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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46)화 (146/214)

146화 

“바이올렛이 또래 친구들이 세 명이나 생겼다고 엄청 좋아하겠군요. 록사나 님께 제 손녀를 맡기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휴고가 몹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이 크로커스 왕국에서 지낼 때와 비교해 모든 면에서 풍족하게 해 줄 수 있었지만 딱 한 가지만은 채워 주기가 쉽지 않았었다.

문라이트 상단에도 가까운 이들이 죄다 어른들뿐이라서 또래와 어울려 놀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어렵지만 기회를 봐서 다음에 아이들을 서로 소개해 주려고요.”

“감사합니다. 캠든 영지에 내려가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바이올렛은 남은 기간 동안 휴고와 시간을 보내다가 록사나가 캠든 영지로 내려갈 시점에 일행으로 합류하기로 했었다.

며칠 후 이루어진 바이올렛과 휴고의 방문은 한 번 더가 아니라 캠든 영지로 내려갈 때까지 거의 매일같이 이루어졌다.

아이들이 매일같이 서로 어울려 놀기를 너무 좋아했던 탓이었다.

덕분에 휴고는 손녀와 남은 시간을 최대한 많이 보내기 위해서 덩달아 아벨리오 남작저에 시시때때로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아이들의 놀이 동무로 특별히 발탁되는 무한한 영광을 누렸다. 이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풍문이 돌았다.

【 강탈당한 선물과 새로운 선물 】

한 인영이 아벨리오 남작저 담을 가뿐하게 훌쩍 뛰어넘었다. 바로 가까이에서 기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기가 막히게 기사들을 피해 움직이는 남자의 발걸음이 본관의 심장부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그가 한 창문 밑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던 방의 불빛이 한순간에 훅 꺼졌다. 자정을 한 시간 남짓 앞둔 시간이었다.

커다란 남자의 몸집은 어떤 위화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는 방 안에 있는 인물이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방 안을 탐색하자, 단 한 명만의 기운만이 포착되었다.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대로라면 이질적인 기운이 하나 더 느껴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없었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며 소리 없이 이를 으득 갈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어둠을 채워 주던 찌르르 풀벌레 소리마저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적당한 때가 되었다. 남자가 가주의 방에 딸린 널따란 테라스로 올라섰다.

굳게 닫혀 있던 창문 걸쇠는 남자의 손짓 한 번에 스르르 힘없이 젖혀졌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등 뒤로 소리 없이 창문을 닫고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불빛이 없음에도 남자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침대 한가운데에 가닿았다.

이불 한가운데가 봉긋 솟아 있어 거기에 사람이 누워 있음을 짐작케 했다.

침대 바로 곁에 선 남자가 상대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천 밖으로 드러난 얼굴의 머리끝에서부터 찬찬히 이불에 덮인 어깨를 지나 발끝까지 다다랐다가 다시 위쪽인 얼굴로 향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남자가 자신의 가슴 속으로 한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무언가가 그의 손에 들려 나왔다.

남자가 그것을 손에 고이 쥐고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침대 한쪽이 푹 꺼졌다.

그러자 잠든 록사나가 몸을 뒤척였다. 그와 함께 가느다란 잠투정이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가 이내 흩어졌다.

콩닥콩닥.

아스테리온이 땀이 찬 손을 세차게 뛰는 자신의 심장 위로 가져가 지그시 내리눌렀다.

다시 용기를 낸 그가 록사나의 몸 위로 상체를 서서히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은 록사나의 얼굴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한 목표 지점에 다다랐다.

촉.

산들바람이 꽃잎을 간질이듯 그의 입술이 록사나의 반듯한 이마에 아주 잠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록사나는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과 못내 아쉬움을 삼키며 아스테리온이 얼굴을 겨우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그의 고개가 그녀의 귓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축하해. 영원… 사…….”

어둠 속에 녹아든 그의 말소리는 그녀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귀를 쫑긋 기울였다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아스테리온이 내내 소중하게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록사나의 머리맡 한쪽에 단정히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만 물러나야만 했다.

* * *

동도 트기 전 새벽녘, 아벨리오 남작저에서는 은밀한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면서도 말소리와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어제 늦은 밤의 방문자에 이어 새벽녘까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수상한 움직임은 록사나의 기상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잦아들었다.

할짝할짝.

얼굴에 간지러움을 느낀 록사나가 눈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잠을 깨운 범인을 확인한 그녀가 상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벨루카, 좋은 아침이야.”

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 좋은 아침이야, 록사나. 빨리 일어나.

“나 너무 졸린데…….”

평소라면 벌떡 일어났을 테지만 오늘은 쉽지 않았다. 간만에 부모님과의 행복했던 시절의 꿈을 꾸었던지라 그 여운을 더 즐기고 싶었다.

- 나 배고프다, 록사나.

“주방에 내려가서 밥 달라고 해.”

