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 가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이 은혜는 반드시 꼭 갚을게요.”
“갚을게요, 제발요.”
먼저 정신을 차린 소년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여자아이는 오빠를 따라 말하며 록사나의 치맛자락 한쪽을 간절하게 움켜쥐었다.
“저 나쁜 놈들이 저희 누나도 잡아갔어요!”
“흑흑흑, 맞아요! 우리 언니 돌려줘!”
록사나가 바르르 떨리는 여자아이의 손을 토닥거렸다. 소년에게는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상황이 곤란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낀 가장 덩치가 큰 괴한이 윽박을 질렀다.
“네 부모가 빚을 못 갚고 뒈졌으니까 그러지!”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입은 옷은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호위가 분명이 이 주변에 있을 터였다. 그러니 시간을 끌수록 그들에게 불리했다.
“이 친구 말은 사실이야. 우리가 그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데에는 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맞아. 우리랑 가면 오히려 너희들 배도 안 곯을 텐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하!”
록사나는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괴한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상황인지 대충 파악이 되었다.
“너희들이야말로 개소리 그만하고 썩 꺼져!”
- 으르렁.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록사나가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자,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괴한 셋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늑대가 걸리기는 했지만 애완용일 테니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여자는 유흥가에 팔고 늑대는 경매에 내놓으면 되겠네. 오늘 수입 꽤 짭짤하겠어.’
괴한들이 막 첫발을 뗀 순간, 벨루카가 몸을 날려 앞발을 휘둘렀다. 바람의 칼날이 회오리치며 적들의 몸을 덮쳐 난도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으아악악!”
적막한 골목 안에 비명과 괴성이 난무하며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
록사나가 즉시 방어막을 형성해 이를 막아 냈다.
“벨루카, 죽이지는 말고.”
- 알았어. 적당히 가지고 놀게.
그 모습을 어린 남매가 멍하니 바라볼 때, 골목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의 무리가 지척에 다다랐을 때쯤, 록사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명에 따라 멀리 떨어져 호위하던 델리오와 독수리 용병대원들이었다.
록사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큰 위험이 아닌 한 나서지 말고 지켜볼 것을 그들에게 당부했었다.
낯선 이들의 등장에 소년과 여자아이는 록사나의 등에 딱 붙었다.
“치안대가 곧 당도할 것입니다.”
재빠르게 치안대를 부른 것을 델리오가 보고하는 사이, 독수리 용병대원들이 널브러진 괴한 세 명을 단단히 결박했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치안대에 넘기기 전에 저들에게 확인할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잠시만요.”
델리오의 물음을 뒤로하고 록사나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혀 두 아이를 마주했다.
소년은 열 두엇쯤, 여자아이는 예닐곱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록사나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두 아이의 손을 각각 하나씩 붙잡았다. 갑자기 전해진 온기에 아이들이 순간 몸을 움츠렸으나 뿌리치지 않았다.
“지금 많이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줄 수 있겠니?”
“네!”
두 아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들이 누나를 잡아갔다고 했지?”
“맞아요. 제발 저희 누나도 좀 구해 주세요!”
“천사님, 제발요! 나쁜 사람들이 저희 언니도 막 때렸어요.”
여자아이의 눈에는 록사나가 하늘에서 보내 준 천사처럼 보였나 보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록사나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소년은 아예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록사나는 그들에게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어디로 끌려갔니?”
“오늘 낮에요.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몰라요. 누나가 저희 도망시키느라 혼자 잡혔어요. 흑흑. 분명 유흥가에 판다고 했어요. 아마 지금쯤 팔려 갔을지도 몰라요.”
소년은 애가 닳았다.
록사나가 아이들을 달래며 누나의 이름을 물었다. 그녀의 곁에서 이야기를 다 들은 델리오가 몸을 돌려 괴한들에게로 다가갔다.
델리오는 그들에게서 소년의 누나인 소피아의 행방과 은신처를 캐물었다.
괴한들이 속한 집단이 조직적인 불법 노예상이자 무력을 갖춘 집단인 것을 확인하고는 독수리 용병대 본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 * *
록사나는 두 아이들을 독수리 용병대 본부로 보내려고 했으나 아이들이 그녀와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간단히 응급 처치를 하고는 데리고 움직였다.
록사나와 아이린, 아이들은 마르셀 경과 함께 근처에 몸을 숨겼고, 독수리 용병대가 노예상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독수리 용병대는 손쉽게 노예상 일당을 제압했다. 하지만 거기에 소피아는 없었다.
델리오가 록사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한 시간쯤 전에 유흥가로 넘겼다고 합니다.”
“여기 정리는 델리오가 맡아 줘요. 전 그리로 바로 넘어갈게요.”
