 제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
그녀는 그렇다고 자신에게 속으로 대답해 주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지만 털어 냈다.
손을 떠난 것에 미련 두지 않고 나아가자 다짐하며 활기찬 아침을 음미했다.
그러면서 귀에 꽂은 달맞이꽃을 손으로 더듬어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지금 가진 것들을 소중히 하자.’
* * *
로웰 후작저, 집무실.
퍽! 와장창.
장식용 도자기가 날아가 남자의 몸에 맞고 바닥으로 추락하며 박살이 났다. 파편이 튀어 올라 스치면서 그의 볼에 붉고 긴 실선을 그렸다.
“이번에도 실패라니!”
“죄송합니다.”
늘 냉정함을 유지하던 로웰 후작이 불같이 화를 내자, 수하가 고개를 깊숙이 조아렸다. 그러자 피가 뺨과 턱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4구역 가게 주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로웰 후작은 사교계에 4구역 사업 소문이 돌 때 처음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집 없이 그곳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임대 분양권을 준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당장 그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없었지만, 이를 잘만 이용하면 카일라니 공작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흥가의 거의 모든 가게 주인들과 그 밖의 4구역 사람들을 이용해 그자들 밑에 있는 사람들의 분양권을 박박 긁어모아 왔었다.
“대체 어떻게 낌새를 알아차린 건지……. 정보가 줄줄이 샌 거 아니야?”
로웰 후작이 흐트러진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닙니다. 철저히 입단속을 했었습니다.”
“그럼 어디서 일이 틀어진 게야?!”
수하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벨리오 남작이 유흥가에 방문하면서 우연히 그들에게 걸려든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또 아벨리오 남작이라니. 남작이 대체 거기엔 무슨 일로 간 거지?”
“그것까진 아직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뭔가 있어. 더 자세히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4구역 사업을 훼방 놓기 위해 임대 분양권을 부당 취득하며 자신들의 정체를 철저하게 숨겼다.
그렇기에 치안대에 잡혀 들어간 자들이 모든 사실을 다 분다고 해도 그 배후까지는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로웰 후작은 자신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들통이 날 줄이야.’
자꾸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것은 어떻지?”
이종족 아이에 대해 묻는 것임을 재빠르게 눈치챈 수하가 바로 답했다.
“어미가 잘못될까 봐 무서운지 지시를 곧장 잘 듣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어. 세뇌는 일주일 안에 끝내고 실전에 투입할 수 있게 단단히 준비시켜.”
“네, 후작님.”
로웰 후작이 성의 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의 축객령에 수하가 집무실 밖으로 물러났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깨진 도자기 파편을 재빨리 치우고는 그들도 바로 물러났다.
* * *
하늘 높이 떠 있던 태양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뉘엿뉘엿 기울어 갔다.
밤새 이어진 조사로 치안대의 조사관들과 기사단, 죄수들도 지쳐 하나둘 지쳐 나가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