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록사나는 이번 일을 질질 끌지 않고 최대한 속전속결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오래 일하고 4구역 정보에 밝은 바네사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나와 일해 보지 않을래요?”
“해 볼게요.”
바네사가 록사나와 여전히 마주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서도 비장한 각오가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지만 어쩌면 이 일은 신이 내게 주신 사명이 아닐까?’
바네사는 자신과 4구역 유흥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열쇠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바네사, 고마워요. 우리 함께 잘해 봐요.”
“네, 남작님.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록사나 일행과 소피아 남매도 덩달아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록사나는 서둘러서 아스테리온에게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에게서 연락을 기다리는 사이, 바네사에게 호위를 붙여 주고 집에 가서 가족과 필요한 짐들을 챙겨 오도록 했다. 남작저로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밤중, 마커스 경을 위시한 카일라니 기사단이 치안대와 함께 유흥가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악덕 업자들을 쥐 잡듯이 잡아들이며 압수 수색을 벌였다.
이 소란스러움을 뒤로한 채, 록사나 일행과 소피아 남매, 바네사 가족은 마차에 나누어 타고 아벨리오 남작저로 유유히 향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한 남자가 형형한 눈빛을 띠며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 * *
서신을 받아 든 아스테리온의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입에서 음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하찮은 것들이 이런 같잖은 수작을 벌이다니! 대체 일을 어떻게 한 거야?!”
“공작님, 진정하십시오. 우선 일을 해결한 후에 명명백백 밝혀내도록 하겠습니다.”
트레버가 노기 가득한 아스테리온을 달랬다.
록사나가 보낸 서신에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었다.
4구역 임대 분양권을 부당 취득한 자들에 관한 것,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던 배경에 대한 일 처리 문제 점검 및 담당자들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관련자들 검거 및 정리에 대한 협조 요청이었다.
아스테리온이 서신을 곱게 접어 가슴 안쪽으로 넣으며 말했다.
“당장 치안대에 연락하고 기사단은 나와 함께 간다.”
“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각하께서 움직이시면 시선이 너무 집중이 될 텐데요.”
트레버는 카일라니 기사단과 치안대만으로도 이 일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났지.”
“송구합니다. 가시죠.”
트레버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세심하게 일을 관리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질책했다.
‘내 불찰이 크다.’
아스테리온의 말대로 4구역 사업 임대 분양권 문제를 아래 부하 직원들에게 믿고 맡겼는데 결과는 부정부패였다.
록사나가 서신에 쓴 것처럼 더 늦기 전에 문제를 파악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는 아스테리온의 뒤를 트레버가 조용히 따랐다.
카일라니 기사단이 4구역 유흥가에 발 빠르게 이르렀다. 치안대 역시 조금 시간차를 두고 뒤이어 도착했다.
마커스 경이 록사나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스테리온은 어둑한 골목 속에 몸을 숨겼다.
“만나 보시지요.”
“내가 무슨 낯으로.”
트레버의 권유를 아스테리온이 단칼에 잘라 냈다. 자꾸만 앞으로 나가려는 발길을 스스로 단단히 옭아맨 그의 눈빛이 깊게 침전했다.
‘하마터면 내 손으로 막 비상하는 그녀의 날개를 꺾을 뻔했어.’
그 사실이 그의 뒤통수를 강타하며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행스럽게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다. 이 또한 록사나 덕분에.
4구역에 대한 압수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본 록사나가 마차에 몸을 실었다.
아스테리온의 진득한 시선은 그녀를 태운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후, 아스테리온이 골목 밖으로 몸을 드러내며 소란이 이는 곳의 중심으로 나아갔다.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빠져나가게 둬선 안 되지.”
“물론입니다.”
아스레리온의 진두지휘 아래 단 몇 시간 만에 사건의 모든 주동자들이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
4구역을 담당한 카일라니 공작가 소속 직원들도 예외 없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먹혀들 리가 만무했다.
치안대 감옥 안은 때아닌 성수기를 맞으며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에서 취조실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며 강도 높은 조사가 진행되었다.
아스테리온은 취조실에서 그 모든 과정을 일일이 참관하고 감독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며칠 앞둔 중요한 일을 챙기느라 몸조차 뉘이지 못했다.
빠르게 조사가 일단락되며 이에 대한 결과물이 록사나의 예상보다 일찍 전달됐다.
* * *
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6월, 열어 놓은 창문을 넘어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계절에 장식을 더하듯 아름다운 보랏빛이 도는 머리카락에 청회색 눈이 서로 똑 닮은 젊은 남자와 어린 소녀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록사나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휴고.”
“잘 지내셨습니까, 록사나 님.”
“골치 아픈 일들이 좀 있었지만 잘 지냈어요. 이리로 앉으시죠.”
“그 전에 제 손녀를 먼저 소개해드리고 싶군요.”
“그럼요.”
