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두 하녀는 침대맡에 놓인 작은 것을 제외하고 모든 마력석 등을 끈 후 방을 나섰다.
“어서 가서 좀 쉬자. 피곤해 죽겠네.”
“네. 그런데 저 애는 대체 누굴까요?”
“낸들 아니. 관심 끄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그들의 말소리가 방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내내 숨죽이고 있던 마커스 경과 벨루카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는 험난했던 생활을 보여 주듯 피부가 거칠었고 뺨은 홀쭉했다.
여느 인간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야말로 살가죽만 남은 상태였다.
마커스 경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벨루카를 내려다보았다.
“벨루카 님, 맞습니까?”
벨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 경은 벨루카의 대답을 통해 이 아이가 이종족임을 확인했다.
“눈을 뜨면 대화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 순간이었다. 번쩍, 아이가 눈을 떴다.
- 애 눈 떴어!
벨루카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고, 마커스 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다행스럽게도 벨루카의 울음소리는 아이에게 들리지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낯선 공간임을 인지한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동자를 서서히 움직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마커스 경은 커다란 고민에 휩싸였다.
‘이대로 가야 할까? 로웰 후작은 왜 이 아이를 별관으로 옮겼을까? 아이에게 우리 모습을 보여도 될까?’
아이가 눈을 뜨기를 바랐지만 진짜로 눈을 뜰 줄은 몰랐다. 그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 인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냥 갈 거야?
벨루카는 마커스 경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는지 몸을 바르작거렸다. 침대를 짚으려는 앙상한 손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하던 아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이 마커스 경의 눈을 사로잡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모르는 상황, 하녀와 하인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마커스 경이 벨루카에게 엄숙한 표정으로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벨루카 님, 은신을 풀어 주십시오.”
- 그래.
벨루카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힘을 풀어 버렸다.
‘아니, 좀 틈은 주셔야지!’
정작 마커스 경이 당황하다가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이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에 놀라고, 마커스 경은 자신이 아이를 놀라게 해서 놀랐다.
“으으…….”
“미안하다.”
마커스 경이 손을 뻗어 아이의 입을 막으며 애매모호한 사과를 했다. 아이를 놀라게 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아이의 입을 갑작스레 막아서인지.
“아이야, 난 널 해치지 않아. 내 말이 이해되었다면 눈을 두 번 연속으로 깜박여 볼래?”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마커스 경의 얼굴을 탐색만 할 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벨루카가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를 본 아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벨루카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벨루카가 자신의 얼굴을 아이의 코앞에 들이밀고는 아이의 뺨을 할짝거렸다.
마커스 경은 잔뜩 굳어 있던 아이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아이는 홀린 듯 자유로운 손을 겨우 들어 벨루카의 털을 만져 보았다.
힘이 없어 겨우 손끝이 스치는 정도였지만 아이의 눈꼬리가 스르르 접혔다.
‘이종족들은 민감해서 인간보다 정령의 기운을 잘 느낀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마커스 경은 아이의 경계심을 낮출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이분은 벨루카 님이라고, 정령이셔.”
아이가 눈동자를 굴려 마커스 경을 잠시 쳐다보았다. 동그란 눈이 마치 ‘정령?’이라고 묻는 것 같았다.
“응, 정령. 이종족들은 인간보다 정령의 기운을 잘 느낀다고 하던데 너도 그런가 보구나.”
잠시 말을 멈춘 마커스 경이 아이의 반응을 살폈다. 아이의 시선이 벨루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못 믿겠지만 정령은 믿을 수 있지?”
아이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좋아. 그럼 내가 손을 떼면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니? 내가 누구인지 설명을 하고,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알려 줄게.”
그러자 놀랍게도 잠시 후 아이가 대답을 했다.
깜박, 깜박.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두 번, 눈꺼풀을 닫았다가 들어 올렸다.
이에 마커스 경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자신의 손을 아이에게서 떼어 냈다.
아이는 약속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옆에 몸을 뉘인 벨루카에게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마커스 경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이러다가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벨루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벨루카 님, 제가 이 아이와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아이가 제 말에 집중을 해 줄까요?”
- 그럴 거야.
마커스 경도 아이도 벨루카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벨루카가 마커스 경을 고갯짓으로 가리키자 아이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 왔다.
“아이야, 이름이 뭐니?”
“…어, 없어요.”
귀 기울여 들지 않는다면 놓쳤을 정도로 너무나도 가냘픈 목소리가 아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름이 없다니…….’
마커스 경은 이름 하나 없는 아이가 가여워서 코끝이 절로 찡해졌다. 그러다가 감상에 젖어 있을 상황이 아님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럼 우리가 다음에 만났을 때 네 이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자꾸나. 여기 계신 벨루카 님이 도와주실 거야.”
