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안에 들어서자마자, 록사나의 시선이 단숨에 한쪽 벽면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4구역 지도가 큼지막하게 두 개로 나뉘어 걸려 있었다.
하나는 현 지도였고, 다른 하나는 빈 지도였다.
빈 지도에는 앞으로 건설될 도로와 건물의 조감도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것 말고는 여느 업무 공간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와, 4구역이 이렇게 생겼군요. 전체를 다 보니까 완전 색달라요.”
아이린이 아예 지도 앞에 바짝 다가가서는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곳을 콕 집어 가리켰다.
“남작님, 여기 좀 보세요. 저희 지금 여기에 있어요.”
4구역을 담당하는 이곳 사무실 위치를 금방 찾아낸 아이린이 무척 뿌듯해했다.
“그러네.”
록사나가 가볍게 응답해 주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였던 걸까.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델리오까지 지도 앞으로 나섰다.
“저희 독수리 용병대는 여기에 있습니다.”
“역시 땅이 넓고 위치도 좋군요.”
“맞습니다.”
굳이 록사나가 호응을 해 주지 않아도 아이린이 알아서 척척 델리오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소파에 자리한 록사나가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이 지도를 스윽 훑었다.
“저 파란색 동그라미들이 4구역에 있는 우물들을 모두 표시한 것인가요?”
“맞습니다.”
“생각보다 식수가 적네요.”
“네, 아무래도 우물 하나 파는 데 돈이 많이 들다 보니까 최소한으로만 유지되어 왔습니다.”
거주 인구 대비 부족한 식수는 4구역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이는 록사나가 오늘 이곳에 방문한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즉 본격적인 공사 착수에 앞서 수원과 수질을 미리 파악하여 새롭게 개발되는 4구역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록사나가 자신의 옆에 앉은 벨루카의 몸을 어루만졌다. 털이 부드럽게 손에 착 감겼다.
“벨루카, 오늘 하루 잘 부탁해.”
- 물론이지. 대신 오늘 약속한 거 잊지 마!
“그럼, 신선한 딸기 케이크 세 판.”
수원 탐사에 벨루카의 도움을 받기로 하면서 내건 보상이었다.
“벨루카,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아무리 정령이라도 살이 찌지 않을까?”
- 난 많이 움직이니까 괜찮아. 저번에 파견 임무 나갔을 때는 블루베리 케이크 다섯 판에다가 애플파이를 잔뜩 먹……!! 헙!
벨루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앞발을 들어 자신의 입을 턱 막았다.
록사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벨루카가 너무 단 음식 위주로만 먹어서 식단을 조절하고 있었다.
“흠, 카일라니 공작님이 그렇게 많이 줬다는 말이지?!”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있지, 그게…….
적당한 변명을 하려고 할수록 말이 자꾸 꼬였다. 에라 모르겠다. 냅다 책임을 떠넘겼다.
- 난 괜찮다고 했는데 남자 인간이 자꾸 줬어.
벨루카의 마음 안에서 록사나와의 약속을 어겼다는 죄책감이 차츰 옅어졌다.
‘뭐 먹고 싶냐고 하길래 난 사실대로 말한 죄밖에 없어. 계속 먹으라고 갖다 주는 걸 어떻게 해. 음식 남기는 건 죄니까 어쩔 수 없었지.’
록사나와 벨루카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델리오가 파란 핀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필기구로 표시한 현 지도 위 땅에 깃발을 꽂듯 부지런히 꽂아 넣었다.
기존 우물과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어 물 수급이 어려운 지역들로 추후 식수 확보가 필요한 곳들이었다.
“남작님, 어디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델리오가 핀이 동서남북으로 고루 꽂힌 지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서쪽에 파란 핀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서쪽부터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죠.”
“알겠습니다.”
록사나 일행과 델리오를 필두로 한 직원들이 마차 두 대에 나눠 타고 4구역 서쪽 지구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각종 오물과 쓰레기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심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윽.”
“우웩.”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수건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거기에 더해서 더러는 연신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여긴 정도가 너무 심하네요.”
과거에 거리를 떠돌았던 경험이 있는 아이린에게도 이곳은 최고봉이었다.
한창 길에서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뛰어놀던 아이들이 록사나 일행을 발견하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눈치를 보았다.
특히 커다란 은빛 늑대를 발견하고는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록사나가 그런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지저분한 옷 밖으로 드러난 아이들의 팔다리 여기저기가 얼룩덜룩했다.
“응. 이러니까 아이들 피부병이 심할 수밖에.”
마실 물도 부족한데 씻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록사나가 벨루카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아이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려는 행동이었다.
“벨루카, 여기 땅이랑 물 상태가 어때?”
즉시 몸의 기운을 풀어 낸 벨루카가 힘을 퍼뜨리며 주변 땅속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 가까운 곳들은 죄다 오염되었어. 잠시만, 더 깊이 파고들어 가 볼게.
청명한 기운이 다시 한번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를 직접 몸으로 느낀 델리오와 직원들이 낮은 탄성을 질렀다.
