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우리 언니 돌려줘! 】
록사나는 모니카가 튜베 남작에게 내건 조건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딸을 팔아 가문을 일으키려는 아비라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모든 과정을 겪어야 했던 모니카의 심정을 헤아려 보니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저희 자매는 현재 상황에서는 도저히 가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는 한 영원히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 벨라를 데리고 가문에서 나와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억지라는 걸 알지만 제발 제 투자를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이 기회가 제겐 마지막 희망이에요.”
눈물을 그친 모니카가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록사나는 귀족 사회 여성들에게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다. 이혼 후 숨지 않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우뚝 일어선 성공한 여성 사업가.
모니카는 록사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벼락처럼 깨달았다. 안개로 둘러싸인 미로 속을 헤매다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은 그녀가 나아가야 할 길의 이정표였다.
록사나는 마음속으로 모니카의 투자를 받기로 결정했지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를 쉽게 얻으면 그만큼 잃기도 쉬웠다.
“투자가 성공해서 동생분과 독립을 했다고 쳐요. 그 뒤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니, 가장 먼저 황태자와의 관계는요?”
“당연히 정부 따위 그만둘 거예요! 번 돈으로는 우선 살 집을 하나 사서 남는 방에 세를 놓아 돈을 벌고요. 그러고도 돈이 남는다면 재투자를 하거나 장사를 할 거예요.”
모니카의 결심은 확고했다.
‘튜베 영애가 나보다 어렸지 아마? 올해 나이가 스물한 살쯤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나이 때의 나보다 낫네. 흠, 이러면 원래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겠어.’
록사나는 도노반을 옥죄기 위해서 그의 정부인 튜베 영애를 이용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에 따라 모니카의 뒷조사를 진행했었다.
지금 모니카가 말한 사연과 조사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법 현실적이고 나쁘지 않은 계획이에요. 하지만 튜베 영애의 계획은 투자가 성공했다는 전제하의 꿈같은 가정일 뿐이에요. 실패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계속 황태자의 정부로 남아 있을 건가요?”
록사나가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 그러자 모니카의 몸이 경직되며 입이 딱 다물렸다.
모니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내 나지막하게 숨을 골랐다.
“당분간은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현재로서는 그게 저의 최선이에요. 물론 지금 당장 그만둘 수도 있어요. 다른 허드렛일을 찾는다면 저 하나 입에 풀칠하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경제적 지원을 해 줄 수 없어 벨라가 받는 교육은 끊기고 그 집구석에서 바로 데리고 나올 수도 없어요.”
“벨라는 영애의 생각이나 계획을 알고 있어요?”
“어느 정도는요. 자신은 괜찮으니 제발 지금 생활을 때려치우라고 말리는 아이예요.”
모니카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장 그만두세요!”
“네?!”
록사나의 강경한 어조에 모니카의 진분홍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가 이내 짜부라졌다.
여태껏 자신의 사정 이야기를 어렵게 했건만 록사나가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 이어진 말에 모니카가 상체를 허물어뜨리며 눈물을 펑펑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동생 교육비랑 살 집 마련해 줄게요. 그러니까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해서 갚아요. 그럼 당장 그만둘 수 있죠?”
“흑, …네! 그럴, 그럴게요.”
모니카가 간신히 소리 내어 대답하면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록사나가 손수건을 건네기 위해 자신의 드레스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다가 이미 한 차례 사용했음을 상기했다.
아이린이 록사나에게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 모니카에게 다시 내밀었다.
‘여성의 경제적 활동이 늘어날수록 나에게도 유리하고,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니까.’
록사나는 자신이 모니카를 돕기로 한 결정에 대해 합당하고 적절한 이유를 찾아 붙였다.
같은 여자로서 모니카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동정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냥 무엇보다 모니카의 의지와 각오에 징검다리 하나를 놓아 주고 싶었다.
또한 그녀를 이용하려 나쁜 마음을 잠시나마 품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록사나는 모니카의 4구역 사업 투자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향후 계획에 대해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고는 일주일 뒤에 만남을 기약했다.
그때는 지금의 모니카의 위치와 삶에서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 * *
어둠이 이불처럼 사방에 내려앉은 그날 밤, 로웰 후작저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으슥한 곳.
저벅저벅.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사방을 메우며 메아리처럼 울려 펴졌다.
그들이 지날 때마다 굳건하게 닫힌 철창 안쪽에서는 끙끙 앓는 신음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띄엄띄엄 켜진 등불이 빛을 내며 으스스한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탁. 둘의 발걸음이 한 철창 앞에서 멈춰 섰다.
로웰 후작이 눈짓하자, 수하가 열쇠를 꺼내 철창문을 열었다.
달그락, 철커덩. 삐거덕.
수하가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발을 내딛자, 그 뒤를 로웰 후작이 따라 들어갔다.