록사나가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벨루카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평소 때의 벨루카라면 록사나의 기상과 상관없이 이미 주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 네가 일어나야 밥을 먹지.

“…….”

대꾸가 없었다.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록사나는 벨루카의 미묘한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배가 고파진 벨루카는 주방에 준비된 음식들이 자꾸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늑대 정령의 인내심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현듯 카일라니 기사단원들이 나누던 말을 떠올린 벨루카가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 안 일어나면 보쌈해 간다.

대답 없는 록사나가 침대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자, 벨루카가 최후의 수단을 썼다.

- 할 수 없지.

록사나를 이불째로 둘둘 말아 입에 물었다.

“꺄아악!”

방에 막 들어서던 아이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떠나갈 듯한 아이린의 커다란 목청이 널리 퍼져 나가며 저택 본관을 뒤흔들었다.

제일 가까이서 그 벼락을 맞은 벨루카가 양 귀를 쫑긋거렸다. 누에고치 상태가 된 록사나는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 귀청 떨어지겠어, 아이린.

“벨루카 님, 대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이린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 보다시피 록사나를 보쌈해 가는 중이야.

벨루카는 아이린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성심을 다해 대꾸했다.

“당장 록사나 님을 내려놓으세요!”

- 싫다. 밥 먹으러 갈 거야.

“얼른요.”

- 흥!

벨루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한 발, 두 발 앞으로 내딛자 아이린이 눈을 홉떴다.

“지금 반항하시는 거예요? 얼른 록사나 님 침대에 고이 내려놓으시라고요!”

- 록사나가 안 내려가면 오늘은 나 먼저 밥 못 먹잖아! 그러니까 지금 당장 록사나랑 맛있는 밥 먹으러 갈 거야.

아이린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자, 벨루카가 난생처음으로 그녀에게 으르렁거렸다.

둘이 서로 눈싸움을 벌이며 대치했다.

우당탕탕.

쾅쾅쾅.

“무슨 일이야, 아이린?”

“침입자가 나타난 건가?”

“남작님은 무사하신 거지?”

문밖에는 아이린의 비명을 듣고는 놀라서 달려온 사람들이 얽히고설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누군가는 침착하게 문을 두드렸다.

서로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으나 차마 영주님의 침실을 벌컥 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 아니에요. 안 들어오셔도 돼요. 벨루카 님이 음…, 사고를 치셔서요. 제가 수습할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별일 아닌 거지?”

“네, 그러니까 먼저들 내려가세요.”

“알았다, 우리는 너만 믿고 이만 가 보마.”

사람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왁자지껄 시장통 같은 소란이 정리되면서 록사나의 두 눈 역시 확 떠졌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어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꼼작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나마 자유로운 고개와 두 눈이 돌아가며 상황을 파악했다.

“음, 벨루카. 뭐 하는 거야?”

“록시 님, 깨어나셨군요. 벨루카 님, 어서 록시 님을 풀어 주세요.”

- 빨리 밥 먹으러 가자.

“그래. 그런데 빨리 밥 먹으러 가려면 나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네가 날 들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네.”

- 앗, 알았어!

아이린의 말은 죽어도 안 듣던 벨루카가 침대로 냉큼 돌아갔다. 그 위에 입에 물고 있던 록사나의 몸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록사나가 몸을 옆으로 데구루루 굴려 이불 밖으로 탈출했다. 옆에서 아이린이 이를 도왔다.

- 오늘은 보쌈 실패군.

“보쌈? 벨루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벨루카가 최근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에게 전전긍긍하며 속을 끓이자, 주군의 속앓이를 보다 못한 어느 한 기사가 그냥 보쌈해 오면 안 되냐고 다른 기사에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처음 들어 보는 단어의 뜻이 궁금해졌고, 대화가 통하는 아스테리온에게 물었었다.

- 카일라니에 갔을 때 들었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부인으로 삼기 위해 몰래 데려오는 거라고.

록사나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순진한 정령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어휴,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건가?’

록사나는 이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하던데.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맞아, 벨루카. 보쌈은 미개한 행동이고 범죄야.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지. 그러니까 함부로 보쌈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 알았어. 그런데 난 범죄를 저질렀으니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현행범으로 체포돼?

“봐서. 왜 날 이른 아침부터 보쌈한 거야?”

- 같이 맛있는 아침밥 먹으려고. 너무 배고파.

“먼저 먹지 그랬어.”

- 안 돼! 오늘은 꼭 록사나랑 같이 먹어야 돼!

벨루카가 펄쩍펄쩍 뛰며 유난을 떨었다.

“자자, 록시 님. 어서 준비하고 내려가세요. 벨루카 님이 배가 엄청 고픈 모양이에요.”

아이린이 벨루카를 새초롬하게 째려보고는 록사나를 허겁지겁 욕실로 떠밀었다.

벨루카가 록사나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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