휴고가 사랑스러운 눈빛을 가득 품고는 소녀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두르며 록사나 앞에 아이를 내세웠다.
“바이올렛,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님이셔. 이 할애비의 오랜 친구기도 하지. 인사드리렴.”
휴고가 살짝 등을 떠밀자, 소녀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치맛자락을 양 손끝으로 사뿐히 잡고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앙증맞고 너무 귀여워!’
록사나가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입가는 절로 실룩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벨리오 남작님. 저는 바이올렛 문 아코니테 크로커스입니다. 열 살이고요.”
“만나서 반가워요. 너무 귀엽고 아름다운 꼬마 숙녀를 소개받게 되어서 기뻐요. 바이올렛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영광입니다, 아벨리오 남작님.”
“내 친우인 휴고의 손녀에게 록사나라고 불리고 싶은데 그래 줄래요, 바이올렛?”
“물론이에요, 록사나 님.”
“그냥 록사나로 충분해요.”
록사나는 자신이 문라이트 상단주인 휴고를 어떤 수식도 없이 휴고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사이인 것처럼 자신과 바이올렛도 그러하길 바랐다.
“네, 록사나.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그럴게.”
두 사람의 통성명이 끝나자 휴고가 나섰다.
“바이올렛은 당분간 본래의 성을 모두 숨기고 바이올렛 문으로만 지낼 겁니다.”
“알겠어요, 휴고.”
손녀의 안전을 위해 아코니테와 크로서스라는 성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휴고의 뜻을 바로 이해한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앞으로 바이올렛은 캠든 영지에서 또는 수도 아벨리오 저택에서 록사나와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후원하는 아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사전에 약속되어 있기도 했다.
“바이올렛, 이쪽은 내 보좌관인 아이린이야. 올해 열여섯 살이고. 아이린?”
록사나의 곁에 서 있던 아이린이 바이올렛을 마주 보았다.
“안녕하세요, 문 영애. 저는 록사나 님의 보좌관인 아이린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아이린. 그런데 아이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리고 저도 바이올렛이라고 불러 주세요.”
바이올렛은 외동이었기에 늘 언니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었다. 소녀의 반짝이는 청회색 눈을 보며 아이린이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해요, 바이올렛.”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이린 언니.”
“저도요, 바이올렛.”
두 아이를 지켜보던 휴고의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인자한 것이 정말 할아버지 같았다.
그의 외모가 20대라서 남들 눈에는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을 둔 오빠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군요.”
“그럴 거 같아요.”
나지막한 휴고의 말에 록사나가 호응해 주었다.
“이런,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두었네요. 어서 편하게 자리에 앉으세요.”
록사나가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바이올렛이 상기된 표정으로 휴고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맞은편에는 록사나가 자리했다.
세 사람 앞에 먹음직스런 다과가 준비되어 놓였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이올렛의 리온 제국 적응기와 크로서스 왕국에서의 삶이 주로 화제에 올랐다.
그 나이대의 평범한 아이들처럼 재잘거리는 바이올렛의 모습에는 구김살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맑은 아이였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었는데도 참 밝고 씩씩하네.’
록사나는 문득 테오도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이 친구로 지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 편지에 바이올렛 이야기를 써야지.’
네 사람의 대화 방향은 캠든 영지와 록사나가 하는 일들로 이어졌다.
중간에 벨루카가 집무실에 들어오게 되면서 바이올렛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러면서 패를 나누듯 두 사람씩 나뉘었다.
시간이 흐르며 바이올렛과 아이린은 서로 편하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휴고와 록사나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록사나가 후원하는 아이가 그녀의 보좌관과 스스럼없는 사이인 것이 정체를 숨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기 때문이다.
서로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며 록사나는 휴고에게 어제 벌어졌던 4구역 임대 분양권 불법 취득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 역시 4구역 사업 투자자였기에 알 권리가 있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군요. 미리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네, 오전에 다른 투자자들에게는 서신으로 이 소식을 전했어요.”
“잘 대처하셨습니다. 누군가 이 일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 혼자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해서 대처하는 것이 더 쉽고 유리하죠.”
“맞아요.”
록사나가 커피를 한 번 홀짝이고는 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이내 그녀의 생각이 아이들에게로 이어졌다.
“바이올렛 나이면 한창 뛰어놀 시기잖아요. 그래서 캠든 성과 달리 저희 수도 저택에는 또래가 없어서 많이 걱정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기막히게 우연히도 또래 아이들이 여러 명 생겼답니다.”
록사나가 휴고에게 소피아 삼 남매와 바네사 아들에 대해서 줄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성인인 소피아를 제외하고, 더스틴이 열두 살, 소니아가 일곱 살, 그리고 바네사의 아들인 제롬이 바이올렛과 같은 열 살이었다.
네 아이 모두 성격은 제각각에 그동안 좋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품성이 포악하지 않고 온화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