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참고로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남자 인간이 맞긴 한데 아스테리온 카일라니라는 이름이 있어. 편하게 아스테리온이나 아스라고 불러 줘. 벨루카, 간식이 부족해? 더 가져오라고 할까?”
- 아스, 더 내놔!
아스테리온이 옆을 향해 눈짓으로 빈 간식 접시를 가리켰다.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안드레아스가 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에게 간식을 더 가져오라고 전달했다.
그 후 벨루카는 무려 세 판의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해치우고서야 만족스럽게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긴 몸이 한쪽 소파 전체를 차지했다.
‘남자 인간,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호칭은 다시 남자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아스테리온에 대한 벨루카의 평가와 호감도가 손톱만큼 올라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 뭐냐, 남자 인간. 나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부려 먹으려고 해!
벨루카가 몸을 벌떡 일으켜 아스테리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장 일하는 건 아니야. 일하기 편하게 서로 수신호를 정하자는 거지.”
- 수신호? 그게 뭐냐?
“우리 편끼리 서로 몸과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거야.”
- 뭐 하러 불편하고 귀찮게 그런 걸 해? 말로 하면 되지.
“적진에서 들키면 안 되니까. 그리고 너하고 나는 말이 통하지만 내 부하들하고는 서로 말이 안 통하잖아.”
- 남자 인간, 네가 있잖아.
“이번 임무는 너와 내 부하들이 담당할 거야. 그러니까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필요해.”
- 흥!
아스테리온이 심통이 난 벨루카를 살살 달랬다.
“임무 끝나면 먹을 수 있도록 간식 준비하라고 할게. 뭐로 준비해 놓으라고 할까?”
- 이번엔 블루베리 케이크랑 애플파이로.
“블루베리 케이크랑 애플파이.”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안드레아스에게 읊어 주자 벨루카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자, 그럼 우리 수신호 연습을 시작해 볼까?”
- 알았다. 하자.
벨루카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 * *
록사나가 소담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인이 몸을 우아하게 일으켜 세워 저택의 주인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튜베 영애.”
“안녕하세요, 아벨리오 남작님. 연락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는데도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투자 설명회 중 예고 없이 찾아왔던 손님은 모니카 튜베 남작 영애로 도노반의 현 정부였다.
“좀 놀라긴 했지만 괜찮아요. 그리고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바로 올 수가 없었어요.”
록사나는 일부러 그녀를 기다리게 한 게 아님을 밝혔다.
“아니에요, 결례를 범한 건 전 걸요.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와 차를 대접해 주셔서 이를 즐기느라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그러셨다면 다행이에요. 자, 우리 이러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 나눠요.”
“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그사이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고는 찻잔과 다과를 새로 내왔다.
“차를 이미 드셔서 생각이 없으실 수도 있겠지만 이건 커피라는 음료 종류 중 하나인 카페라테예요. 괜찮다면 한번 드셔 보실래요?”
록사나의 권유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모니카의 입가가 살짝 허물어졌다.
“좋아요. 커피랑 카페라테, 저도 들어 봤어요. 이렇게 귀한 걸 맛볼 수 있게 되다니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천만에요.”
“영애께서는 차가운 아이스 카페라테가 좋으세요? 아니면 따뜻한 카페라테가 좋으세요?”
아이린이 물었다. 모니카가 잠시 망설였다.
“음, 고민이 되네요. 남작님은 어떻게 드세요?”
“저는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로 마셔요.”
“그럼 저도 따뜻한 걸로 마셔 볼래요.”
이에 록사나가 아이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린, 영애께서 둘 다 마셔 볼 수 있게 아이스로도 부탁해.”
“네, 남작님.”
커피 향이 응접실 안에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하며 다소 딱딱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모니카가 카페라테를 제조하는 아이린의 손놀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록사나가 모니카의 얼굴을 살폈다.
‘황궁에서 볼 때와는 인상이 완전 확 다르네.’
도노반의 옆에서 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모니카의 눈은 죽어 있었다. 반면에 지금은 그녀의 진분홍빛 눈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록사나와 모니카의 앞에 커피 잔이 놓였다.
따뜻한 것과 차가운 카페라테를 번갈아 마셔 본 모니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따뜻한 것도 좋지만 요즘 날이 더워져서 그런지 저는 아이스 카페라테가 더 좋네요.”
다른 귀족이라면 집주인과 같은 것을 선택해 놓고 자신의 취향을 고백하는 모니카의 말에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록사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완전 솔직한데!’
오히려 여러 면에서 자신의 예상을 깨는 모니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모니카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일일이 예법을 따지는 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말아요, 튜베 영애.”
“남작님은 마음이 넓으시군요.”