이게 바로 순수한 기운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 찾았다! 록사나, 좀 깊긴 하지만 오염되지 않은 물길이 있어. 양도 많아.
“희소식이네. 고마워.”
록사나와 벨루카가 앞장서서 북쪽, 동쪽, 남쪽을 향해 순차적으로 나아가며 땅과 수맥의 상태를 점검했다.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먼 거리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나아갔다.
서쪽 지구보다는 덜하기는 했지만 세 지구 모두 상태가 안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땅이 자연적으로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대대적으로 정화가 필요한 상태였다.
모든 곳을 둘러보고 그들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사무실에 둘러앉아 포장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하며 록사나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내일 밤부터 오늘 돌아본 순서대로 저하고 벨루카가 정화 작업을 진행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4구역 사람들이 이사 나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좀 더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겠군요. 그나저나 밤에는 위험한 지역이라 낮에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낮에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몰릴 테니까 피하고 싶어요.”
오늘은 벨루카만 힘을 썼고, 4구역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점검차 돌아보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 놔서 별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록사나까지 힘을 쓰게 된다면 그녀의 능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었다.
‘밤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보는 눈들이 줄어드니까.’
델리오가 송구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더 철저히 호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며칠간 잘 부탁해요.”
캠든 영지에서 힘을 한 번 크게 쓴 뒤로는 처음이라 정화 작업에 며칠이 걸릴지 록사나도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내일 한번 해 보면 알겠지.’
정화 계획에 대해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귀가를 서둘렀음에도 저택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록사나는 내일 밤을 위해 평소처럼 야근을 하지 않고 벨루카와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 * *
땅과 물을 정화하기 시작한 지 3일째가 되는 밤, 검은 망토를 둘러쓴 록사나와 벨루카가 4구역 남쪽 지구에 이르렀다.
“벨루카, 여기가 마지막이야.”
- 응. 얼른 하고 집에 가자.
“하하하, 그래.”
록사나가 조금이라도 빨리 딸기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 벨루카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 시작한다.”
록사나가 몸을 낮추며 한쪽 무릎을 굽혀 주저앉았다. 손을 뻗어 양 손바닥을 땅에 대었다. 옆에서 벨루카도 네 발에 힘을 모았다.
록사나의 양손에서 스르륵 뻗어 나간 힘이 땅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자, 벨루카가 힘을 쏟아 내어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둘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기운이 수맥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물에 섞인 탁한 기운들이 정령의 힘에 저항했다.
보글보글, 뽀그르르.
땅속에서 물이 끓는 것 같은 희미한 소리가 범위를 넓혀 가며 휘몰아치더니 어느 순간부터 차츰 잦아들었다.
수맥 주변의 거무튀튀한 흙들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차르륵차르륵, 찰랑.
이내 맑은 기운이 땅속을 가득 메웠다.
‘됐다!’
록사나가 땅에서 손을 떼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수고했어, 벨루카. 이제 가자.”
- 응!
둘이 사이좋게 몸을 돌려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지나가던 때였다.
쨍그랑! 와장창!
“살려 주세요, 제발!”
“이게! 조용히 따라와!”
우뚝.
밤의 정적을 깨는 소란스러움에 록사나가 몸을 바로 돌렸다. 덩달아 벨루카의 고개도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향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록사나가 갑자기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 록사나!
벨루카가 즉각 록사나 곁으로 따라붙었다.
“아악!”
“우리 오빠를 놓아줘, 이 나쁜 놈들아!”
셋 중 가장 몸집이 작은 한 괴한이 달려드는 여자아이의 목덜미를 낚아채 들어 올렸다.
“컥컥, 크윽.”
목이 졸린 여자아이가 허공에서 두 다리를 이리저리 버둥거렸다.
“옳다구나. 넌 노예로 팔면 딱이겠군.”
“안 돼!”
다른 두 괴한에 의해 질질 끌려가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듣고는 미친 듯이 몸을 비틀어 댔다.
“이게, 얌전히 따라올 것이지!”
소년을 붙들고 있던 괴한 중 한 명이 우악스럽게 소년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때 세 갈래의 강력한 바람이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쇄도했다.
소년을 붙잡고 있던 두 괴한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벽에 쿵 하고 부딪쳤다.
“으아악, 큭!”
여자아이를 붙잡고 있던 괴한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짧은 순간 땅으로 추락하는 여자아이의 옷자락을 벨루카가 신속하게 낚아챘다. 여자아이의 몸이 사뿐히 땅 위에 안착했다.
록사나와 벨루카가 두 아이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겨 뒤에 감추었다.
록사나가 얼핏 보니 소년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상처와 핏자국이 나 있었다. 여자아이 역시 정도가 덜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으윽.”
고통에 몸부림치던 괴한 셋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자기들끼리 뭉쳤다.
“너, 넌 누구냐?!”
“우리가 잠시 방심해서 당했지만 이제부터는 어림도 없다.”
“아이들을 넘기고 간다면 너는 봐주도록 하지.”
상대가 몸집이 작은 여자인 걸 확인하더니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러다가 그 옆에 서 있는 늑대를 보고는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