아이가 정말이냐는 듯 벨루카를 바라보았다. 벨루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에 생기가 돌았다.
“자, 아이야.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렴. 너는 지하 감옥 같은 곳에 있다가 너를 가둔 사람의 명에 의해서 이곳으로 옮겨져 왔어. 그리고…….”
마커스 경은 아이가 이곳에 옮겨질 때 그가 목격한 상황들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했다.
이어서 자신이 누구고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를 차근차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가 앞으로 아이와 지하 감옥에 갇힌 이들을 구해 낼 거라는 말을 했을 때는 맑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마커스 경은 로웰 후작이 아이의 거처를 옮긴 이유에 대해 회유해서 이용하려는 것 같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럴 경우, 반항하면 맞아 다칠 수 있으니 고분고분한 척하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떠날 시간이 다가왔지만, 마커스 경은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 입이 심심할 때 먹던 사탕 하나를 발견하고는 아이의 입에 조심스럽게 물려 주었다.
처음 맛보는 단맛에 홀딱 빠진 아이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눈에 담으며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 만나러 오겠다는 말을 도장처럼 남겼다.
벨루카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후작저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동쪽 하늘부터 새벽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는 시각이었다.
마커스 경은 카일라니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아스테리온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를 올렸다.
* * *
4구역의 이곳저곳이 몹시 분주했다.
“한스네는 오늘 이사를 가나 보네요.”
“네, 우리는 3구역으로 이사를 갑니다. 하하하.”
이웃의 물음에 중년의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지런히 이삿짐을 짐마차에 실었다.
그는 낡고 오래된 집을 시세보다 비싸게 팔았다. 그 덕에 더 넓고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제나네는 언제 이사합니까?”
“저희는 이달 말이에요.”
“어디로 가십니까?”
“저희는 한스네랑 다르게 분양권을 받았어요. 그래서 좋은 데로는 못 가지만 새 집이 지어질 동안 임시 숙소에서 지낼 예정이에요.”
한스 아버지의 표정만큼이나 제나 어머니의 표정 역시 무척 밝았다.
“저런! 저희처럼 제나네도 그냥 집을 팔고 3구역으로 이사하는 게 좋았을 텐데요.”
“그것도 좋죠. 하지만 저희 제나가 친구랑 절대 떨어져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요.”
딸 제나에게는 애나라는 친구가 있었다. 둘은 죽고 못 사는 단짝이었다.
세 들어 사는 애나네로서는 3구역으로 이사를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었기에 4구역에 대출을 끼고 분양받는 조건을 선택했다.
제나네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딸의 고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양을 받았다. 단, 애나네와는 다르게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사 잘 가시고 잘 사세요.”
“네, 감사합니다. 제나네도요. 아, 집이 다 지어져서 입주하게 되면 구경하게 저희 가족 한번 초대해 주십쇼.”
“호호호, 그럴게요.”
이러한 상황은 몇 집 건너 한 집씩 연출되는 풍경이었다.
그 사이를 마차 한 대가 이리저리 짐마차들을 피해 천천히 움직였다.
“록시 님, 오늘 날 제대로 잡았는데요. 길이 엄청 막혀요.”
“그러게.”
창밖을 내다본 아이린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은 4구역에 마련된 사무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중요한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평소보다 세 배의 시간이 걸려 목적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록사나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남작님, 도착했습니다.”
마르셀 경이 문을 열어 주자, 록사나와 아이린, 벨루카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드디어 시작이야!’
록사나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슈트를 쫙 차려입은 사무실 직원이 나와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커다란 덩치의 벨루카를 보고는 잠시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단장님한테 아벨리오 남작께서 키우시는 특별한 늑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미리 듣기는 했지만 기세가 장난이 아니군.’
반면 직원의 놀란 얼굴을 본 록사나는 벨루카를 목줄도 없이 데리고 다녀서 그가 염려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벨루카는 아무나 함부로 안 물어요.”
록사나의 설명에 직원의 표정이 이상야릇하게 변했다. 아이린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록시 님, 그건 문다는 말이랑 똑같잖아요. 안 문다고 하셔야죠!!’
아이린의 마음속 외침을 록사나가 알아들을 길은 없었다.
“걱정 안 했습니다. 벨루카 님이 늠름하고 멋지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흠흠.”
직원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이어서 서둘러 자신을 소개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벨리오 남작님. 저는 델리오입니다. 이제는 남작님 휘하인 독수리 용병대 소속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델리오.”
“영광입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요.”
델리오의 안내에 따라 록사나 일행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 3층에 마련된 관리자 전용 사무실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