모니카가 이내 안심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현했다.
“저는 무엇보다 영애가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척 궁금해요.”
“아, 네! 남작님 사업에 저도 투자하고 싶어요. 저번에 황궁에서 말씀하셨던 그 4구역 사업에요.”
록사나와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참 의외였기 때문이다.
“역시 투자자들을 다 모집하셔서 더 이상 투자자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아까 보니까 그레이슬린 공작가랑 다른 가문 마차들이 있는 걸 봤어요. 그래서 이제는… 제가 늦은 건가요?”
모니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가 간절하게 록사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의도일까?’
록사나는 순수해 보이는 모니카의 눈빛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튜베 영애께서 제 사업에 투자를 하시겠다니 좀 놀랍군요. 영애도 아시다시피 제 사업은 대차게 거절당한 전적이 있잖아요. 돈은 퍼부어야 하는데 한없이 수익이 낮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록사나의 눈빛이 단번에 사늘해졌다. 그녀의 기세에 모니카가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날 티 파티에서 남작님이 하신 말씀이 저는 다 맞는다고 생각해요. 물론 처음에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가겠죠. 아직은 더럽고 냄새나는 동네라서 그렇지, 4구역 주변 자연 환경과 위치가 좋잖아요.”
모니카가 록사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록사나도 그녀에게 계속해 보라는 눈짓을 했다.
“그러니까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그곳의 위상이 달라질 거예요. 깨끗한 집과 거리가 형성되어 부동산 가격은 자연스럽게 오를 거고,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업이 활발해질 거라고 봐요.”
모니카의 말을 경청하며 록사나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하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집안이 꽤 어려워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저 식견은 뭐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혼자서 판단하고 유추한 것일까?’
록사나는 후자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알아요. 남작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제 투자는 황태자 전하와는 전혀 상관없어요. 제가 남작님 사업에 투자하려 한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시고요. 물론 제가 황태자의 정부다 보니 믿기 힘드실 거예요.”
록사나가 무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니카는 할 말을 다 하겠다는 듯 용기 있게 다음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믿어 주세요. 저는 황태자의 끄나풀이 아니에요. 제가 제일 사랑하는 동생을 걸고 신께 맹세해요. 흑흑흑.”
어느새 감정이 격해진 모니카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여기서 절대 포기하면 안 돼, 모니카!’
모니카가 마음을 다잡으며 울음소리를 참아 내려 이를 악물었다.
“흑흑……. 남작님 사업에 투자를 할 수 없게 된다면 저는 벗어날 수 없어요. 제 동생도 저와 같은 길을 걷게 될지 몰라요.”
끝에 다다른 모니카의 외침은 절벽 위에 선 자의 것이었다.
록사나가 말없이 모니카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동생도 저와 같은 신세가 될 거라는 그녀의 말이 록사나의 가슴에 콕 와 박혔다.
모니카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튜베 영애, 괜찮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해 줄래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가 록사나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변화를 느낀 모니카가 더듬더듬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니카는 튜베 남작가의 둘째였다. 가족은 부모님과 오빠 한 명,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튜베 남작가는 그녀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겨우 귀족가의 명맥을 이어 오고 있었다.
아버지인 튜베 남작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해가 지날수록 가세는 기울었고, 한 세대만 지나면 평민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튜베 남작과 그녀의 오라버니인 소남작이 가문을 일으키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다 망한 가문을 상대해 주는 곳은 없었다.
튜베 남작과 그녀의 오라버니가 가문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해 갈 때쯤이었다.
3년 전, 모니카는 집안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게르델 백작 영애의 시녀로 들어갔다.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급여는 많지 않았지만 모니카는 나름 만족하면서 나쁘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시녀 일을 시작한 지 1년 후, 도노반이 게르델 백작저를 방문하면서 모니카의 상황과 생활은 180도 변했다.
모니카를 본 도노반은 그녀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이에 게르델 백작이 튜베 남작에게 넌지시 은밀한 제안을 했다.
튜베 남작은 딸 하나만 황태자에게 바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니카는 도노반의 정부가 되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이에 튜베 남작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인 벨라를 두고 협박했다.
네가 나서지 않으면 벨라가 돈 많은 이에게 팔려 가게 될 거라고 말이다.
그 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이어졌다. 모니카는 도노반의 정부가 되었다.
대신 그녀는 튜베 남작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벨라에게 귀족 영애에 걸맞는 교육을 시켜 줄 것, 벨라와 자신의 혼인 상대에 대한 결정권은 각자에게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모니카가 도노반의 정부가 되어 가지게 되는 모든 재산의 소유권이 온전히 그녀에게 있다는 것이었다.