“록사나 님 혼자 가시기에는 위험하고 험한 곳입니다.”
“마르셀 경도 있고 벨루카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지만…….”
단장인 에이글이 록사나의 안전에 대해서 그에게 신신당부를 한 것을 떠나서 델리오 역시 은인인 그녀를 위험에 절대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 마침 저기 에이글이 오네요. 에이글과 동행하면 안심이 되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수도 치안대와 함께 이곳을 정리하겠습니다.”
저 멀리서 두 사람을 향해 에이글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델리오가 한발 물러났다.
한편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어린 남매가 불안한 눈빛을 했다.
소피아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아이들의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얘들아, 소피아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 거야.”
록사나가 아이들을 품에 끌어안고 다독였다.
“록사나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야 뭐 벨루카랑 독수리 용병대 덕분에 다칠 일이 없었어요.”
소식을 전해 듣고 지원에 합류한 에이글에게 록사나가 그동안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동행을 요청했고,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르셀 경은 말을 타고 밖에서 호위를 했다.
마차가 유흥가가 운집해 있는 거리로 나아가는 동안 에이글은 그곳에 대한 핵심적인 정보를 록사나에게 알렸다.
“4구역 땅을 사들이는 데 별다른 마찰이나 문제가 없어서 그 구역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했어요.”
“강제로 없앤다고 해도 질긴 잡초처럼 다시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이번에는 큰 보상에 눈이 멀어 다들 동의한 걸 테고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에이글이 심각한 얼굴로 예상되는 문제를 이어서 털어놓았다.
“그리고 4구역이 새롭게 들어서게 되면 아마도 또다시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겠네요. 앞으로 4구역의 미래를 생각했을 때,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록사나가 각오를 마음 깊이 다졌다.
4구역 향락 지역에 흘러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생계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선택했거나 팔려 와 강제적으로 머물게 된 이들일 거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에이글이 조심스럽게 넌지시 물었다.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야죠.”
“네?”
어찌하면 그리할 수 있는지 에이글이 궁금증을 가득 담아 반문했다. 그가 아는 어떤 사람도 향락 지역을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귀족들은 오히려 직접 두 발로 찾아가 돈을 펑펑 써 대며 그 지역을 굳건하게 존속시켰다.
“우선 그곳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다른 일자리를 주어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거예요. 물론 선택은 그들의 몫이겠지만요. 그리고 정비된 4구역에는 지금과 같은 정도가 지나친 유흥 시설이 생기는 일이 절대 없도록 만들 거예요. 이를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자들이 발도 못 붙이게,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 테니까요.”
록사나의 단호함에 에이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이 몸의 주군이신 록사나 님이신데!’
짧은 시간 많은 일을 이룩한 그녀라면 충분히 그렇게 해내고 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신 새로운 형태의 건전한 유흥 시설과 문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거예요.”
록사나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한 가지 계획을 더 덧붙였다.
어느새 그들을 태운 마차가 휘황찬란하게 밤을 밝히는 지역에 다다랐다.
록사나 일행이 마차에서 내리자 독수리 용병대원 한 명이 앞장서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곳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붉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을 록사나가 바라볼 때였다. 불쾌함을 담은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흥, 이것들은 뭐야?! 오늘 장사 공치겠네.”
록사나의 시선이 입구에 몸을 반쯤 기대고 서 있는 한 여인에게로 향했다.
여인은 짙은 화장과 가슴을 절반쯤 노골적으로 드러낸 차림새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딱 봐도 귀족인 록사나를 탐탁지 않은 얼굴로 훑어 내렸다.
록사나의 치맛자락 뒤에 몸을 반쯤 가린 두 아이를 발견했을 때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고매하신 분께서는 여기가 아이들의 놀이터라도 되는 줄 알고 오신 모양이에요.”
한껏 비꼬는 목소리가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다.
이곳은 아이들의 정서와 교육상 데려올 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더러 남편을 잡으러 올 때 아이들을 앞세워 대동하고 들이닥치는 부인네들을 보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여인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녀는 어쩌다 손님과의 사이에서 생긴 자신의 아이에게도 이 시간대에는 절대 이곳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이 가게에 한두 시간 전 소피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한 명이 들어온 걸로 아는데 나를 주인에게 안내해 주겠나?”
록사나가 동그랗게 눈을 뜨는 여인에게 금화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남자 때문에 온 게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은 여인이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무려 금화를 받아서 그런 게 아니야. 아까 들어온 신입이 너무 어리고 불쌍해서야.’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인의 뒤를 따라 일행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주변 가게의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게 앞으로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하지만 입구를 막고 선 호위들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거나 이어질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작은 응접실 안으로 안내되는 동안 록사나 일행을 마주친 남자들이 허둥지둥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재빠르게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