등불을 들어 올린 수하가 안을 휘 둘러보더니 한쪽 구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작은 몸집의 인영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비쩍 마른 손과 발에는 무거운 쇳덩이가 채워져 있었다.
수하가 다가가 상대를 발로 툭툭 찼다.
“야, 일어나.”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자 수하가 이번에는 더욱 힘을 실어 다시 한번 퍽퍽 걷어찼다.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흠.”
로웰 후작이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이에 수하가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상대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심장 쪽에 한쪽 귀를 가져다 댔다.
로웰 후작은 수하의 이 모든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쯧쯧. 가장 어린 개체라 그런 것인가……. 또 쓰레기를 치워야 되겠군.’
그가 반쯤 포기했을 때 수하가 몸을 일으켜 사실을 고했다.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뜁니다.”
“그럼 약을 먹여라.”
“네, 알겠습니다.”
수하가 품 안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고는 검은 알약 두세 알을 한 손에 쥐고 약병을 갈무리했다.
이 약은 망가진 건강을 회복시키면서 떨어진 체력을 끌어올리는 특수한 약이었다.
수하가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상대의 턱을 벌려 목구멍 안으로 약을 쑤셔 넣었다.
약을 삼키지 못하자, 입을 억지로 닫고 코를 잡아 숨구멍을 막았다. 그러자 미약하게 목울대가 움직여 약을 삼켰다.
꿀꺽.
잠시 후, 감겨 있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까만 동공을 감싼 노란색 눈이 드러났다. 차츰 눈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별관으로 옮겨 잘 돌보아라.”
“알겠습니다.”
로웰 후작이 발길을 돌려 철창을 나갔다.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그래서 수하는 작은 몸을 짐짝처럼 들어 올렸다. 축 늘어진 팔다리가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 * *
‘이런 미친!’
마커스 경이 등불이 비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그는 로웰 후작저에 몰래 잠입해 이종족들이 갇힌 철창과 로웰 후작이 먼저 떠난 철창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잠시 뒤, 로웰 후작의 수하가 작은 인영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철창 밖으로 나왔다.
툭툭.
가볍게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움직임에 마커스 경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벨루카가 안 따라갈 거냐는 눈빛으로 그와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번갈아 보며 눈짓을 했다.
‘로웰 후작하고 그 수하가 사라진 방향이 다른데 누굴 쫓아가지?’
곧 결심을 내린 마커스 경이 한 방향을 향해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벨루카도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하가 사라진 쪽이었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둘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벨루카의 능력 덕분에 둘의 모습과 소리를 감출 수 있어 들킬 염려가 거의 없었지만 마커스 경은 그래도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
비밀 공간을 빠져나오자, 별관으로 막 들어서는 수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커스 경과 벨루카가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별관 안으로 들어서 한 방 앞에 다다랐다.
다행스럽게도 문이 열려 있어서 안으로 몰래 들어설 수 있었다. 둘은 방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짐짝처럼 옮겨진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작은 아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수하와 하녀 두 명, 하인 한 명이 방 한가운데에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저것을 깨끗이 씻기고 먹여라.”
“네?!”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하녀가 기겁을 했다.
죽은 시체처럼 보이는 아이는 더러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손끝 하나도 대기 싫었다.
“후작님의 명이시다.”
“알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고참 하녀가 마지못해 답했다.
“저 상태로는 도망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잘 감시하도록 하고.”
일방적으로 할 말을 끝낸 수하가 방을 나갔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람.”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
“죽은 걸 씻고 먹이라고 하진 않겠지.”
고참 하녀가 신발 끝으로 아이를 쿡 찌르자, 희미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봐, 살아 있잖아.”
“그, 그러네요.”
어린 하녀가 여전히 겁먹은 목소리를 내었다.
“넌 가서 물 좀 떠 와.”
“응, 알았어.”
멍하니 서 있던 하인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고참 하녀의 지휘 아래 방에 욕조와 목욕물이 준비되었다.
하녀들이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옷을 벗기려 할 때쯤 마커스 경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혹시 모르니까.’
아니나 다를까.
“어머, 얘 여자애잖아!”
“그, 그럼 난 나가 있을게.”
당황한 하인이 재빠르게 문을 닫고 나갔다.
반면 마커스 경은 자신의 현명했던 처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벨루카가 왜 그러냐는 듯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마커스 경이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으며 자신의 손으로 벨루카의 두 눈을 가렸다.
하녀들은 구시렁대면서 아이를 거칠게 씻기기 시작했다. 양동이가 여러 번 방 안을 들락날락거렸고, 욕조의 물이 갈렸다.
마침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진 소녀의 몸이 침대 위에 놓였다.
뒷정리까지 모두 마친 고참 하녀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나 죽겠다.”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